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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빛깔이 시리도록 깊은 3월 5일, 은빛순례단은 전 대통령 묘역 네 군데를 참배하고 나서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으로 갔다. 묘역에 들어선 은빛순례단에게 해설을 맡은 이일영 선생은 삼일혁명 서른네 번째 겨레대표라고 일컬어지는 스코필드 박사 얘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석호필이라는 우리 이름을 가지고 있을 만큼 우리 겨레 못지않게 우리나라 사람을 아꼈던 스코필드 박사. 삼일혁명 때 삼일독립선언 서른세 분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부속병원 사무원으로 있던 이갑성 선생 부탁을 받아 삼일혁명에 나선 사람들 사진을 수없이 남겼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는 1889년 3월 15일 영국에서 네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어렵게 자란다. 19세 때, 캐나다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다가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됐다. 그러나 무릎 꿇지 않고 꾸준히 공부해 수의학과를 나온다. 1916년 한국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 세균학 교수이자 선교사로 살아간다.
스코필드는 1919년 초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움에 따라 이승만, 안창호 같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소식을 삼일혁명 주역이 되는 이갑성에게 알리고 한국에서도 맞불을 놔야하지 않겠냐고 귀띔한다.
혁명을 앞둔 이갑성은 스코필드에게 삼일혁명 현장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스코필드는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 사람들이 일제 군화 발에 밟히는 것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어서 일어난 수원 제암리 민간인 학살 현장에 달려가 잔혹하게 스러져간 사람들과 불타버린 집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아낙과 아이들이 넋 놓고 있는 모습을 담고, 낱낱이 적바림한다. 이것을 영자신문에 실어 만천하에 드러낸다. 1919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극동 선교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일을 낱낱이 들춰내는 연설을 한다. 이어 하라 수상을 만나 차별을 없애고 한국인 억누르기를 멈추라고 말한다. 살해 위협까지 받던 스코필드는 급기야 1920년 4월 쫓겨나듯이 한국을 떠나고 만다. 광복을 맞은 1958년 한국에 다시 돌아온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 살아간다.
이부영 선생은 라일락꽃이 피는 봄에 젊은이 등에 업혀 문리대 앞 개천가를 거닐던 스코필드 박사를 떠올린다. 채현국 선생은 스코필드 박사는 당신에게 고맙다고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 형제들이여. 고맙다고 말로만 때우지 말고 현금으로 아는 척을 해서 세상을 보듬으라”고 했다고 말씀한다. 앞으로 나설 생각 없이 말만 앞세우는 이들을 꼬집는 말씀이다.
그렇게 들어선 순국선열 묘역. 이일영 선생은 빈 묫자리를 보면서 최재형 선생을 모실 곳인데 시신을 찾지 못해 빈 채로 있다고 말씀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울려 퍼진 총성 일곱 발. 이토 히로부미와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 의사 손에서 포연을 내뿜은 권총이 바로 최재형 의사가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할 수 있는 여러 정보는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이 알려줬다. 당시 안중근 신분은 <대동공보> 특파기자였다. 이밖에도 우덕순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어울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 일제는 집요하게 ‘배후’를 캐려들었다. 안중근은 한사코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총독은 김두성”이라고 버틴다. 안중근은 ‘김두성’을 앞세워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을 지켜낸다. 안중근이 순국한 뒤 최재형은 안중근 식구들을 보살피는 한편 <대동공보>에 400루블을 따로 보내, 안중근 순국 특별판을 만들도록 했다.
일제 압력에 무릎을 꿇은 러시아는 항일 독립운동지사들을 거칠게 탄압한다. <대동공보>도 폐간되는 가운데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가와 한인을 아우르는 단체를 권업회를 조직한다. 이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당할 때 회원이 무려 팔천오백칠십구 명에 이르렀다. 최재형은 환갑 나이에 항일 빨치산 전선으로 나갈 만큼 앞장섰다.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이 빨치산 토벌에 나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한촌에 불 지르고, 한인 삼백여명을 죽인다. 최재형은 식구들을 보듬으려고 우수리스크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를 다섯째 딸 올가는 이렇게 돌아본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들은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아버지 뒷모습이 보였다.” 그날 밤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 엄인섭과 함께 학살당한다.
그밖에도 이강, 강우규, 대한제국 마지막 러시아 공사 이범진, 서일 장군, 의병장 우동선, 신돌석 그리고 부친상으로 집으로 급히 돌아갔다가 기다리고 있는 일경에게 붙잡혀 돌아간 의병장 이인영, 주기철 목사와 삼일혁명에 나섰다가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 들어갔던 남자현 의사 묘소에 참배했다. 조선 여인 남자현은 누구인가?
일제 만주 침공 이태 뒤인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 45분. 하얼빈 도의정양가 거리에서 바람을 가르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급박하게 달려가는 발소리 뒤를 일본경찰들이 떼 지어 쫓는다. 골목을 돌아서자 반대편에서 경찰 대여섯 명이 나타나 총을 쐈다.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이 쓰러졌다. 품에는 비수를 품고, 옷 속에는 피 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 의병이던 남편이 전사할 때 입던 군복이다. “거지할멈, 당신이 예순한 살 남자현 맞지?” 두 달 뒤 만주국 수립 일주년 행사 때 만주국 실세 부토 노부유시 일당을 없애는 쓰려던 권총과 폭탄이 든 과일상자를 받으러 갔다가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만 것이다. 바로 여섯 해 전 “총독은 내가 처단하겠다!”면서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건너온 남자현이다.
이어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 묘소도 참배했다. 1908년 3월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한국 사람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기자 회견을 한다. 이에 울분을 터뜨린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가 저마다 스티븐스를 사살하려고 한다. 전명운 권총이 불발되자 때마침 같은 곳에서 스티븐스를 노리던 장인환 권총이 불을 뿜는다. 총알 두 발을 몸에 맞는 스티븐스가 쓰러진다. 한국사람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아일랜드 변호사가 무료 변론에 나선다. 전명운은 무죄, 장인환은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삼일혁명이 일어난 뒤에 감형되어 가출옥한 뒤 1924년에 석방되었다고 설명하는 이일영 선생 말씀을 채현국 선생이 막아선다. “변호를 하려면 (전명운, 장인환이 하는 말을) 통역을 해야 하잖아. 그걸 이승만한테 부탁했는데 ‘난 못해!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어.’ (스티븐스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해요. 이게 이승만이야.”라고.
박정희와 이승만 묘소에 참배한 까닭은 ‘이 사람들이 저지른 짓을 드러내고 비판해서 이 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하는 뜻’이라고 밝힌 채현국 선생다운 말씀이다.
이어 충렬대 뒤편에 있는 무후선열제단에 참배했다. 무후선열제단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으나 주검을 찾지 못하고 후손도 없는 순국선열 백서른한 분을 위패로나마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 고종황제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갔던 이위종, 이상설 열사,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홍범도 장군과 정의부 총사령 오동진 장군, 정인보, 엄항섭, 조소앙 같은 납북독립유공자 열다섯 분도 위패로 모셔져있다.
이곳에서 이일영 선생은 중국 광저우에서 독립을 외치다가 스러진 조선젊은이들을 기리며 책을 쓰고 있는 분이 있다고 말씀한다. “제목이 <낮 하늘의 별>이에요. 낮 하늘에 별이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낮 하늘에는 별이 없습니까? 있어요. 그렇지만 보이지 않잖아요.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지 수많은 별들이 있다는 말씀이에요. 이곳에 서보면 그 느낌이 다릅니다. 광저우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조선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어요. 부교장이 조선 사람이고 교관들도 여럿이 조선 사람이었어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훈련시켜준다니까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갔어요. 일본과 전투가 있을 때마다 황포군관학교 앞장섰어요. 그래서 희생이 많았어요. 광저우에 가면 150명이 한꺼번에 묻힌 묘가 있는데 묘비에 ‘조선젊은이들’라고 쓰여 있어요.”
이어서 간 임시정부요인 묘역. 노백린 장군은 비행기를 몰고 가 “일본 천황궁을 깨부수겠다”고 다지며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으나, 안창호 선생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삐라를 뿌리겠다”면서 조종술을 배웠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독립운동에 나선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지닌 기백과 품이 다르다.
임정묘역을 돌아보던 채현국 선생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을 슬그머니 그만두고 떠난 까닭을 말씀한다. “이승만이 상해에서 왜 도망갔는지 아무도 몰라. 기록이 없어요. 내가 들은 얘기를 할게요.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 차장 김성일 선생한테서 들은 얘기에요. 1953년 12월쯤일 거야. (김성일 선생이) ‘증거는 없네. 나는 나이가 많고 자네는 적으니까, 아무한테도 말한 적은 없네. 이제 내가 나이가 먹어서(털어놓는데)’ 이승만이 아주 무서울 때 아닙니까? 휴전이 되고 이승만이가 사람을 아무나 빨갱이로 몰아 마구 잡아넣을 때인데 입을 열면 안 돼요. 상해 임시정부에서 온 사람 가운데 공직에 임용된 이가 몇 되지 않았어. 공보처 차장 김성일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야. (상해 임정에서 김성일한테 이승만이) 난데없이 아무도 없는데,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도산 같은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대. 놀라서 가만히 있는데 ‘절대로 안 돼!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기는 배우려고 도산 선생한테도 가고, 이승만이한테도 가는데 틈만 있으면 그 얘길 하더래. ‘도산은 절대 안 돼!’ 문제는 이 사람이 도산이 하던 평양에 있는 대성학교 선생이란 말이야. 도산이 절대 신임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야. 그런데 한 번 얘기하고, 두 번 하고… 사람들만 없으면 도산은 안 된다고. ‘죽인다’는 소리는 절대로 안 하는데 ‘죽이라’는 소리인 게 틀림없더래.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대. 한 달 남짓?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자기가 (도산을) 죽이지 않으니까 ‘도망갔다고 나는 안다, 증거는 없다, 들어만 놔라.’ (그랬는데)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됐으니까 얘기하고 죽어야지. 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봅니다. 아무도 몰라. 왜 갑자기 이승만이가 대통령 때려치우고 (도망갔는지.)”
안익태, 주시경, 조만식 선생 묘소 참배. 누군가 이일영 선생에게 묻는다. 조만식 선생은 이북에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여기 묘를 쓸 수 있었느냐고.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조만식 선생은 1950년 10월 18일 평양에서 인민군 소좌가 죽이는데 어떻게 여기에 위패가 아니고 시신이 묻혀 있느냐? 의문이었어요. 그런데 궁금증이 풀렸어요. 조만식 선생이 부인을 잃고 재혼해서 두 아이를 두어요. 나중에 조만식 선생이 부인에게 ‘사람들에게 조만식 처라고 알리지 말고 인천에 있는 시누이에게 가서 죽은 듯이 살아라.’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잘라주면서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걸 넣고 장사를 지내라.’ 했대요.”
조만식 선생에게 남으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미군이 장기려 박사와 조만식 선생에게 트럭을 보낸다. 장기려 박사는 아들을 데리고 트럭에 오른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인민을 두고 내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나는 여기에 있겠다.”면서 트럭을 돌려세운다. 그 뒤에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당신은 그곳에 뼈를 묻겠다고 마음 먹고 아내와 아이들만 남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이 많은 어른들이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바라면서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내던지셨구나 싶었다.
세 시간을 훌쩍 넘긴 은빛순례단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는 여섯 시 가까이까지 이어졌다. 돌아서면서 이부영 선생이 채현국 선생을 모신 까닭을 밝힌다. “선생님에게 은빛순례단 걸음걸이가 바른지 판단을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랬더니 ‘판단이 어디 있어? 내가 가야지.’ 하고 오셨어요.” 사실 채현국 선생님은 다리를 비롯해 온몸이 안팎으로 편한 곳이 없는 분이다. 네 시간 가까운 현충원 참배에 피곤하시련만 내색도 하지 않는 채현국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을 뵈면서 자유에 담긴 뜻을 되새긴다. “스스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묘역에 누워 계신 어른들과 스스로 거닐며 순례 길에 오른 어른 모두가 드잡이한다. “너는 어쩔 건데?”
은빛순례단이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를 하는 날 북으로 간 특사단은 봄보다 먼저 남북에 꽃소식을 알렸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있을 북미정상회담 소식으로 온 세계가 들떠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렇게 평화로 가는 걸음이 착착 이어지는데 굳이 우리들까지 나서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아니다! 한반도라고 부르든 조선반도라고 부르든 아니면 고려반도라고 부르든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 땅이 평화로운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짚어보라. 토끼인 우리는 늘 쫓기며 떨어왔다.
“백두에 사는 아이도 한라에 사는 아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배달겨레 밑절미를 놓치지 말고 어깨동무하고 강강술래하며 서로 살리는 ‘우리’를 참답게 빚을 때만이 평화가 피어오를 것이다. 이 땅에 그런 날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려는 마음으로 나선 은빛순례단은 걷고 또 걸으면서 “2030년 우리 아이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지?” 묻고 또 묻고 듣고 또 들으려고 한다.
첫댓글 와아, 정말 자세히 쓰셨네요. 그렇잖아도 자료가 될만한 중요한 내용들도 있다는 생각에 녹음을 안 한 걸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