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도마복음
[1] 하늘나라와 겨자씨 (1)
인간 관계는 많이 변했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만 변했다.
모든 차원에서
깊은 인간관계는 이미 사라졌다.
그대의 아내는 이제 아내가 아니라
단순한 여자 친구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 또한 남편이 아니라
단순한 남자 친구일 뿐이다.
우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만남은 아니다.
결혼은
깊은 만남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
그것은 깊은 강물로 뛰어드는 일이다.
자신을
그 깊은 곳으로 내던지지 않는다면
언제나 얕은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깊은 곳으로
자신을 던지지 않는다면
결코 도약할 수 없다.
표면에 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깊은 곳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물론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할 수밖에 없다.
표면에 있으면
그대는 매우 현실적이 된다.
표면에 있으면
자동인형처럼 움직일 수 있고,
전혀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깊은 곳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깨어 있어야만 한다.
매순간마다 죽음이
그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 깊은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는 표면적인 것이 되었다.
유치한 것이 되어 버렸다.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는
재미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저마다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지는 못한다.
여자 친구와는
성적으로 결합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랑이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사랑은
깊은 뿌리를 필요로 한다.
섹스는
표면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동물적이고
생리적인 행위일 뿐이다.
더 깊은 사랑의 한 부분일 때
섹스는 아름다울 수 있다.
깊은 사랑의 일부가 아니면
섹스는 가장 추한 행위이다.
그곳에는
영적인 교감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끼리
접촉했다가 떨어질 뿐이다.
만난 것은
육체이지 존재가 아니다.
너와 나의 만남이 아니라
몸의 만남일 뿐이다.
모든 인간 관계가 그런 식이 되어 왔다.
위대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영적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결코 예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여자 친구로,
남편은 남자 친구로 대체될 수 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했던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것은
정신과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정반대자의 관계로 대체되고 말았다.
정신과 의사와의 사이에는
병적일 수밖에 없는,
병리학적인 관계가 있다.
환자는
진리를 구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건강을 찾아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건강helath'이란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전체성wholeness'을 의미한다.
'신성holiness'을 의미하고,
존재의 깊은 치유를 의미한다.
환자는 건강을 위해
의사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건강을 위해서 간다면
그는 환자가 아니라 제자일 것이다.
환자는 병을 제거하기 위해 갈 뿐이다.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는 다시금 정상인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사에게 갈 뿐이다.
다시금 정상적인 사회인의
일원으로 일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적응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재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면 정신과 의사는 그가
다시 정상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누구에게 적응하기 위해서인가?
이토록
완전히 병들어 있는 이 세계,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세상이 말하는 정상적인 인간이란, 다름 아닌 정상적인 병, 정상적인 광기, 정상적인 정신이상을 지닌 인간일 뿐이다.》
정상적인 인간 역시 미쳐 있다.
단지 사회와 문화가
허용하는 영역 안에서 미쳐 있을 뿐
미쳐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
그 영역을 벗어나 경계선을 넘어 버린다.
그러면 그는
곧바로 병든 사람이 되고 만다.
그때 병들어 있는 바로 그 사회가
그 사람을 병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는
그 경계선 위에 서서
그 사람이 되돌아올 수 있도록,
군중 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영적 스승이 될 수 없다.
그 자신이 전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환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
환자는 배우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혼란 속에 있고,
그러한 혼란의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노력은 교정을 위한 것일 뿐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서양에서 그들은
영적 스승으로 행세하고 있다.
머지않아 동양에서도 그들은
영적 스승처럼 가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일 수가 없다.
그들 스스로가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바로 잡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병든 자가 또 다른 병든 자에게
전체성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정신병자가 다른 정신병자에게
그 정신병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없는 것처럼.
프로이트나 칼 융,
아들러파의 정신분석가들도
완전히 병들어 있다.
평범한 정신과 의사뿐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탁월하다는 정신분석가들조차
병리적으로는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겠다.
프로이트는 누군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심하게 몸을 떨었다.
기절을 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적도 2번이나 있었다.
첫 번째는 어떤 사람이
이집트의 미라에 대해 말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자리에서 넘어진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만일 프로이트에게 죽음이
그토록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왜 죽음이
그토록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가?
깨달은 자 붓다가
죽음을 두려워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만일 두려워한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일 수가 없다.
칼 융은 바티칸 궁전과
특히 그곳의 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로마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바티칸 도서관은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종교의
극비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기차표만 사러 갔다 하면
그는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단지 로마에 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떨리겠는가!
그래서 결국 그는
기차표를 사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마침내는
"도저히 난 갈 수 없어." 하고 마음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로마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왜 정신분석학자인 그가
종교의 도시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인가?
로마는 종교의 상징이고
모든 종교를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 융이라는 사람은
그의 마음에 하나의
철학의 막을 쳐 놓고 있었다.
그는 그 철학이 무너져
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것은
낙타가 히말라야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히말라야에 가까이 가면
낙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등 높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기 때문이다.
칼 융이 창조한 철학의 전부가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그토록 광대하고
우주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지만
그 모든 체계는 이제 폐허가 되어 버렸다.
칼 융이
로마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곧 과거부터 만들어져 온
위대한 사상 체계의 폐허로
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대의
작은 사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가 닦고 치장해 온
이 작은 구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의 철학은?
한때 위대했던 사상들마저
이제는 무너져 먼지로 변해 버렸다.
로마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라.
아테네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소크라테스 학파들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장 위대했던 사상 체계도
결국에는 먼지로 화할 뿐이고,
그 어떤 생각도 마지막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생각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만
그대는 신을 알게 된다.
생각을 통해서는 영원을 알 수 없다.
생각은 시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영원의 것이 될 수 없다.
어떤 철학도,
어떤 사고 체계도
영원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이
칼 융의 두려움이었다.
칼 융은 최소한 4~5번은
여행을 취소하고 또 취소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에 가기를
그토록 두려워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겠는가?
그대라해도 그만큼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칼 융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대는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 융은 로마에 가면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모든 위대한 사상 체계의
폐허를 눈앞에 보는 순간,
전율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붙잡으리라는 것을.
"나의 사상 체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몸을 떨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결국
그 계획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나는 로마에 가지 않기로 했다."
같은 일이
프로이트에게도 여러 번 일어났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우연으로
여기기는 힘든 일이다.
프로이트 역시 로마에 가려고 했었고,
또한 마찬가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왜인가?
프로이트라해도
그대와 똑같이 화를 낸다.
프로이트라 해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성욕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프로이트라 해도
그대와 똑같이
신경 질환 증세가 있다.
그렇다면 차이가 무엇인가?
그는 그대보다 더 지성적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천재일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조금은 도울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의 것에 관한 한,
존재 내부의 가장 심오한 곳,
가장 깊은 곳에 관한 한 그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장님에 불과하다.
그렇다.
정신분석은 종교가 될 수 없다.
좋은 병원이
될 수는 있어도
사원은 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병자와
부적응자들이 존재하는 한
정신과 의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영적 스승이 아니며,
환자 또한 제자가 아니다.
환자로서 스승에게 온다면
그대는 반드시 스승을 놓칠 것이다.
스승은
정신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말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정신 불안,
신경증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나는 말한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불안을
치료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 자신을 치료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병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대 자신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병은 표면에 있는 것일 뿐,
그대의 존재가
있는 곳에는 병이란 없다."
일단 그대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만 하면
모든 병은 사라진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있었기 때문에
병이 그곳에 존재했다.
자신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의
근본적인 만남을 회피해 왔다.
왜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치 않는가?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대는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스승은 어떤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승이 하는 일은 단지
그대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1부. 끝.>
[1] 하늘나라와 겨자씨 (2)
왜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치 않는가?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과거의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많은 것이
달라져야만 하고, 강요된다.
아이는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아이는 사회나 부모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많으며,
따라서 그 부분은
거부되고 억압당한다.
몇 가지 부분만
받아들여지고 칭찬받을 뿐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 속에 있는
그 부분들을 정리해야 한다.
자기 존재의
많은 조각들을 거부해야만 하고,
그 조각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자주 그것들을
부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억압의 의미다.
사회 전체가
이 억압 위에서 군림한다.
아이는 존재의
더 큰 부분을 억압당하고,
철저하게 어둠 속에 던져진다.
그러나 그 억압된 부분들은
언젠가는
자기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반발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밝은 곳으로 뛰쳐나오기를 원하며,
그대는 또다시
그것들을 억눌러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 억압된 부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다시금 얼굴을 내밀 것이고,
언제나 그곳에 존재해 있을 것이다.
그 무의식 층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대가 자신과 대면할 때
그 무의식 층이
그곳에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부정해 온
모든 것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이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전부 받아들이지 않고는,
그 두려움은
항상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이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이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억압은
많든 적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이 문제와 마주쳐야만 한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의 구별을
완전히 잊는 그날,
무엇이 받아들여지고
무엇이 거부되는가에 대해
잊는 그날,
그대는 제자가 된다.
그대 자신에게
존재 전체를 드러내 놓을
준비가 되는 바로 그날,
그대는 비로소
한 사람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스승은
한 사람의 산파에 불과하다.
스승은
그대가 거듭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그렇다면 스승과 제자 사이,
그곳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제자는
스승을 신뢰해야 한다.
의심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곳에 의심이 있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게 된다.
그대가 누군가를 의심할 때,
그때 상대방은 타인이 되고
그대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자신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가 없다.
그 낯선 자가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사람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 없다.
자신을 방어해야 하고
둘레에 무장된 벽을 쌓아야만 한다.
스승과 함께라면 그 무장을
완전히 벗어던져야 한다.
그 무장 해제는 완전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조금은 무장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까지 열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승 앞에서의
그 열어 놓음은 완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그대 존재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닫아 놓는다면
그곳에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완전한 신뢰가 필요하다.
오직 그때만 비밀이 공개될 수 있다.
오직 그때만 비밀의 열쇠가
그대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을 감춘다면,
그것은 곧 그대가
스승과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때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싸움은
스승과 함께 하기 위한
열쇠가 아니다.
완전한 받아들임이 열쇠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에는
완전한 받아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되도록 조장되어 왔다.
지난 3, 4세기 동안
인간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되도록 배워 왔다.
받아들임이 아니라 투쟁을,
순종이 아니라 저항을,
신뢰가 아니라 의심을 배워 왔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과학은
의심을 통해 발전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깊은 의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학은
신뢰를 통해서는 일할 수 없다.
과학은 논리와 논쟁과
끝없는 의심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더 많이 의심할수록
그대는 더 과학적으로 된다.
그길은
종교의 길과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종교는 신뢰를 통해 일한다.》
더 많이 신뢰할수록
그대는 더 종교적이 된다.
과학은 많은 기적을 낳았고,
그 기적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종교는 더 큰 기적들을 낳지만
그것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한 사람의 붓다가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대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는 단지
하나의 육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 역시 나이를 먹을 것이고,
어느 날엔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면을 넘어서면
그는 죽지 않는 존재이며,
그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그대에게는
깊은 심층부에 있는 것,
그 미지의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하는 눈만으로도
서서히 느낄 수 있고,
예민해질 수 있다.
《신뢰한다는 것은 두 눈을 감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맹목적인 것처럼
신뢰 또한
맹목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사랑보다
신뢰가 더 맹목적이다.
두 눈을 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두 눈,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두 눈을 감을 때,
그때 눈을 통해 나가던
에너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 에너지는 역행하기 시작한다.
눈으로부터
바깥의 대상을 향해
흐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에너지는 안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완전히 방향이 바뀐다.
에너지는
움직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한쪽 출구를 막으면
곧바로 다른 출구를 찾아낸다.
두 눈을 닫으면
그 두 눈을 통해 움직여 나오던
에너지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하나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에너지는
그대 안에 있는
제3의 눈을 건드린다.
이 제3의 눈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외부의 대상을 향해,
눈을 통해
빠져나가던 에너지가,
존재의 근원을 향해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바로 제3의 눈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제3의 시각이 된다.
오직
그 눈을 통해서만
붓다를 볼 수 있다.
오직 그 눈으로만
예수를 볼 수 있다.
그 제3의 눈을 갖고 있지 않으면
비록 예수가 눈앞에 온다 할지라도
그를 볼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보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예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도, 단 한 사람도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신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내면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나는 신의 아들이며,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라고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이 자는
정신병자이거나 아니면 바보이다.
그것도 아니면 매우 영리한 인간이다.
도대체 어떻게 목수의 아들이
하루아침에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길은 있다.
육신으로부터는
오직 육신만 태어날 뿐이다.
내면의 자아는
육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탄생하며
신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만 한다.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 미묘한 일이다.
그대는
특별한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 것과도 같다.
갑자기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면
그대는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느낄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해 동안 감상해야만 하고,
비로소 그때 귀가
그 미묘한 음을 붙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클래식 음악에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는
날마다 일상적으로 듣는 음악,
이를테면
영화음악 같은 것은 전혀 음악이 아니고
단순히 소음이거나 바보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귀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소음들과 함께 살면서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매우 섬세한 귀가 필요하다.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이 될수록 그 미묘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도
예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는
우주적인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 한 조각의
사념도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그대 존재 속에
단 하나의 움직임도 없을 때까지
침묵해야만 한다.
오직 그때만
예수를 들을 수 있고,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
오직 그때만
예수를 알 수 있다.
예수는 수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눈이 있는 자는 보라!
내가 여기에 있다!"
왜 그는 이 말을
다시 또다시 했을까?
"눈이 있는 자들은 보라!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은 들으라!"
왜?
그는 오직
제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이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적은
몇몇 사람만 예수를 이해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으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그 극소수의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들은
학식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학교수들이 아니었다.
대학자나 철학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부이고 농부이며
구두 만드는 직공이고 창녀였다.
더없이 평범한 사람들,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바로 이 특별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사라져 버린
특별한 무엇인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겸허함이고 신뢰이다.》
지적인 훈련을
더 많이 받을수록
신뢰의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지적인 훈련을
덜 받을수록
더 큰 신뢰가 가능하다.
농부는 신뢰한다.
그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는 들녘에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싹이 틀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 씨앗들은
반드시 싹이 틀 것이다.
그는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그리하여 알맞은 계절이 오면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다.
그는 신뢰속에 기다린다.
그는 나무와 풀과 강,
그리고 산과 더불어 산다.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무들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다.
나무로부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언덕들에게는 속임수가 없다.
언덕들은
정치인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어떤 방어 수단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열어 놓을 수 있다.
산이나 언덕에 올라갈 때면
기쁨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기쁨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언덕으로부터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방어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다.
한 그루 나무에게로 다가갈 때
그대는 문득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 나무로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다.
그 느낌은 내부로부터 온다.
나무와 더불어 있으면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고,
마음을 열고 한가로이 노닐 수 있다.
꽃은 갑자기
그대를 습격하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으며
그대로부터
어떤 것도 훔쳐 가지 않는다.
따라서 산에 갈때나
바다에 갈 때나 숲으로 갈 때나
나무와 함께 있을 때는,
그대는 경계심을 버리고
방어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신뢰가 있다.
공업화나 기계화,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더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있다.
뉴욕에서
예수가 탄생하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광신자들은 나올 수 있어도,
예수가 그곳에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광신자들은
정신병자에 지나지 않으며,
예수는 단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예수가
뉴욕에서 태어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가
그곳에서 태어난다 해도
누구 한 사람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눈앞에 있다 해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예수는
기술 발전이 없는 사회,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에게는
믿음과 신뢰라는 것이 있었다.
<2부. 끝.>
ㅡ 도마복음 오쇼 강의/류시화 옮김 ㅡ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