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년 여름 7월, 정안국이 거란의 급침으로 멸망하면서 마침내 대진국에는 대진국의 후국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진국 유민들의 혼과 정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진국 유민들은 정안국이 멸망한 뒤에도 대진국 복국을 끈질기게 추진하엿으나 모두 다 실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진국 부흥운동 중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부여부를 중심으로 발해 유민 연파가
연나라를 세우고 저항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거란의 동경요양부이자 옜 요양 지역.
이 곳에도 대진국 유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진국이 멸망한뒤 강제천사된 유민들의 후손으로,거란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다.
풍연휴,한소훈 등이 이 지역을 강하게 다스리고 또 왕가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대진국 유민들이 많이 억울하게 죽엇다.
왕가는 거란에 흉년에 들어 거란 사정이 어려워지자 식량 사정이 다소 나은 요양 지역의 대진국 유민들을 이용해 배로 식량을 나르게 했고,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되는 등 많은 대진국 유민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풍연휴(빙연휴)와 한소훈 등이 다스리던 요양지역은 관세법이 없엇으나 빙연휴와 요나라의 좌명공신(개국공신) 한휘연의 손자 한소훈이 술,누룩 등을 팔면서 강압적인 관세정책을 실시,대진국 유민들의 반발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대진국 유민들은 대연림을 중심으로 서서히 뭉치기 시작햇다.
마침내 1029년 동경호부수발해군상온으로 있던 대연림은 동경호부사 한소훈과 왕가 등을 제거하고,뒤를 이어 사군호부사 소도목을 제거햇다.
마지막으로 소효선과 거란 성종의 딸 남양황녀를 억류해 옥에 가둔 뒤, 흥요국을 건국하며 그 역사에 전면적으로 이름을 드러낸다.
그리고 고길덕을 사신으로 고려에 보내 정식으로 흥요국의 개국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며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흥요국의 개국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대연림은 무장 황편에게 구원요청을 하나 황편은 신임동경유수 왕도평과 같이 거란 성종 야율융서에게 비밀리에 서찰을 보내 고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대진국 유민 출신의 장군 하행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하행미는 야율포고에게 대연림이 난을 일으켰다고 고변, 이 과정에서 8백 명의 대진국 출신 군사가 목숨을 잃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연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사신을 보내 남북여진 등을 규합해 세력을 키운 뒤, 거란 장군 장걸이 지키고 있던 심주를 공략하려 한다.
장걸은 대규모 거란군이 온다는 소식에 투항할 뜻을 철회하고 다시 대진국 부흥군을 공격하기 위해 거란군에 합류한다.
1029년 거란군이 동경요양부에 크게 모여들엇다.
남경유수 소효목,거란 국구 소필적,해육부 대왕 소포노가 거느린 거란군은 동경요양부를 공격 흥요국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흥요국에서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려에 구원 요청을 하나 고려에서는 곽원,왕가도 등의 구원요청에도 불구하도 출병을 하지 않는다.
한편 대연림 휘하의 장군 양상세는 모래 인질로 억류되어 있던 소효선과 남양황녀를 탈출시킨 뒤,거란군에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거란군이 공격시 지원을 하겠다 한다.
해가 바뀐 1030년 4월부터 5개월여 저항을 하던 흥요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이 때 양상세는 거란군의 공격이 가속화되자 몰래 성문을 열어 거란군을 끌어들인 뒤, 성의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흥요국 멸망뒤 수산(대연림의 동생이자 태사 대연정이 흩어진 발해 장수들과 발해군
들을 모아 거란에 마지막으로 저항함.)과 후산 등에서 다시 대진국 유민들의 저항이 있엇으나 모두 다 실패하고, 대염림은 고길덕 등 여러 참모들과 같이 상경임황부에서 처형되고 만다.
흥요국은 이렇게 멸망했다.
흥요국의 멸망 뒤, 대진국 부흥 운동은 한 동안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여러 차레 부흥운동은 줄기차게 이어졌고 마침내 1115년 고영창의 대원국과 고욕의 대발해국(고욕국)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