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선 공의 묘지명 원문 번역문
(남양홍씨 중랑장파 17세 순성공후손종친회)
숙인 전주최씨 조선 통훈대부(종3품) 행(行) 강음현감 홍공 합장
글 : 홍이곤
남양홍씨는 우리나라에서 (명문거족)큰 성씨이다. 공의 5대조 길민 공께서는 태조를 도우셔 개국에 참여한 공신이다. 남양부원군(정1품)으로 봉해지셨고 통훈대부(종3품) 공은 그 후손이시다.
공의 휘(이름)는 윤선이시며 자(관명)는 윤지이시다.
고조 여방 공은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셨으며 관직으로 판서(장관)까지 하셨다. 증조 원용 공께서도 뒤를 이어 최고위직 숭정대부까지 오르시고 강령군(종1품)으로 봉해지셨다. 조부 순성 공은 판관 직을 하셨고 부친 귀손 공께서는 석성현감(부여 적성)을 지내셨는데 석성에서 감찰 신영석 공의 따님께 장가드셨고 공은 성화 기해년(1479년) 태어나셨으며 책을 많이 읽으셨으며 과거에 누차 도전하였으나 실패함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스스로 왼편에는 도표를 오른쪽에는 읽을 책들을 준비하시고 가야금을 치고 독서를 업으로 하며 지내셨다.
공신의 후예로 가범(가정 범례)을 지키는데 한 치 실수 없이 지내시고 계시던 중 이조에서 알아내고 신사년(1521년) 예빈시의 별좌로 뽑으셨다. 그 뒤 유능한 관리로 이름나니 의금부경력으로 옮기시고 그 뒤 병술년(1526년) 예에 따라 주부 직으로 승진하셨다. 정해년(1527년) 부모봉양을 위해서는 외직(지방관)이 좋을듯해서 청원 강음현감(황해도 금천군)으로 나가셨다. 이때 세금 관리를 간소하게 너그럽게 집행하시고 백성을 위무하는데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셨으니 조정과 고을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 뒤 오랫동안 괴롭혔던 풍병이 도져서 걱정 끝에 물러나 집에서 쉬셨다. 임진년(1532년) 봄 부친상을 당하시고 허름한 옷을 걸치시고 식사를 거르시면서 밤늦도록 곡하셨으니 인성이 훼손되고 기력을 잃으시고 마침내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이시다. 그 이듬해 양근 수여리 선영 근처에 장례 치르고 묻히셨다.
부인은 전주최씨로 명문씨족 감찰 지성 공의 따님이시다. 지성 공은 예문관 직제학 최덕지 공의 증손자이시며 예조판서 광성군 김겸광 공의 사위이시다. 부인께서는 시부모를 정성으로 섬기셨으며 노비들을 다스림을 너그러움으로 대하셨으나 가사를 돌봄에 오랫동안 가난으로 찌들었으나 잘 경영하셨다. 신축년(1541년) 슬픈 일로 병이 생기셔 섣달 13일 돌아가시니 62세셨다. 이듬해 임인년(1542년) 10월 갑진일, 양근 서종면 마암리 해좌 사향(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언덕에 장례 치뤄 묻히셨다. 이에 앞서 아들, 이곤 공이 1월 공의 묘소를 돌보다 물이 스며들어 장차 이장해야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공의 묘소도 이장 함께 묻히셨다.
공은 2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 이건공은 벼슬 없이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현령 최수지 공의 따님과 결혼 아들 한분 봉상 공을 두셨다. 차남, 이곤 공도 벼슬 없이 사또 김석린 공의 따님과 결혼, 따님 두 분을 두셨는데 어리다. 통훈대부공의 첫째 따님은 안산군수 이풍 공의 아들 곽시 공과 결혼, 슬하는 없고 둘째 따님은 특별명령으로 마전군수로 부임한 박세무 공의 아들 진사 응립 공과 결혼하여 따님 한분을 두셨다.
공은 성품이 너그러우셨으며 멀리 떨어져 있으나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해 자주 찾으시며 효도스러웠다. 관공서의 천거를 삼가셨으며 어린이를 훌륭히 훈육하셨고 어른들은 예를 다해 음식을 대접하셨다. 이를 위해 아낌없이 베푸셨으나 오래지 못하였으니 이곤은 공의 아름다운 처신이 잘못 기록되거나 인멸될까 두려워 돌에 새겨, 후인들이 알 수 있도록 묘지석을 묻어 두노라
황명 가정 22년(1543년) 계묘년 12월
번역 이승진
묘지명은 서울시립대 박물관 수장고에 도자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홍윤선 묘지명 원문
첫댓글 홍윤선 공의 묘지명에서 특이할 사항은 시조하 12세 조선개국공신 문경(文景)공 홍길민(1353~1407) 할아버님의 군호가 생전에 받은 남양군으로만 알아 전해왔으나 남양부원군(정1품)임이 1543년 홍윤선 공의 묘지명의 기록에서 밝혀졌습니다. 이 봉군 제도는 고려에서 조선까지 몇번 바뀌었으나 문경(文景)공께서 1407년 돌아가신 이후 1466년(세조 12) 1월의 관제개혁 때 부원군의 칭호를 다만 군(君)으로 칭하도록 하였으나, 정1품 친공신은 1469년(예종 1) 6월에 부원군 칭호를 복구하였고, 1470년(성종 1) 4월에 친공신은 모두 부원군에 봉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경국대전에는 친공신과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정1품 군으로 봉하며, 특별히 ‘부원’ 두 자를 첨부하여 ‘부원군’으로 호칭하도록 법제화되었다.그러나 후세들이 제대로 찾아드리지 못한 군호인듯 하니 정정이 필요하다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