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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통일의 꽃' 임수경 방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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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하 평양축전)에는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참가자가 있었다.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임수경. 그녀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것이다.
임수경은 단연 평양축전의 프리마돈나가 되었고, 단발머리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거침없이 말하며 자유롭게 행동하는 그녀에게 평양시민들은 열광했다. 평양축전은 임수경만을 위한 행사처럼 보였다. 89년은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공안정국에서 이북을 간다는 자체가 목숨을 건 무모한 도전쯤으로 여겨지는 시대상황 이였기에 한 여대생의 행보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80년 광주를 경험하면서 민주화는 자주와 통일의 문제와 뗄 수 없다는 피의 교훈을 얻은 민중들은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연스럽게 자주와 통일 문제로 관심이 번져갔다. 88년 3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김중기씨가 김일성종합대학에 제안한 '청년학생체육회담'을 시작으로 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마련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과감한 도전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해 평양축전에 참가 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총학생회가 대거 당선된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2차 대전 직후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영국에서 열린 '국제청년학생회의'로부터 시작되어 85년 모스크바 축전에 이르러서는 157개국 2만명이 참석하는 국제적 행사로 성장했다. 13차 축전은 7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89년에 결성된 3기 전대협은 의장단 회의를 통해 평양축전에 대표를 파견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해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힘입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임종석 당시 전대협 의장은 "워낙 엄혹했던 시대라서 방북은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기징역이나 최하 20년 이상의 감옥생활을 각오해야 했다"면서 "남측 대학생이 평양에 가서 통일 의지나 열망을 전 세계에 전달한다면 청춘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뒤늦게 학생운동을 시작한 임수경은 굉장히 도전적이고 옳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행동하는 성격"이라며 "무엇보다 용인성남지역 축전준비위원회 정책실장이었기 때문에 참가의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선발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워낙 어려운 상황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고민도 뒤따랐다"고 덧붙였다. 전대협은 임수경 대표에게 두 가지 행동지침으로 어느 정부도 정치적으로 비방하지 않을 것과 반드시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것을 전달한다. 당시 전대협 관계자는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다는 것은 미군에 의해 총을 맞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며 "이런 내용을 임수경에게 전달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전하고 "그만큼 분단의 상징을 걸어서 넘는다는 것은 반통일 정권과 미국에게 정치적 부담이다"라고 강조했다. 임수경은 그해 6월20일 일본으로 출발했고 독일과 중국을 거쳐 30일 순안공항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평양에는 오랜 여행으로 지친 임수경을 위해 수십만 인파가 모여 열렬히 환영했고 숙소로 향하는 차량은 밀려든 인파에 의해 가다 서기를 몇 차례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임수경의 활동은 기대 이상이라고 평가 받는다. 임종석 당시 의장은 "북에서 보인 임수경의 활동은 정보기관에서도 놀랄 만큼 균형 있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하고 "북이 제시하는 일정을 무조건 따르지도 않고 정확히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켜 200% 수행했다"고 강조했다. 평양축전 폐막일, 임수경은 남측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북측 학생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이 타의에 의해 걸어온 45년의 분열은 민족 비극의 45년이었다'는 내용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한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외국 참가자들은 일제히 "Korea is one!"을 외쳤다. 평양축전이 폐막된 후 임수경은 30여 개국 평화운동가 300여명과 7월20일부터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이르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오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적힌 플랑카드를 든 대행진단 뒤에는 판문점이 가까울수록 늘어나는 끝도 보이지 않는 군중들이 함께 했다. 통일각에 도착한 임수경은 무사귀환을 위해 '천구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급파한 문규현 신부를 만난다. 하지만 판문점 군사붕괴선을 넘어 귀환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정전협정 당사자인 유엔측이 불허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임수경은 100여명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마침내 8월15일 오후 2시20분, 태극기를 몸에 두른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손을 꼭 잡은 채 귀환한다. 분단선을 넘자마자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곧바로 체포되어 안기부로 끌려갔다. 이후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지령수수, 잠입탈출, 찬양고무 혐의 등이 적용돼 각각 징역 5년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92년 말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목숨을 걸고 분단의 장벽을 넘어 통일의 열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확인시켰으며 조국은 하나임을 남과 북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킨 임수경과 청년학생들의 도전. 이후 민간통일운동은 대대적으로 확산됐으며 정부의 통일정책을 뒤흔들어 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94년 '정상회담 합의' 국면까지 이어졌다는 평이다. 또한 그녀에게 감동받은 이북 인민들은 주저 없이 '통일의 꽃'이라 부르며 임수경을 기억한다. |
첫댓글 김중기님의 근황이 궁금 하네여. 전에 영화에도 잠깐 나오시던데.선생님이 꿈이라고 하시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