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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백모차
출전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용기저, 1943년). 잇꽃(국화과의 이년초. 꽃은 한방의 약재, 꽃부리는 붉은 물감의 원료, 씨는 기름을 짜는 데 씀. 홍화(紅花))를 반대기(가루로 반죽한 것이나 삶은 푸성귀 따위를 얄팍하고 둥글넓적하게 만든 조각)처럼 만든다. 불에 잠깐 구워 차를 만들어 마신다. 생강과 사탕과 물을 넣으면 더욱 좋다. 차는 장흥땅에서 많이 나는 것이다. 맛도 좋고 소식(먹은 음식이 잘 삭음)도 잘된다. 모양이 중국에서 나오는 보이차(차 이름)와 비슷하다. 보림차(寶林茶)는 보림차잎을 반대기로 만들어 불에 잠깐 구워 뜨거운 물에 부어 마시는 차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기록되어 있다. 보림차는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서 다산정약용,초의선사가 만든 떡차(餠茶)로서 보림백모차(寶林白茅茶)라 부르기도 한다. 떡차는 떡처럼 틀에 박아내서 만든 덩어리차(固形茶)를 말한다. 1872년 이유원(李裕元)이 고경선사(古鏡禪師)와 함께 보림차를 마시고 난 뒤에 '우리나라 최고의 차이다’라고 칭한 다음 보림차의 법제와 품질에 대하여 "강진 보림사 대밭의 차는 정약용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인 구증구포를 가르쳐 줬다.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림차의 법제 방법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9세기 후반에 가장 유명한 차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서 《음청사(陰晴史)》에 따르면 고종 19년 김윤식(金允植)이 중국 천진에 가서 유총관과 만나서 필답을 나눌 때에 가지고 간 차가 보림차이다. <돈차와의 차이점>
<초의차와의 차이점> 초의는 여러 가지의 차를 만들었다. 보림백모차는 초의선사가 만들었던 여러 가지 차중 하나이다. 초의선사가 만들었던 여러 가지의 차와 다른점 하나는 장소가 다른 점이다.
조선후기 최고의 다인이라 불리는 초의선사는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였는데, 그 때 예물로 준비한 것이 보림백모차입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有治面) 가지산(迦智山)인근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종파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시기 860경 창건자 보조선사 체징 소재지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경내에는 국보 제44호인 3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東浮屠),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 ·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彰聖塔) 및 창성탑비 등이 있으며, 창성탑비에는 茶藥이 등장한다.
현재에는 몇몇의 전남 장흥군 다인들로부터 복원차원의 보림백모차를 가정 소비용으로 소량씩 생산하고 있다.
현재에는 시중에 판매 되지 않고 있으며, 아주 소량식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음.
다산과 초의시절에는 보림백모차가 유행하엿으나 제다법이 복잡하고 음다법 또한 복잡한 시대적 요구로 인하여 일제 강점기와 더불어 산차인 녹차에게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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