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넓이 |
폭 |
높이 |
비신 |
54.6 |
20.4 |
121.5 |
비좌 |
94.6 |
61.5 |
35.5 |
*상석
|
넓이 |
폭 |
높이 |
상석 |
153 |
93.5 |
36 |
장대석상석박침 |
62 |
37 |
27 |
*혼유석
넓이 |
폭 |
높이 |
31.2 |
35.5 |
9 |
*문인석
|
넓이 |
폭 |
높이 |
전고 |
50.8 |
42.5 |
142 |
홀 |
8 |
11.5 |
41 |
얼굴 |
29.5 |
32 |
22.5 |
관 |
26.5 |
28.5 |
27.1 |
그림 47) 묘표 전면
그림 48) 묘표 측면
그림 49) 문인석(좌)
그림 50) 문인석(우)
13. 윤이건 묘(사진 56~60)
윤이건(尹以健, 1640~1694)의 자는 체원(軆元), 호는 일소재(一笑齋)로 윤유의 아들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1673년(현종 14) 과거에 합격하고 동궁세마(東宮洗馬)가 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영중추부사가 된 송시열이 천거하여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가 되었다. 이후 공조좌랑, 진산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이후 유배가 풀려 귀경하던 중 청주에서 서거하였다. 부인은 창녕 성씨(昌寧成氏, 1638~1716)이다.
묘소는 윤식 묘 아래에 위치하며 윤이건의 묘가 상단에 창녕성씨의 묘가 하단에 위치한 상하합장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석물은 창녕성씨 봉분 앞에 마련되었다. 묘소 조성 당시의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장대석 위에 설치한 장방형의 상석 앞에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석은 운족(雲足)을 표현한 4각 탁자형식으로 17세기 말~18세기 초 양식이다. 윤이건 묘표는 60cm의 단비로 “일소재 윤공휘이건지묘(一笑齋尹公諱以健之墓)”라 새겼을 뿐이고 윤이건 봉분 앞에 세웠다. 근래에 새로 만든 비석을 창녕성씨 봉분 옆에 세웠다.
*상석
넓이 |
폭 |
높이 |
157.5 |
93.5 |
34.3 |
*혼유석
넓이 |
폭 |
높이 |
89 |
38.5 |
16.6 |
*향로석
넓이 |
폭 |
높이 |
35.5 |
26.5 |
27.5(매몰) |
*윤이건 묘표
넓이 |
폭 |
높이 |
30 |
10 |
60 |
그림 54) 향로석 전면
그림 55) 윤이건 묘표
13. 기타 묘소 묘표(사진 61~62)
그림 58) 윤행검 묘소
그림 59) 윤응현 묘소
* 오류도와 전호산
그림 60) 묘역에서 본 오류도(영사정이 있었던 곳)
조사결론 및 남원윤씨 영사정 묘역에 대한 의견서
남원윤씨 판관공파 영사정 묘역은 16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조성된 묘역으로서 남원윤씨의 대표적인 분산(墳山)으로 알려져 있다. 19인의 묘소가 묘역을 이루고 있는데 군자감 판관을 지낸 윤은(尹訔)의 후손들로서 증손인 윤자신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셔 호성공신이 되고, 고손 윤섬이 명나라에 가서 조선왕실의 종계(宗系)를 바로 잡은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되어 윤은 계열의 남원윤씨가 중앙정계에서 비중 있는 가문이 되었다.
그 이후 윤섬의 손자로서 병자호란 당시 남양부사로서 근왕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려 준비하던 중 청병에게 사로잡혀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죽은 윤계와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의 한 분인 윤집으로 인해 남원윤씨는 충의지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그 명성을 드높여 조선후기 명문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던 듯 묘소의 치장은 지나치게 검소하다할 정도로 간략하였던 것 같다. 약 100여 년간 묘소의 석물을 갖추지 못하였던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조대 윤염과 정조대 윤행임 부자가 고위관직에 진출하여 석물을 구비한 경우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영사정의 남원윤씨 묘역은 16세기 윤은의 묘소가 조성될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각 세대별로 조성한 묘표,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여러 형식의 묘표는 각 시대의 형식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대표적인 서예가인 김노(金魯), 한호(韓濩), 송시열(宋時烈), 윤덕준(尹德駿), 윤봉오(尹鳳五), 황운조(黃運祚) 등의 글씨가 있어 영사정 묘비의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묘표는 일반적으로 전액 없이 전면부에 해서나 예서로 비제(碑題)를 표기하는데 비하여 남원윤씨 세장지에 위치한 윤우신 묘표와 윤형갑 묘표는 윤행임에 의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어 정조시대 비석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인석은 윤은, 윤시영, 윤시걸, 윤유 등의 묘에 배설되어 있다. 묘소에 비해 숫자가 적으나 16세기 복두공복 양식의 문인석과 복두공복에서 금관조복으로 변화하는 16세기 중반 과도기의 문인석, 17세기 금관조복 양식의 문인석을 골고루 확인할 수 있다.
망주석은 윤은, 윤시영, 윤징, 윤식, 윤자신, 윤섬, 윤형갑, 윤계 등의 묘소에 있다. 대부분 16~17세기 인물들의 묘소에 배치되어 있는데 특별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이곳의 묘역은 좁은 면적에 비교적 많은 묘소를 썼기 때문에 석물을 세우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윤씨 묘역은 근래의 묘역 정비과정에서 묘표와 망주석, 석인, 계체석 등을 추가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만들어 배설하였던 석물은 현상변경이 거의 없는 상태로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각 묘소 조성 당시에 건립된 묘표와 석물의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따라서 김포시의 향토유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묘역이라고 사료된다.
2009년 10월 일
경기도문화재전문위원 정 해 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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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해득 교수님께서 책자를 만들어 김포시에 제출한 자료입니다. 원본 파일의 사진은 올라가지 않아 별도로 찍어 놓은 것으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