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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창비 세미나에 갔다가 한성옥 선생님이 하시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로지의 산책>이라는 그림책 얘기였는데요. 그 날 김상욱 선생님이 반동일시의 그림책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해 반론을 펼치셨는데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반동일시라는 건 글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림이 표현되는 거라고요. 제가 잘못 이해한 거라면 누가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어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는 데 뒤에 그림자는 그 어른에게 한 방 먹이고 있는 거랄까요. 그래서 이런 방식의 표현으로 인해 가치의 전복이나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근데 마지막에 김은하 선생님이 이 준거들을 그림책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셨거든요. 이런 개념들이 나오게 된 맥락에서의 의미가 있다구요. 이에 대해 김상욱 선생님은 자신은 그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개념들만을 가져온 것이라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저는 이 부분을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두 분 사이에서거나 아니면 전체적으로라도 이 부분에 대한 얘기가 있었으면 했는데 시간이 모자라 그냥 끝나버렸지요. 무척 아쉬웠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참 많이 있잖아요. 이 점에 대해서 언제라도 얘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성옥 선생님이 <로지의 산책>을 준비해온 그림들로 보여주셨습니다. 로지가 산책을 가는데 여우가 뒤에서 계속 로지를 따라가지요. 여우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로지는 모릅니다. 단지 독자만 아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김상욱 선생님이 반동일시 그림책이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로지는 태평하게 여기저기로 산책을 가고 독자들은 가슴을 졸이고 지켜봅니다. 언제 여우가 덮칠지 몰라서요. 그러다 나중에 여우가 로지를 덮치는데 실패하고 로지는 무사히 산책을 끝마치는 그런 이야기지요. 아주 단순한 이야기지요. 한성옥 선생님은 이 책이 김상욱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반동일시 그림책으로 어떤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전치사를 배우기 위하여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우를 등장시키는 기법을 썼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강한 기억으로 그 말들을 남기기 위해서라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깊은 의미는 없는 책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근데 전 그 순간 아주 다른 느낌을 그 책에서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거든요. 로지가 바로 우리고 여우는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아니면 우리의 욕망, 탐욕, 교활함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여우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요. 그러나 로지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아, 그 책이 저에게 있다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얘기해보겠습니다. 로지는 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까요? 왜 그렇게 편안하게 자신의 여정을 즐길까요? 어쩌면 로지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우의 존재를. 그렇다면 무엇이 로지를 침착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전 그것이 글 또는 말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예전엔 몰랐지요. 하지만 한성옥 선생님이 우리 말로 번역된 책은 잘 모르겠지만 원서를 보면 모두가 전치사로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놀라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랬구나! 하지만 단순히 전치사를 가르치기 위해 이런 그림책을 만들었을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놀라운 의도가 무의식적으로 이 그림책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의도가 실현되었기에 더욱 놀라운 건지도 모르지요.
그 날의 주제는 <어린이 문학과 일러스트레이션>이었고 김상욱 선생님은 특히 글과 그림과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어 이야기하셨지요. 거기에 이어지는 <로지의 산책>은 저에게 놀라운 기쁨과 영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글과 그림의 이렇게나 절묘한 조화라니! 전치사는 주로 방향을 지시하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에게 깨어있음을 요구합니다. 그림에서는 로지를 덮치려는 여우가 있고 글은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더불어 로지가 깨어있음을 알게 하고, 로지를 깨어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충분히 깨어있다면, 의식적으로 우리의 길을 간다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것도 우리를 덮치지 못하겠지요. 이런 무의식적 깨달음은 아이들을 불안과 좌절로 몰아넣지 않고 결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기면 또다시 로지를 덮치려는 여우를 보고 놀라고 그러나 글이 또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 거지요. 이런 반복 끝에 아이들은 안도와 위안의 한숨을 내쉬게 되는 거지요.
단순한 말들, 예를 들어 마당을 지나, 들판을 가로질러, 이런 말들이지요. 그러나 우리 말로 해서는 이 그림과 글의 완벽한 조화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번역의 어려움이 또 한 번 드러나는 거지요. 어떻게 하면 원문이 갖는 이러한 느낌을 살려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이 좀 오버일지도 모르지만 전 정말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그림책이라는 건,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이라는 건 정말 특별하다구요.
한성옥 선생님은 그림책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하나의 책이, 하나 하나의 그림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완벽하게 표현할까를 고민한다고 하셨지요. 어떤 판형으로 할 건지, 어떤 색을 쓸 건지, 누구의 시점에서 바라볼 건지... 따위의 제가 알지 못하는 전문적인 고민들을 하시겠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참으로 지적인 사람들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석하고 따지고 판단하고 고도의 사유를 필요로 하는 일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던 거지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만 작업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그건 안 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예술적인 작업이라는 거 말이지요.
제가 앤서니 브라운을 그리 좋아라 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웬지 그이의 그림책을 보면 차갑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을 생각하고 그렸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보는 이에게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는, 그래서 그림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근데 전 그림을 읽고 싶지 않거든요. 전 그저 그림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림은 추리소설도 아니구요. 미스테리도 아니지 않나요? 이런 그림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지나치게 자극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그래도 아이들의 머리는 지나치게 피곤한데 말이지요. 그림마저도 아이들의 위안이 아니라 학습의 도구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그림책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포괄하는 장르로 생각하기에 이런 경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어른들과는 정말 다른 존재라는 걸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책이 아니라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책을 아이들에게 읽히는 폭력을 일삼는 일도 생기게 되는 것이죠. 지갑을 여는 손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니까요. 물론 일러스트레이션이 지적인 작업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이 누구에게 적합한 것인지는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쩌면 만드는 사람은 창조의 자유가 있겠지요. 누가 무얼 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책임은 부모의 몫이겠지요.
우리 아이는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무얼 원하는 지,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세태를 따라가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상업적 대상으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든다고 하면서 어른의 취향이나 흥미를 염두에 두고 있지나 않은 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오랜만에 그림책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던 창비 세미나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저에게 신선한 생각들을 불어넣어준 선생님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저를 따라다니며 호시탐탐 덮칠 기회를 노리는 것들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거겠지요. 아이들을 좀더 사랑해야겠습니다.
첫댓글 말씀 중에, 그림을 그저 보고 싶지, 읽고 싶지 않다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유리 슐레비츠나 데이빗 위즈너와 같이 글 없이 그림으로만 전개된 그림책을 볼 때, 저는 솔직히 당황합니다. 작가는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나,,,, 혹시 감상자(독자라고 하기에는 읽는다는 행위가 전제되는 듯 하네요.)에게 해석의 가능성
해석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준 것으로 받아들여야하는지, 아님 언어가 전달하는 것보다 더욱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제가 수준미달이라 이해 못하는 것인지... 하여간 글없는 그림책을 볼 때, 저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내가 성격이 무척 급하긴 한가보네. 뒷장으로 넘기고 싶으니...'
저는 그저 늘 독자의 자리에서 책을 보나 봐요. 그냥 책을 보는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한거 같아요. 근데 데이빗 위즈너는 제가 잘 모르거든요. 유리 슐레비츠의 그림도 그닥 좋아하진 않아요. 뭔가 , 뭔가가 좀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거든요. 그럴 땐 저도 빨랑빨랑 뒷장으로 넘어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