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 : 25 - 34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읽으면 우리의 세상사를 돌보아주시는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강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말씀만큼이나 따스하게 느껴지는 주님의 품안! 거기 기대어 살면 우리는 마치 이 험난한 세월을 아무런 걱정도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주님을 어찌 믿지 못하고 그동안 삶에 대한 염려를 했을까.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해 의심하며 안절부절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겠지요. 이렇게 세상의 걱정거리는 주님이 도맡아 해결해주실 것이니 우리는 정작 영적인 일에나 관심을 쏟으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는 역사가 일어날까요? 공중에 나는 새도, 들에 핀 백합화와 들풀도 천부께서 기르시고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인간일까 보냐....... 참으로 감사하신 주님이 아니시던가요.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지난 한 때로 족하고 이제는 보다 본질적인 주님의 참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라는 부분을 잘못 읽으면 이 말씀 전체의 뜻을 비 진리로 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 말씀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결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만 모든 기대를 건 나머지 인간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약화시켜 버리는,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실이 어려울 때 저 말씀은 모든 염려를 가라앉혀 주기에 참으로 적합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어둡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산 능력의 말씀으로 불려지나 봅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을 보는 시력이 약할 때나 그런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어서 점차 말씀에 대한 이해가 성숙하여 감에 따라 진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처음과는 달리 많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성경을 읽는 눈은 참으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데 왜냐하면 그 눈 곧 진리에 대한 그 사람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으면 말씀을 대할 때 거기 담긴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말씀을 각색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마 6:22)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물질 등의 땅의 것들에 사로잡히면 주님을 생활의 걱정거리를 처리해주는 해결자로 바라보게 되고 따라서 진리의 말씀 역시 그러한 눈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원치 않으나 세상사에 길들여진 눈에 의해 세상임금으로 삼아지고 진리는 모독을 당하시는 것이지요. 이를 피하기 위해 유대 땅에서의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다니시기를 원하셨고 초자연의 역사를 행하셨을 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심으로 그러한 결과가 낳아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자들의 잘못된 이해를 성치 않은 눈에 비유하여 빼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위에서 주님은 공중의 새들이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하니 하며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을지라도 또 들의 백합화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함에도 불구하고 자비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고 자라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이 생활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아니 할지라도 주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들 육체의 삶을 돌보아주실 것을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세상의 모든 자연적 사물들은 저 영적 세계의 실재를 그 속에 담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연은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처음 그들에게 심기워진 본성을 거부하는 어떤 몸짓도 없이 내부에 일하시는 신성에 잘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달리 악한 요소가 없어서 그 악을 몰아내기 위한 어떤 싸움과 수고도 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 천국의 안식 상태인데 주님이 새와 꽃을 비유로 들며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고 하신 이유는 악으로부터 오는 모든 싸움이 종식된 상태가 바로 안식이며 하나님 나라이기에 이 악을 버리지 못한 처지로 사람이 천국을 원할 때는 그 염원이 탐욕에 의한 염려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오늘을 빛 가운데 살면 내일 일에 대해 염려가 없다는 뜻이며 결국 천국은 이 세상의 삶이 올바른 자가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영생을 소유하기 위한 수고 즉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얻기 위한 수고와 염려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반목하는 성질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인생 전반을 통하여 악과 계속적인 싸움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창세기 하와로부터 성경 전반에 걸쳐 여인 곧 교회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여인이 해산하는 괴로움이 족히 끝나고 진정한 아들을 낳을 때 곧 중생이 이루어져 겉 사람이 속 사람에 복종하는 상태에 이르면 평화가 찾아오는데 이것이 천국의 기쁨인 것이고 모든 수고가 끝나는 때인 것이지요.
따라서 천국은 주님을 구주로 믿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 작은 일에부터 충성하며 오늘을 선하게 산 자가 그의 삶이 증거한 대로 저곳에서도 그와 같은 삶을 이어받을 것이 분명한 고로 오늘을 선하게 산 자는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으며 그제서야 비로소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주님이 예비하신 집에 거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본래 그 지닌 악으로 인해 그것을 물리는 수고를 해야 천국의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새와 꽃 등의 자연은 그 본래적인 악이 없기에 그들은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이지요. 인간이 그 영혼을 위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을 염려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반하는 그의 악과 거짓에서 비롯되기에 그것들을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을 버리고 선한 삶을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 내일은 이 세상의 내일을 지나 천국의 삶까지를 의미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산 한 날은 바로 천국의 상태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또 내일이 천국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한 날이라면 지상에서의 한 날 곧 오늘은 사람의 생애 전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한 날의 의미는 인생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서 해가 뜨는 아침이 그 인생의 첫 시발점이라면 해가 기우는 황혼은 그 인생의 종착을 가리키기 때문이지요. 인생 전반에 걸쳐 악과 극렬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인간의 수고와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이것이 '한 날 괴로움(재앙)은 그 날에 족하다'는 뜻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산상 수훈의 말씀들은 이와 같이 인간의 물질적 생활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자 진리를 가르치시는 말씀이고 하나님 나라가 온 땅에 곧 사람들의 마음에 임하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애쓰심인 것이지요.
본문 이전의 내용들을 잠시 살펴보면 금식에 대한 가르침,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는 말씀 등의 가르침을 펴신 후에 주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흐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것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외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상의 사물들로 그 비유를 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감각과 물질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어렵고 난해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삶에 친근한 표현들을 사용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 가르침의 실제적인 것들이란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악을 버리고 거기 선으로 가득 찬 하나님 나라 곧 이 땅 위에 진정한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영혼 구원의 구원 사역을 베풀고 계신 것이지요.
먼저 금식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면 이는 자기 속에 거하는 악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이 끊긴 상태를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신랑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곧 선과 진리의 충만한 삶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온갖 양식을 공급받기에 금식이 필요 없고, 신랑을 빼앗기는 상태 곧 악으로 인해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에는 그 영적 양식을 얻지 못하기에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식 본연의 뜻은 자신의 악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영적 양식이 끊긴 상태를 자각하고 이를 슬퍼하며 그 악을 버리려는 회개의 움직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58장6-7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반면에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금식은 내면에 있는 악을 몰아내고자 강렬히 회개하는 마음이 단지 곡식을 끊는 외적 현상으로 표출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금식에 임하는 일반적인 자세는 악을 버리는 회개보다는 곡식 끊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를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 주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머리는 사람을 움직이는 주체로서 이는 그 사람의 이해성을 주관하는 생각이나 사상에 대응하고 기름은 열 처녀 비유에 쓰인 바와 같이 사랑에서 나온 선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금식 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지금껏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사랑을 도외시 한 까닭에 참된 믿음을 형성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그것을 수정하여 이해성에 담겨진 진리의 지식들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얼굴은 그 사람 애정의 상태를 반영하기에 금식 할 때 얼굴을 씻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수정할 때 이해성이 변화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의지에 쌓인 악까지 몰아내는 것을 뜻하지요.
이상 금식의 내적 의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가 외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순수하고 본질적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바른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의 내면을 고치시려 말씀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자꾸 그 내면보다는 외적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비중을 두어 성경을 읽기에 종국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육체적 어려움이나 만족시키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러하기에 성경을 읽는 시각도 사뭇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원래 성경에 쓰인 보물이나 보화, 재물, 부자, 가난 등의 의미는 물질적 개념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를 증거 해보자면 주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을 따르기 앞서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보물은 무엇인지 먼저 자신의 생각을 열러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보물은 그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은 사람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여러 형태의 개념으로 해석이 됩니다.
여전히 물질적인 것을 보물로 여기는 자는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물질을 성전에 바치거나 구제 활동 등으로 주님의 말씀을 충분히 따랐다고 여길 것이고 진리의 지식을 풍성히 지닌 자들은 주님을 아는 지식 자체가 아주 귀한 생명의 말씀으로 여겨지기에 그 지식을 하나씩 깨닫는 것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이해하며 영적 진리에 관한 소중한 책이나 문서들을 대단히 아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나 이웃이 귀하게 보이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자신의 보물로 삼겠지요.
얼핏보면 이 세 가지 모두를 주님이 하늘에 쌓아두라는 그 보물의 개념으로 생각하여도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간에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것은 주님 말씀에는 이것을 팔아 저것을 사야 한다는 식의 차등이 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 물질과 지식을 보물로 여기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삶에 비해 보물로서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보물은 그 사람의 생명과도 같은 가장 값진 것이어서 밭에 감추어진 보화나 진주 등을 캐기 위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할 정도의 성격을 지닌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람이 가장 귀한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영혼 구원을 위한 가장 값진 보물은 주님을 믿고 사랑함으로 그분의 계명을 따라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 이것들 외에 우리가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보물의 개념을 지닌 또 다른 것이 있다한들 그것들 역시 가장 값진 것을 사기 위해 팔려야 할 보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중히 여기는 보물의 관념에 입각하여 신앙 생활을 할 것이고 그러한 신앙관은 내면의 주도적인 애정으로 굳어질 것이며 사후에 그렇게 굳어진 영혼의 성품에 따라 사람은 자기가 보물을 쌓아둔 세계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 적당한 비유로 자신이 보물을 쌓아둔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성경 속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거기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열락하는 부자가 나오는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곳의 부자는 재산이 많은 자를 가리킴이 아닙니다. 또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 속에 나오는 부자의 의미 역시 그러합니다. 이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의미는 사랑의 삶은 없이 이해성에 쌓여진 지식으로 말씀의 풍족함만을 누리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하면 곧 말씀을 통하여 진리의 지식을 풍족히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참 교회 안에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항상 부요에 젖어있는 유대인들이 그러한데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열락하는 부자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반면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상태에 있는 이방인들을 주님은 거지 나사로에 비유하신 것이지요.
성경 속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걸치고 날마다 열락하는 반면 거지 나사로는 그 문 앞에 헌 데를 핥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보면 자색 옷과 고운 베옷 등은 참신자가 입는 예복이나 세마포 처럼 진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열락 한다는 것은 진리를 귀한 보물로 여기며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자가 지옥에 처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이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재물을 혼자 독식하며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비해 영적으로 빈곤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깔보며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만심이 가져온 악 때문에 지옥이 그의 거처가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로 보건대 부자와 거지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거지 나사로가 문 앞에서 헌 데를 핥는다는 의미는 진리의 지식이 없어 교회에 속하여 있지는 못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악을 치유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선하게 살려는 이방인들의 겸손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부자의 문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헌 데를 핥는 겸손한 자의 신앙이고 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자의 신앙 상태인데 그는 진리의 지식을 풍족히 가진 자들에게서 진정한 선은 아닐지라도 얼마간의 진리들을 배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 중 헌 데나 독한 종기, 상처 등은 모두 영혼이 악과 거짓에 물들어 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고 핥는다는 것은 그것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부자의 문 앞에서 자신의 헌 데를 핥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말씀이니 우리 모두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모두가 주님의 교회에 속하여 있다고 말할지라도 내면으로까지 진정한 교회에 속하기 위해 이 말씀 등으로 깨우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경 해석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눈이 가려진 채 외적이고 감각적인 눈으로만 성경을 대하는 관계로 말씀의 영적 의미보다는 문자적 의미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류는 주님께서 영이요 생명이 되는 말씀의 참 의미를 외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의 이해에 맞추기 위하여 문자적 의미 안에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유념치 않기 때문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보이는 세상의 사물이나 사건들로 덮개를 씌워주셨기 때문이지요. 이런 연유로 성경이 겉으로는 이 세상의 사물이나 사람의 평범한 생활의 일들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 영적 세계의 일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29 - 34
처음에도 밝혔지만 이 말씀들을 문자적 의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생활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해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 귀한 목숨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과 몸을 위해 입는 것이 성경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성경 전반을 살펴보면 이것들 역시 물질적인 개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 곧 영혼의 양식이어야 하며 입을 것에 대한 것은 주님이 마련해 주신 진리의 예복이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이와 같이 영적 세계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물질적 의미로 바라본다면 우리 또한 저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대하던 사항들과 우리가 기대하는 사항들 그 무엇이 다르던가요? 그토록 주님을 환호하던 그들이 주님에게 진정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병을 고쳐주고 오병이어 등의 기적을 행함으로 그들은 주님을 열렬히 따랐으나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인은 그들의 세상 영광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겠지요.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성경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 몇 가지를 살펴봄으로 성경을 문자적 의미만으로 보려는 시각이 올바르지 못함을 증거 해보려 합니다. 성경에 쓰인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공급받아 그것으로 각자 영혼의 양식을 삼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로 주님의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유월절 만찬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충만해진 상태를 표현하고 제물로 드려진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은 순수한 선으로 드려진 우리의 예배로 인하여 주님께 있는 풍성한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짐승 중 양이 선과 대응하기에 주님은 어린 양으로 불리셨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의 대표적인 재료로는 물과 포도주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연적 진리와 영적인 진리를 각기 나타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갈증을 느끼며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것은 교회가 그 자신들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생명의 양식이 끊긴 것을 주님이 마음 아파하신 것이고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진리와 섞어진 채 드려지는 예배는 주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을 나타내며 묵은 포도주가 유대 교회의 역용된 말씀 속 진리들을 나타낸다면 새 포도주는 주님이 오사 유대에 의해 변질된 구약의 말씀을 새롭게 가르치신 진리들을 말합니다. 피는 생명을 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피를 흘리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거룩한 말씀이 모독을 당하는 것을 나타내며 포도주 역시 피와 같은 의미로 성경에 사용되어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창 49:12) 라는 말씀은 눈 곧 사람의 이해성이 진리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떡에 대해 살펴보면 떡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거나 그분의 본질인 사랑과 이에서 나온 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마다 각자 자기 내면에 선한 원리들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는가와 그 선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고 '다섯 덩이의 떡으로 온 무리가 먹은 것'은 아무리 작은 선일지라도 그것은 겉으로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영적 양식이 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뜻합니다. '열 두 광주리에 남은 떡 조각'은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이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생명을 구할 진리로 남아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은 외적 정결만으로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뜻하고 빵 역시 떡과 같은 의미로 주님이나 선에 대응합니다.
소금은 선과 대응으로 쓰이는데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것'은 선한 삶에 갈급한 것을 나타내고 '짠맛을 잃은 소금'은 선을 잃어버린 마음 상태를 나타내며 소금에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은 소금의 짠 맛 때문으로 이 짠맛은 선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대응이 그러하듯 소금에도 반대의 의미가 있어서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선에서 이탈한 삶을 상징합니다. 성경의 상징적 의미가 이와 같기에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의중은 생활의 걱정거리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위한 주님의 무한하신 돌보심을 다루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인 것이지요.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이 강하게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로서의 주님은 영적인 것만을 구원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도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아니신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위의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인생들이 당하는 삶의 괴로움을 책임지실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천부께서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는 공중의 새조차 기르시는 분이시고 또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 들의 백합화조차 솔로몬 보다 더한 영광으로 옷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우리가 이런 것을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에 불과하며 이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두를 더하여 받게 되기에 어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우리가 염려할까 보냐 라는 식으로 이 모든 말씀들이 읽히는 것은 당연지사겠지요. 그렇다면 결국 이 부분의 말씀에서 주님은 생활의 어려움을 돌보시는 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모셔지게 됩니다. 과연 이 말씀이 그러한 의미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선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데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죄악 속에 있을 경우 우리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야말로 영혼이 그 속에 함께 거하는 악으로 인해 진통하는 것이지요. 이러할 때 우리는 자기 신앙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그 염려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근심만 더해 가는 그런 무기력한 염려는 아닌지요? 다시 말해 오늘을 빛 가운데 살지 못한 채 자나깨나 신앙의 염려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더구나 그 염려란 것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이거나 천국에서 더 좋은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 아니면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되려는 욕심에서 나온 염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천국은 강한 자에 의해 침노 당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을지라도 혹시 이 말씀이 천국을 차지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말씀으로 들리면 곤란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에게 드리워지는 염려는 오늘이라는 시점에 있어서 자기 신앙 상태에 대한 염려를 거쳐 내일이라는 사후 세계의 삶에 대한 염려로까지 이어집니다. 천국은 분명 주님을 믿고 사랑함으로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산 자의 것일지라도 그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선한 삶 때문이 아니라 때를 따라 먹이고 입히시는 주님 자비의 풍성하심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장 질 좋은 것으로 또 그 영혼의 영적 상태에 가장 적합한 최선의 것으로 거저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위 본문에서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천부께서 기르시는 공중의 새로', 또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함에도 자라게 하시는 들의 백합화' 라는 비유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실 천국은 사람이 주를 위해 이것저것을 행하였기에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만일 천국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인간이 탐욕의 시선으로 바라본 천국의 모습일 뿐이지요. 이러한 시각 속에서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선을 행하려 하고 혹 천국을 차지하지 못할 것에 대한 조바심으로 자기 신앙에 대한 염려만 쌓여갑니다. 그러나 천국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의 몫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마음의 진실함에서 선이 우러나옵니다. 그는 주님을 닮아 악한 자와 선한 자에 차등을 두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려 애를 씁니다. 이렇게 선한 형상으로 자라난 영혼은 사후 생전의 삶 그대로의 애정을 가지고 천국에서도 살게 되지요. 이런 자에게는 천국적인 삶이 현 세상에서도 이미 나타나기에 애써 천국을 차지하려는 강한 욕망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그에 대한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한 염려는 오늘의 삶이 천국적이지 못하면서 오직 머리로만 내일 날의 천국을 차지하겠다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어쩌면 생활에 대한 염려보다 신앙에 대한 염려가 더욱 지독한 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악한 자기를 사랑하는 악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날의 천국은 오늘의 선한 삶 가운데 건설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선한 삶이 천국을 보장해주고 있는데 어찌 내일 일을 염려할 것인가요? 오늘을 빛 가운데 살지 못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욕망만 강하다고 천국이 그의 차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은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을 버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심어지는 천국은 도외시한 채 헛된 꿈속에서 바라보는 천국을 그들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주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고 하신 것이지요.
첫댓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