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3월호 원고)
대화, 우리가 가야할 길
시대의 정신적 패러다임의 변천이 신앙과 신학 세계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진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라면 우리 시대의 정신적 가치들을 이끌고 있는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사회와 종교의 절대적 가치들이 상대화되면서 인간을 지배해온 삶의 이데올로기들이 다원화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21세기는 ‘다원주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세계관과 가치관들이 병립하면서 고유한 의미를 얻어가는 시대. 그래서 우리 시대는 서로가 가진 고유한 가치들을 존중해주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숨겨진 진리를 찾기 위해 대화하고 협력하며 서로 일치하고자 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대화(dialogue)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소통의 부재를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애환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간다. 과거에는 절대적 권위라는 것이 존재했다. 즉 신적인 권위가 사회 구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행사하는 권위, 교사가 학생에게 갖는 권위, 그리고 성직자가 신도들에게 보여주는 권위들의 절대성이 합리적 이성보다는 신적 권위에 의거해서 인정되었었다. 하지만 오늘날 다원주의 시대에 돌입하면서 부모의 경제적 부양능력이 상대화되고, 교사들의 지적 소유권이 보편화되었으며, 성직자들이 누리던 신적 권위는 신자들의 개별적 영적 욕구가 커지면서 위축되었다.
오늘날의 소통(communication)은 어떤 개인이 체험한 특정 가치가 절대적으로 주장되는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다양한 체험들이 서로 나누어지고, 공감되며, 서로에게 받아들여질 때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 인간이 지닌 이성적 판단이나 체험의 영역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삶을 이끌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 진리를 수용하는 인간의 방식들이 다양하고, 획일화될 수 없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이러한 점은 흔히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유사하다고 비유할 수 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의 특정부위를 코끼리 전체와 동일시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적이고 보편적이지만, 인간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소통의 문화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진리 인식의 한계를 여러모로 우리가 느끼고 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때로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 순간마다 우리는 내 생각이 남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어떻게 서로의 생각의 지평을 맞출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대화’이다. 하지만 대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우리 대화하자.’라는 식으로 시작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화의 가장 철학적 기본을 언급한 철학자는 유대인 인격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 Buber, 1878-1965)였다. 그는 인간이 지닌 가장 근원적인 소통의 구조를 ‘나와 너’의 만남에서 보았다. 그는 ‘나’에 대한 인식과 체험은 언제나 나와 마주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내가 소중하고, 나의 체험과 확신이 소중하듯, 나와는 다른 환경과 교육 속에서 성장한 ‘너’의 체험과 인식 역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깨달음은 나와 너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존중과 열린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이러한 인격적 대화 방식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 확신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목적 중심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다고 비판한다. 즉, 상대방의 인식기준과 판단의 중요성보다는 나의 관심을 상대에게 설득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도구화하거나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부버는 이러한 소통 방식을 ‘나와 그것’과의 관계라고 일컬었다.
문제는 이러한 ‘나와 너’의 인격적 존중을 근거로 한 대화의 방식을 지켜가기에 너무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가 기능 중심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하나의 목표가 설정되면 가장 최단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고자 하는 가치패턴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현실 정치나 사회 구조를 생각하면 더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적 패러다임의 요청과 현실적 사회 구조의 모순 속에서 신앙에 대한 대화도 피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물론, 같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도 다른 교회관과 신학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대화는 언제나 논쟁과 편견, 오해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해서 같은 신앙 고백을 한다고 해서 신앙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 신앙의 언어는 어차피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하고,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라는 지평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서구 신학의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적 대화 방식’과 한국인의 고유한 공동체적 의식이 만들어 놓은 ‘집단적 대화 방식’ 사이의 괴리감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서구에서 뿌리를 내린 가톨릭 신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개인의 참된 체험이 공동체적 체험의 표본이 되는 형태로 이해된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가 제자들에게 전달되고, 제자들은 그 체험을 자신들의 후계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도적 계승이야말로 가톨릭교회의 대화 방식의 근간이 된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신적 권위의 전달 방식이 삶과 결코 떨어지지 않은 사도들의 가르침의 권위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가르침이 삶과 동떨어지면서 성직자들이나 일부 신앙인들의 개인적 체험이 일방적으로 신자들에게 수용되는 시대는 끝나버린 셈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의 가치보다는 공동체적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정서상 올바른 자기 인식과 판단이 결여된 대중적인 오해와 편견이 신앙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문지방 위에 선 신앙인들이 겪는 사목자와 신앙인들이 겪는 애로사항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신앙의 가치들을 올바르게 인식하게 해주는 기준이 혼란스럽다는 데 있다. 교도권의 가르침이 과거처럼 절대적 가치 기준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성직자들의 권위는 삶과 철저하게 떨어져 있어 보이며, 신앙인들의 삶의 기준 역시 세상의 가치 기준과 별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더욱이 교회가 목표 중심의 사목을 전개하다보니 상호 인격적인 대화보다는 좀 더 효율적인 대화 방식에 익숙해지고, 기능중심의 사목이 더 효과를 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방식의 사목형태에는 언제나 소외되는 계층이 존재하고, 교회로부터 상처받고 떠나는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는 한계를 안는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가 가야할 길인가? 참된 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통의 구조를 만들기 위한 공감대(共感帶)를 형성하는 노력이 될 것이다. 모든 대화에는 대화를 시작하고자 하는 나의 관심과 가치가 분명해야 하지만, 그 가치가 정말로 보편적이고 삶의 의미를 충족시켜주는 의미 있는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대화하고자 하는 상대방이 체험한 삶의 가치들과 세계관과 마주할 때 무엇을 그에게 공감시켜 줄 수 있는 지를 찾아야 한다. 공감 없는 대화는 이미 ‘독백’이나 ‘강요’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관심은 내가 가진 것을 상대와 나눌 수 있는 창구를 찾는 작업이며, 서로가 지닌 인식의 한계로 찾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해주는 창이기도 하다. 공감을 찾은 ‘나와 너’의 대화는 새로운 인식지평을 향한 영적 목마름을 낳고, 그 목마름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이미 대화의 여정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목자가 이런 대화의 여정에서 해야 할 일은 신자들과 공감을 찾아가는 다양한 창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사목자 스스로가 지닌 인식과 체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교육을 통해서든,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든, 어떤 실천적인 체험을 통해서든 관계 속에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첫댓글 '대화,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신부님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리며 저도 적극 공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