건립과 김택균 일가의 사회구휼 활동 - 사회구제의 공간
원래 소재지인 구례 마산면 냉천리에 건립한 사람은 국포 김택균이다. 김해김씨 안경공파인데, 조선 성종 때 대사성을 지낸 김영정(金永貞)을 파조로 한다. 경기도 고양(왕십리)에서 김택균의 부친 농산 김주홍(農山 金周弘, 1832~?)대에 구례로 입향하였다. 부친 김주홍은 경기도 고양2)에서 1891년(고종 28, 신묘)에 하동 화개로 이주하였다가 1900년(경자)에 구례 간전면 양동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김택균은 29세였다. 김주홍은 마포 상으로 만석부호를 이루어 향방에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김주홍은 김성균, 김택균 두아들을 두었으며 큰 아들 김성균(金晟均, 1865~?)은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고 작은 아들 김택균은 구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김택균은 1904년(갑진)에 통신사(通信司) 주사를 지냈고 1906년(병자)에는 용천군수(龍川郡守)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7년에는 간전에서 마산면 냉천리로 이주한다. 1918년에는 아버지 김주홍이 회갑을 맞이하자 형 김성균과 그 아들 김종현(金鍾顯)이 구례성내에 홍제원(弘濟院)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구호 활동을 한다. 김성균와 김종현이 7년간 운영을 한다. 1920년(경신)에는 사랑채(현 곡성 성륜사 육화당)를 짓고 문인과 교류하고 사회사업을 논의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1922년(임술)에는 안채(현 곡성 성륜사 안심당)를 중건한다. 3)
1924년(갑자)에는 형 김성균4)이 서울에서 활동했던 관계로 김택균이 고아원을 운영하게 되고 위치도 마산면 냉천리로 옮긴다. 이후 김택균이 1945년(을유) 8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아원 운영과 주민 구휼활동 등 사회 구제활동에 전념하게 되고 그 활동의 논의 공간이 사랑채(현 성륜사 육화당)가 된다.
2) <구례군지>(하, 2005, 616쪽)에는 김주홍이 1832년 광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고 있다. <국포실기>(1946년 간행)에 실린 김택균의 가장(家狀, 金鍾弼 述)에는 김택균이 고양 왕십리 집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택균이 태어날 무렵(1872년)에 부친 김주홍은 고양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3) 국포고택 소재지인 구례 마산면 냉천리 510-1번지 건물 등기자료(2017.06.29일 구례군수 발행)에는 1958년 8월 28일 소유권 보존이 되어 있으며 소유자는 김종필(마산면 냉천리 510)이다. 건물내역은 목조 기와지붕 단층주택 33평, 목조기와지붕 단층주택 5평이다.
한편 냉천리 510-1번지의 토지소유자는 김주홍(1914.10.10)-김성균(1922.2.9)-김의현(1926.12.27)- 한응수(1933.12.16)-김정호(1936.12.29)-김택균(1936.12.29)-김종필(1946.10.25)-김○○(1979.5.4)-김○○(2005.2.20)로 확인된다.(2017.6.29 법원행정처 등기정보중앙관리소 발행, 폐쇄등기부등본) 국포고택 안채와 사랑채가 건립될 당시 1920~22년에는 김주홍과 김성균이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토지는 1936년에 김택균이 소유한 이래 그 자손이 계속 소유하고 있다.
4) 구례 국포고택 이축 때 호패형 석비 1기를 함께 옮겼는데 김성균의 공적기념비이다. 지금은 성륜사 백련당 입구에 있다. 크기는 높이 123.0cm, 너비 42.0cm, 두께 12.5cm이다. 가운데에 ‘前 議官 金公晟均 紀念碑’라 내려쓰고 좌우로 4언 찬문을 적고 있다. 옆면에는 ‘庚午八月 日 花開面小作人立’이라하여 세운 연대와 세운 주체를 기록하고 있다. 경오년은 1930년이며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소작인들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균의 부친 김주홍이 처음에 하동으로 이거하는데 이와 연관하여 하동 지역의 소작인이 세운 것 같다. 찬문은 다음과 같다.
奉承先業 捧稅寬平 선대의 업을 받들어 잇고 세를 내는데 너그럽고 공평했네
窮挾農民 賴以保生 궁구한 농민을 끼고 살면서 믿음으로 생활을 보장했네
一定小作 久不變更 한 번 정한 소작은 오래도록 바꾸지 않았으니
衆口頌碑 伐石刻名 여러사람의 칭송이 이어지니 돌을 깎아 이름을 새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