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니던 길 야트막한 산 중턱엔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나누어진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친구들은 학교에서 돌아 올 때면 언제나 갈림길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지곤 했습니다.
윗동네에 살았던 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언덕길을 매일 오르면서도 한 번도 곧장 내달리는 숲길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아랫동네에 사는 사람들만 다니는 길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나무 숲 아래에 번지던 초록 물이 점점 주춤해 지고 풀 속에 숨어 기다리던 구절초 무리가 고개를 들던 어느 해 가을 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늘 회전목마를 타고 있던 아이처럼 외면하던 아랫길을 나도 몰래 그 숲의 그늘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조붓한 숲길은 오로지 나무 그늘로만 분칠을 한 듯 어둑했고, 때마침 부는 바람에 날아온 산 짐승 썩은 내는 내 작은 심장을 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만치 앞선 길에 섬광처럼 쏟아지던 햇살이 없었더라면 울렁이는 내 심장을 나는 예측불허의 파도 밭에 내던지고 말았을 겁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소나무 숲이 끝나기도 전에 설핏 보이던 낭떠러지와, 그 아래 옥 빛 파도의 숨결이 오로지 나만의 것인 냥 떨리는 감동을 안고 아치를 이루던 숲길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습니다. 숲길에 잠깐씩 들어와 내 마음을 녹이던 햇살이 무수히 쏟아져 은빛 여울을 만들어 놓은 그 너른 바다를… 목메어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다는 희열의 첫 경험을 그 어린 날 고통의 흔적도 없이 넓고 넓은 바다에 보석같이 빛나던 은빛 여울 속에 치루고 말았습니다.
뱃길,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포말처럼 부서졌다 모이고 또다시 길을 이루는 생의 뒤란에는 멀리 돌아오던 길과 길 위의 내 발자국이 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길은 내 세상의 넓이와 길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내 세상에 넓은 평지를 이루었다면 순간의 번뇌(煩惱)는 평지를 가로질러 어디론 가 사라지고 만 강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의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작은 섬을 이루고 있는 내 그리움의 결정체는 바로 내 안의 평화와 안식입니다.
또 다시 떠나는 시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너무 먼 길, 더디게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탓하지 말며, 시간만큼의 세상을 보아주기로 합시다. 그 끄트머리에 만날 우리네 은빛 여울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