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신면 청룡리
구룡목의 전설에 꽃이 핀다면
옛 화다사 절터 아래 상수원이 들어서고
기억이란 무엇일까? 아득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가물한 저 수평선 혹은 산등성이를 넘어 한 시점과 아우른 세상을 만나는 것은 때로 고통스럽기까지도 한다. 환희와 갈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옛 고향의 기억들을 생채기까지 기꺼이 껴안아 맑은 ‘수채화’로 내보이는 박종규교수의 고향이 바로 의신면 청룡리이다.
그가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특별한 아쉬움이나 집착에 따른 것은 아닌 듯하다. 너무 일찍 고향을 벗어났지만 특별한 기억력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복원해내고 있는 박종규교수는 창작 글에 관한한 거의 경계가 없어 보인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배포에 나선 수필집 ‘바다칸타타’의 힘찬 항해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청룡마을은 의신면 소재지에서 초사리방향으로 넘는 재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본 마을은 현재 상수원으로 되어있는 작은당저수지 위쪽이라는 설이 있다. 그곳엔 화다사(혹은 화타사)란 절도 있었다고 전한다. 상수원 위쪽 동편의 거대한 암반 위 등성이를 넘어 고군면 향동마을로 가는 산 길목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동네 주민들은 “스님들이 마을로 들어가는 것만 보였제 나오는 것은 알지 못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고 알렸다. 산세가 좋고 아흔아홉고개의 전설을 담은 이곳은 풍수상으로 좌 청룡과 우 백호의 지형을 갖추고 바로 그 청룡자리에 마을이 들어섰다고도 한다.
한 때는 이 마을의 세가 충천하고 인구가 많이 살았다 한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자주 곤혹을 당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동네 청년들에게 조롱과 구박을 받자 울분을 참고 “이 마을의 세가 더욱 번성하려면 마을 앞에 도랑을 파야 한다”라는 말을 던지고 사라져버렸다. 동네사람들은 앞바다의 물기운이 들어오면 좋을 듯 싶어 부역으로 냇고랑을 팠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을에 여러 흉사가 겹치면서 결국 폐동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의신면 돈지리에 사는 허옥인(향토사학자)씨는 구룡목은 ‘구토롱’의 와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청룡마을과 의신면 옥대, 중리 사이에 ‘앞등뫼’와 구토롱이 있어 주로 이곳에 초분을 쓴 연유로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현의신면 신정리 앞도 구토롱이 있어 차모씨의 아버지 초분이 작년까지도 남아 있었다. 옥대 중리 청룡으로 가는 재는 낮아져 포장된 길이 트여 있고 솥을 제작했던 자리도 찾기가 힘들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학때 나주사람 이준환이 이곳에 피신해와 살면서 본업이던 부리(鎔鑄) 기능을 발휘하여 아곳애서 일을 시작했다고 전한다. 거푸집을 만들 수 있는 점토와 모래가 있었으며 친척들의 배경으로 텃세를 받지 않았으나 3년 정도 지나 이흥민에게 남기고 떠났다 한다.
현재 청룡마을은 47가호에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 주성을 이룬다. `박광삼씨가 이장이며 노인회장은 박종성(80), 부녀회장에 서오말(43)씨가 맡고 있다. 86세의 김연태씨와 97세에 이른 김읍단(이재수씨의 모친)씨가 장수를 누리고 있다.
이백남씨는 중국출신 이란씨와 결혼해 동열이란 아들을 낳고 부인은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에 사당이 하나 있는데 충렬사로 밀양박씨들의 사당으로 무려 150위에 매년 봄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제를 모신다. 원래의 사당은 출향인사인 박종규교수가 구입, 재보수를 해 한달에 한 번 정도로 찾아와 가꾸며 살고 있다.
마을입구의 넓은 공터 앞에 있는 생활문화관은 본디 마을회관으로 향우인 김재권씨가 건축비를 희사해 지었으나 작년 새롭게 25평의 새 회관이 반듯하니 들어섰다. 여기에 향우인 박장섭(호 운암)씨가 의자 50개와 책상 10개를 마을에 희사했다.
서울에 향우회가 결성되어 김진태씨가 회장을 맡고 총무는 신명균씨가 하고 있다.
“문학계의 게릴라”로 불리는 '박종규 교수'의 또 다른 안식처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들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너무 많다. 아직 보이는 것도 다 알지 못하면서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끝없이 추적하고 있다.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박종규는 그의 소설 ‘파란비’에서 ‘환상자살‘에서 ’크리스마스 환청‘과 ’아스팔트‘ ’그날‘에서도 이 의문에 집요하게 천착했다. 수필작업에서도 이 화두는 떠나지 않아 곳곳에 흔적이 살아있다. 박종규 작가의 글쓰기는 이 물음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다. 그리고 미술을 전공한 그답게 글을 쓰기보다는 그리는 편이다.
4선의 이력을 자랑하던 이남서 전 의원의 고향
그는 과연 풍운아였을까? 기행과 거침없는 독설과 비판이 트레이드로 진도군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던 이남서 전 진도군의회의원이 지난 달 사실상 정치적 사망신고를 받았다. 그에 대한 선호와 공과는 이 지면에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학에 가까운 이력이지만 어떤 분야에 집중력을 갖고 ‘공부하는 의원’으로서 해당 공무원들에겐 ‘호랭이’로 통했던 이가 이남서씨이다. 그러나 그도 후반에 들면서 여러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마침내 선거법 위반혐의가 인정되어 대법에서 ‘기각’ 통고를 받아 불과 일년 정도의 임기를 남긴 채 낙마하고 말았다.
청룡마을의 시거 연대는 1700년대로 보고 있다. 청주한씨가 입촌성씨이다. 현재 제작중인 의신면지에 따르면 고려 때 「오류동」이라는 부락이 있다가 폐촌되고 청용으로 옮겼다고 한다. 꽃이 가득 피어난다는 뜻의 “화다사(花多寺)”라는 절이 있었다고도 한다.(고 이남원씨의 증언)
임도건설로 관광지 연계 필요
이 마을은 의신면 중리와 가까워 사상마을 운림산방과 연계되는 임도건설이 이뤄지면 많은 변화와 지역발전의 기틀이 될 것이란 여론이 높다. 군은 이곳 주민들의 바램에도 묵묵부답인 채 세월만을 허비해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잿밥’이 부족한 탓인지 또 다른 복안이 서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행정은 당연히 주민편의에서 구상과 시행이 이뤄져야 하지만 잇속이나 사소한 핑계거리에 매달려 적극적인 업무를 방기하는 자세는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 의욕을 가진 담당자나 주무부서의 결단을 기다려본다.
재경진도향우회장의 마을사랑
이 마을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마을회관은 78년도에 전남 최초로 2층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당시 향우인 김재권(현 재경 진도향우회장)씨가 사업비를 지원해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예능인으로 이 마을출신에 이덕순(작고)씨가 남사당패 단원으로 해금연주에 탁월한 기량을 가졌다고 전한다.
현대에 와서는 서울 재생의원원장을 하고 있는 김재양(의사)씨와 사업가로 (주)빌리지 회장인 김재건씨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통일부지도관인 김임태(신지식인 선정)씨와 소설가 박종규교수, 이남서 씨 등을 들 수 있다.
설화와 전설이 쌓인 동네
이제 의신면지 발간추진위원회가 수집한 자료를 잠시 들춰보자.
덕신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수원은 진도의 큰 자랑이다. 일체의 오염원이 없는 산 골짜기의 천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곳 상수원은 진도읍에까지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다.
작은당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허옥인씨는 삼별초와 관련해 퇴각하는 삼별초 군사의 ‘잔당’이 숨어 들었던 곳 이란 특이한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는 더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화타사(華陀寺)라는 절의 이름과 유래도 불확실하나 ‘빈대 때문에 스님이 떠났다“라는 박이장의 주장은 사천리의 “정샘이절터”의 쇠락이유와 너무 흡사하고 위치도 멀지 않아 보인다. 허씨나 박씨의 주장은 그 위치상으로 옛 산길이 향동 사천리 청룡 초상마을 등과 이어지는 곳으로 충분히 자리할 만한 곳으로 보인다.
어느날 그 절의 탁발승이 시주를 받으려 타 부락으로 갔다 오는데 오리동부락(옥대리에서 구룡목 잔등을 넘어 청용가는 길목. 만호동이라 부르기도 했다)을 지나다 이 부락 사람들이 어찌나 짓궂어 탁발승 시주물을 모두 빼앗고 행패를 부렸다. 하루는 어느 도사가 또 이 길을 가는데 “저 중놈 잡아라”며 동네 청년들이 몰려들자 그는 “나는 탁발승이 아니라 화타사를 찾아가는 사람”이라며 나를 놓아주면 이 동네가 잘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며 “이 부락이 앞으로 더욱 부자로 잘 살려면 저쪽 산밭을 파서 ‘똘’을 내고 구룡목잔등을 갈라서 한 길을 내면 아주 잘 살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새돌문자리에서 용초리끝까지 개울을 파 길을 내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갑자기 뻘건 피가 솟구쳐나와 사람들이 놀라 일을 중단하고 용의 목을 잘랐다고 크게 걱정하더니 그 밤 뇌성벽력이 치고 폭우가 쏟아져 많은 집들이 유실되면서 마을세가 꺽이고 돌림병까지 돌아 큰 마을이 석파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청룡마을은 앞서 박종규 김재권씨 등의 향우와 전대인물로 해금연주가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덕순(남사당패 출신)옹과 서울재생의원장을 맡고 있는 김재양, (주)빌리지 회장 김재건씨. 통일부지도관(신지식인 선정)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향우들이 활동하나 지면상 생략한다. 물이 맑으면 인심도 맑다던가. 풍요와 상생의 젖줄이 되는 마을로 더욱 발전하길 기대한다.(박남인기자. 사진 허선무)
-자료제공: 의신면사무소. 의신면지발간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