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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
제 7 장
불교의 극락(極樂)과 기독교의 천국(天國)은 어떻게 다른가? (내세론)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권 전도에 있어 불자들에게 전도를 하다보면 천국(天國)이나 극락(極樂)이나, 가는 길만 다르지 똑같은 곳이란 소리를 듣곤 합니다. 한국 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韓國人)은 종교를 믿지 않아도 선하게 살면 극락(極樂)이나 천국(天國)에 갈 수 있다고 69%가 생각한다고 합니다. 또한 18.4%는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종교를 믿지 않으면 극락이나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교리는 전혀 상반됩니다. 그것은 천국과 극락의 교리 자체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불교의 극락(極樂)
불교인들에게 전도하다보면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천국(天國)이 있다면 우리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이 있다.”고 하면서 “지금은 서로 달리 믿고 있지만 결국 갈 곳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은 천국(天國)과 극락(極樂)을 동일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극락(極樂)과 천국(天國)은 같은 것이 아니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두 종교의 중요한 내세관인데도, 극락(極樂)과 천국(天國)을 유사한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교(佛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는 기독교(基督敎)의 천국(天國)세계와 비슷하다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지만, 개념자체가 틀리기에 이 두 개는 서로 다른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의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천국(天國)세계와 같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 윤회(輪廻)세계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極樂)은 최종의 단계가 아닙니다. 극락(極樂)은 최종단계를 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極樂)은 아주 좋은 스승과 아미타불 보살이 있어서 깨우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지, 불교의 최종 구원단계는 아닙니다. 오히려 깨우쳐 성불(成佛)을 하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최종구원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출발은 윤회(輪廻)의 세계로부터 탈출(脫出)하는 것입니다. 이 윤회 사상은 불교가 발생(發生)하기 이전의 인도 고유의 생사관이며, 이 사상에서 보면 인간이 사후에는 생전에 지은 자업자득(自業自得)에 의해서 삼계육도(三界六道) 윤회(輪廻) 전생 한다는 것인데, 선악행보로 천계(극락)에 태어나거나 또는 인간계, 축생계, 아귀, 아수라, 지옥 등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태어난 중생(존재)은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한다고 하며, 예컨대 극락(極樂)에 태어난 천인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극락에서의 인연을 다하면 그 곳에서 죽고 다시 어떤 육도의 생명체로 윤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이전의 생사관인 탄생(生)과 죽음(死)은 하나다’는 윤회(輪廻)사상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와 같은 인도 고유의 내세관을 개혁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설법(說法)을 통해서 윤회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다. 천인계인 극락도 영원한 극락(極樂)이 아니라 또 죽음이 있는 곳이므로 고통의 세계로 보았습니다. 그는 ‘존재(윤회세계)와 고통은 하나다.’라고 하면서 고통(苦痛)에서 해방을 받으려면 존재의 세계인 윤회의 세계, 그 자체로부터 탈출하는 ‘해탈(解脫)사상’을 창시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윤회(輪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理想)입니다.
1982년 4월8일 석가 탄생일에 이성철 종정스님께서는 “극락에 가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있다면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라는 법어를 설파하였습니다. 그의 초파일 법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極樂)과 천당(天堂)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리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디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위 법문(法問)에서 불교(佛敎)는 자각(自覺)의 종교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진리(眞理)는 자기(自己) 속에 구비되어 있고, 자기(自己) 밖에서 진리(眞理)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교(佛敎)의 이상세계는 극락(極樂)이 아니라, 고통의 세계에서의 해탈(解脫)입니다. 그래서 이성철 종정 스님은 1984년 4월8일 초파일 법어에서 “극락(極樂)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잠잘 때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소리와 같습니다. 불교를 노인들이 죽어서 극락이나 가려고 염불을 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부처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부처 앞에 절을 하거나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자신 스스로의 올바른 수행을 통해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찾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윤회 세계의 특등석과 같은 극락(천계)을 바라는 사고방식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처럼 선업(善業)의 인연(因緣)을 쌓기 위해서 현세에서 전력으로 노력해서 극락(極樂)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곳이 영원히 살지 못하고 다시 죽어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극락(極樂)도 곧 고통(苦痛)의 세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왕생(往生)요집에 의하면 극락에서 죽을 때의 고통은 지옥에서 보다 16배나 크다고 합니다. 원래 극락이 기독교의 천국과 같이 영원한 극락의 세계가 있었다면, 아마 불교는 창시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불교(佛敎)가 목표하는 것은 윤회의 세계에 연결되어진 속박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목적입니다.
지금까지는 원시불교의 극락세계를 언급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내세관인 극락세계(極樂世界)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오늘 한국 불교의 승려들은 소승불교(小乘佛敎)의 교리 중심으로 윤회세계인 고통의 존재에서 해탈(解脫)하여 두 번 다시 탄생도 죽음도 없는 무생(無生)무사(無死)인 성불(成佛)을 이루는 승려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자(佛子)들은 죽어서 극락(極樂)에 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 극락(極樂)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극락이 있다고 말합니다. 서방정토 극락(極樂)이란 한국 사람들은 죽을 때에 저승 간다고 하듯이, 인도 사람이 죽으면 선업(善業)보로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탄생하기를 소망하고 바랍니다. 서방정토의 극락은 인도에서 서쪽으로 10억 8,000만리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면 인도에서 서쪽 지구에 있다는 극락을 찾아 10억 8,000만리 즉 720,000,000Km를 가면 지구의 둘레를 18,000번 돌아서 다시 인도로 돌아오게 된다고 가정 할 때, 참으로 황당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0억 8000만리 국토를 지나 서방에 실재하는 하나의 세계가 극락이라고 하는데, 인도 서쪽으로 18,000번 돌아도 지구에는 서방정토의 국토는 없습니다. 서방정토(西方淨土)라든가 극락이라든가 해탈과 같은 난해한 용어들은 인도 사람들의 정서와 인도의 역사(歷史)를 정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인도문화는 BC 2,000년경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아리안 민족이 인도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리안들의 이주 과정에서 동쪽으로 가자는 쪽과 서쪽으로 가자는 쪽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서쪽으로 가자는 사람의 입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서방으로 계속하여 이동해 간 사람들은 독일계 아리안 족이었고 서방(西方)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간 족속이 인도(印度)의 아리안 족속이 되어 그들은 인도 드라비다 족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으며, 아리안 족의 사람들은 브라만 계급과 크샤트리아 계급을 차지하였고, 드라비다 족은 바이샤(평민)와 수드라(노예계급)가 되어서 영원한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땅을 침략한 아리안 족들 중에는 인도의 무덥고 지저분한 환경에 익숙해지지 않고 계속 되는 무더위와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서방(西方)으로 따라가지 않고 인도 땅에 정착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끊임없이 서방정토(西方淨土)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결국 서방정토는 극락세계로 그들의 종교의 내세관의 한 부분이 되었고, 계속 되는 무더위 고통에서의 해방이 해탈(解脫)이란 교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인도의 전통(傳統) 종교를 개혁하면서 석가모니는 윤회(輪廻)하는 한 인간을 <존재>와 <고통>하나로 보면서 일체고(존재)에서의 해탈은 “존재(윤회) 하는 불을 끊는 것”이라고 하여 일체고에서 해방 될 수 있는 열반(涅槃)사상을 만듭니다. 열반이란 윤회와 분리된 상태로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열반의 상태가 <무(無)>, <공(空)>이므로 너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 일부 후세 사람들은 열반에 들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열반에 대한 제2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변화해 열반이 <정토>나 <불국토>라는 말과 결부되어 그곳에는 환희와 행복과 영생이 있다고까지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불교의 본래 사상(思想)이라기보다는 후세에 와서 불교(佛敎)가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세계에 대해 경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원시불교의 천계인 극락과 대승불교의 이타정토와 연화장 세계의 극락의 세계가 달리 묘사되고 있습니다.
3.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정토신앙의 미타정토(극락)
미타정토는 정토부 경전인 <무량수경>, <아미타경>에서 주로 주장하고 있는 이상세계로서 극락(極樂) 극락정토(極樂淨土)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 등으로도 불립니다. 정토부 경전에서는 서방극락세계에 대해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거기에서 쓰는 모든 가구는 갖가지 보물로 되어 있으며, 온갖 향내를 내뿜고, 도처에 연꽃이 있어 좋은 향을 발하며. 새들이 아름답게 지저귀는 고통이 없고, 무한한 기쁨을 누리는 곳이라고 묘사합니다. 불교(佛敎)의 종파 가운데 정토종은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에 전념함으로써 이 미타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정토신앙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초기(주전 1세기경)에 인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소승불교(小乘佛敎)인 자력(自力)으로, 즉 인간의 이성(理性)의 힘으로는 자신(自身)을 구원(부처)할 수 없으며, 오직 절대 타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력에 의해서만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정토신앙의 유신론적인 요소 때문에 불교 발생 이전 인도에 옛날부터 있었던 낙토사상이 혼합된 것이라는 주장이 불교(佛敎)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제기되기도 합니다. 원시불교 경전에서는 극락(極樂)을 윤회의 세계 가운데 하나인 천계(天界)를 말하고 있는 반면에,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들에서는 미타정토 연화장 세계로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란 윤회하는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열반을 뜻하는 <불이 꺼진 상태>, <연소의 괴멸>을 뜻하는 범어 “니르바나”는 팔리어 “닙바나”를 음역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니르바나(열반)는 마치 바람이 타고 있는 불길을 끄듯이 지혜가 번뇌의 불길을 꺼서 일체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진리를 깨달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윤회전생의 세계와 같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의미가 전이하여 불교계에서는 승려가 죽었을 때 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열반”에 관한 석가모니의 교설은 그 자신이 말한 “무상(無常)”의 교설과 모순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일관성 있게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비해 , 불교에서는 경전에 따라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시불교 경전에서는 윤회의 세계 가운데 하나인 천계(天界)를 극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의 천국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4. 기독교(基督敎)의 천국(天國)
교회(敎會)에서는 보통 천국이라는 말보다도 천당(天堂)이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하는데 성경(聖經)에는 천당이란 말이 없고 천국(天國:하늘나라)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은 우리가 갈 영적인 나라이고, 천당은 우리가 가서 살 집이라고 억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당이란 말은 다른 종교에서 쓰던 말을 우리가 그대로 사용하는 말인데, 기독교 이상세계는 천국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일관성 있게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天國)이란 하나님의 나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천국은 극락과 같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마태20:23)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마태10:32. 눅2:16)하며, 최후심판 때 영광의 부활로 선택받은 자(히12:23)에게 주는 보상(마태25:34)인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의지가 개재될 수 없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소망인 천국은 어떤 곳인가? 성경은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천국(天國)은 어떤 곳인가?
교회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천국 백성들이 예배로 모임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소망인 천국은 어떤 곳인가?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31;4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천국은 저주가 없는 곳이며(계22;3), 마귀 사탄의 유혹도 없는 곳(계20;10), 목마름과 상함의 고통이 없는 곳(계7;16)입니다.
요한은 성령에 이끌리어 크고 높은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는데 그 도성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며 그 성의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백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21:11) 하며 천국을 표현하였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존재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계22:1)이 흐르고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열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있는 곳으로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추방되었던 에덴동산(창3:22)인데,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사람은 이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1) 천국(天國)은 영혼(靈魂)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입니다.
천국(天國)은 구원받은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요, 주의 재림 후 몸이 부활 변화되어 영생하는 곳입니다. 고전15:50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을 가지고는 그 곳에 가서 살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땅의 장막인 육신이 무너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고, 영혼이 낡은 집을 떠나 하늘 집으로 이사하는 것입니다. 광명한 천국으로 가기 위한 터널과 같은 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통쾌하게 여기며 환영해야 될 일입니다.
2) 천국(天國)은 성도가 면류관(冕旒冠) 쓰고 사는 곳입니다.
딤후4:8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셨습니다. 땅을 갈고 심고 김매고 비료 주고 땀 흘려 수고한 농작물을 가을에 추수 할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처럼 주를 위해 수고한 성도가 면류관 받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3) 천국(天國)은 풍족한 곳입니다.
계22:1~2에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니 여유만만하고 흐뭇한 곳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 천국(天國)은 밤이 없는 곳 입니다.
계22:5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땅 위에 밤은 쉬기도 하고, 명상에 잠기기에 좋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이 밤을 악용하여 왔습니다. 통계를 내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주정, 폭행, 강도, 살인, 음행 등의 범죄사건이 거의 밤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天國)에는 밤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죄(罪)가 없는 행복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5) 천국(天國)은 영이 재난과 노쇠로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계21:4에 보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死亡)이 없고 애통(哀痛)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류 최대의 불행은 사망(死亡)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사망 앞에 떨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사망이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 시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병과 재난과 노쇠와 죽음이 전 인류에게 왔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죄와 질병을 짊어지심으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망(死亡)의 원인인 죄(罪)를 제거해 주셨으며, 친히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復活)하셨을 뿐 아니라, 믿는 자에게도 영생(永生)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 천국엔 병과 재난과 노쇠와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6. 어떤 사람이 천국(天國)에 들어가는가?
마19:25~26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는데 여기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행16:30-31에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구주는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져가면서 강도는 회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
하늘나라는 죄인(罪人)이 회개하고 용서받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서양의 어느 왕이 임종이 가까워지니 치료하는 의사들이 왕을 위로하기를 “폐하께서 선정을 베푸셨으니 천국에 영광자리가 마련되었을 줄 믿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왕이 대답하기를 “내가 천국(天國)에 갈 수 있는 것은 왕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이요, 이 죄인(罪人)을 주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하고,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소천 하였다고 합니다. 천국(天國)은 육(肉)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공기가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사후 천국은 확실히 있는 것입니다.
7. 나오는 말
불교(佛敎)의 궁극적인 목적이 극락(極樂)이라면 극락은 천국(天國)처럼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기독교(基督敎)인들이 천국 이야기하면 우리도 극락(極樂) 간다고 받아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극락이라는 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서방정토(西方淨土)라는 말은 어디서 기원하였는지를 불자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BC 2,000년경 인도를 침입한 아리안 족속들 중에는 인도의 무덥고 지저분한 환경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 서방(유럽)으로 따라가지 않고 인도 땅에 온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끊임없이 서방정토(西方淨土)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그곳이 극락정토세계입니다. 아직도 서방정토가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불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佛敎)인들은 죽어서 극락(極樂)에 가는 것이 아니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한국의 불자들이 매우 존경하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1982년 4월 8일 초파일 범어에서 “극락(極樂)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잠잘 때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소리와 같습니다.”고 말씀했습니다. 불교는 극락에 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노인들이 죽어서 극락이나 가려고 염불을 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부처 앞에 절을 하거나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한 적은 없습니다.” (성철스님 말씀) 이것이 진정한 불교입니다. 또한 그는 죽으면서 열반(涅槃)송에서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阿比)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성철스님의 열반(涅槃)송은 과연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철 스님에게 그가 장차 들어갈 지옥을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천국은 죽은 후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요 주 재림 후 몸이 부활 변화되어 영생하는 곳입니다. 계 22:1-5절의 천국계시에서 새 예루살렘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 “저가 수정 같이 맑음 생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그러므로 “수정 같은 맑은 물이 길 가운데를 흐르더라.”가 뜻하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곳,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의 만족이 주어지는 곳, 바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인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생명 강은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이 생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먹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는 천국은 “다시 저주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행위계약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 것이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저주받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지옥 형별의 저주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다시 저주가 없다”는 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천계(극락)도 인연이 다하면 죽음이 있는 고통의 세계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극락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공(空)사상, 무(無)사상 해탈(解脫)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천국은 슬픔이 없는 곳이고, 애통하는 것도 없으며, 곡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의 천계(극락) 죽음이 있다는 것이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국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서재생목사 입니다. 본 주제 강의는 본인의 저서인 “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으로서 캐나다 토론토 동부 개혁신학교에서 한 주간 비교종학 특강한 9 강좌를 차례로 기고하고자 합니다.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011-334-2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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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서재생 목사님!!!! 할렐루야^^지난번에 이카페를 통해서 목사님 간증 은혜롭게 들었습니다 귀한 간증들려주시고 귀한자료 올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간증하신거 찾아보았더니 영상간증모음에 1213번에 있더군요 다른분들도 보시고 은혜많이 받으세요^^
댓글로 참여 감사드립니다.
@ll요게벳ll 댓글로 참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샬롬^^^
댓글로 참여 감사드립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