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있는 길] 파주 고려 윤관 장군묘(여충사/쌍불(용암사/혜음원지(혜음사 옛 절터
1. 가는 날 : 2016년 6월 25일(토)
2. 가는 곳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고려 윤관 장군묘(여충사)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문산행 703번 버스 이용하여 윤관 장군 묘 도착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쌍불(용암사) - 윤관 장군 묘에서 서울행 703번 버스 이용하여 용암사 도착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혜음사 옛 절터) - 용암사에서 서울행 703번 버스 이용하여 용미4리 청룡석재 앞 도착
3. 모이는 곳/시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출구 09 : 30
4. 준비물 : 개인 물, 중식
5. 복장 : 트레킹 가능한 복장, 자외선 대비
6. 식사 : 참가가능자 답사 후 함께 합니다. 비용 1/n
7. 기타 : 1) 이야기 길 30/ 옛절터 길 47 읽고 오시면 참고가 됩니다.
2) 모두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는 답사입니다.
3) 진행속도는 후미를 기준으로 합니다.
4) 별도 회비는 없습니다.
5) 우리 이야기길의 목표는 健康과 즐거움이고 공부는 덤이니 편한 마음으로 오십시요.
6) 답사지 간 이동은 버스로 합니다.(車道가 불편합니다)
<날씨가 어느새 많이 덥습니다. 건강관리는 잘 하고 계시지요?
이 달에는 옛 의주대로 따라 (버스 타고 가는 길 + 걷는 길) 답사를 떠납니다.
이 길은 사실 고리짝(高麗적) 길로 松都에서 南京(현재의 서울)으로 이어졌던 길입니다.
따라서 서울 가까이 있는 고려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윤관 장군이 그렇고, 쌍불현이 그렇고, 혜음원터가 그렇습니다.
길에도 생명이 있는 것 같다. 한 때는 작은 산길이었다가 대로(大路) 중에 대로가 된 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대와 함께 저물어간 길도 있다.
고려(高麗)시대나 조선(朝鮮)시대에 서울과 개성을 오가려면 어느 길로 다녔을까? 서울에서 개성과 평양을 거쳐 중국 땅으로 가려면 어느 길을 택해서 갔을까? 지금 같으면 아마도 한강을 끼고 뻗어나간 강변북로와 자유로가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일산신도시가 생기기 전에는 통일로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남북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평양에서 서울로 오는 북쪽 사람들이 지날 통일로는 갑자기 넓혀지고 환하게 불도 밝혀야 했다. 그 때만해도 남북의 국력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발돋움하여 무언가 보여 주어야 했던 우리네 현실이 지금 생각하면 웃음 짓게 한다.
조선과 고려 때에는 서울과 개성을 잇는 가장 큰 길이 이른바 의주대로(義州大路: 關西大路)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현재의 서울에 대한 내력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고려 15대 임금 숙종(肅宗) 때 서울에 궁궐을 짓게 되는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술사(術士) 김위제(金謂磾)라는 사람이 풍수설 도선밀기(道詵密記)를 근거로 서울 땅에 가히 성을 세울 만하다(楊洲有木覓壤可立城)는 주장을 하게 된다. 실사를 거쳐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니 5년의 공사 끝에 궁궐은 낙성되었다.
이 때 숙종은 이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선포하고 유수관(留守官)을 두게 된다. 이로서 중경(中京:송도), 남경(南京: 木覓壤, 서울), 서경(西京: 평양)이 완결되었는데 4개월씩 3경(京)을 순행하면 36개국이 조공하게 된다는 비기(秘記)의 기록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그 뒤 인종, 의종, 충렬왕, 공민왕, 공양왕 등이 순행(巡幸)하였다. 임금의 순행(巡幸)길, 그리고 왕래가 빈번해진 중경과 남경 사이 길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이한성 동국대 교수님의 이야기길에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 묘에 도착합니다.
윤관 장군께서 정벌하신 두만강 넘어 여진 땅, 선춘령에 세우신 정계비에 관한 시입니다.
윤관 장군 묘 부근에서는 청송 심씨 묘비가 깨어져 있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영조 때부터 400여 년 간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사이에 조상 무덤으로 인한 분쟁이 끝없이 이어진 결과입니다.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은 조선 중기 문신입니다. 아들 심익현(沈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할아버지 심종침(沈宗枕)의 묘역과 상하로 위치하여 있습니다. 봉분은 단분(單墳)으로 전(前)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후(後)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를 좌우에 안장한 합장묘입니다. 그의 묘소 앞에는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한 윤관 장군의 묘가 있는데, 이들 묘역은 조선시대부터 400여년 동안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두 집안 간의 계속된 산송(山訟)으로 유명합니다.
703번 버스로 용암사로 이동하여 마애석불을 찾습니다.
용암사입니다.
파주 용미리 마애석불
석불 앞에서 멋진 북한산(삼각산, 836.5m)도 봅니다.
오늘 옛길 답사 중 가장 하이라이트입니다. 용암사에서 서울행 703번 버스 이용하여 용미4리 청룡석재 앞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우측 길이 고려시대부터 남경(현재 서울)을 다닌 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1번 국도에 해당하는 관서대로길, 고려 때에는 송도와 남경을 잇던 임금의 길이 이제는 관심 있는 이 아니면 이름도 생소한 혜음령길로 남았다. 이 길에는 가벼이 할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 전해진다.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의 기록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가 그것이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봉성현(峯城縣 지금의 파주(坡州)) 남쪽 20리쯤에 작은 절이 하나 있었다. 허물어진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석사동(石寺洞)이라 부른다. 동남쪽 여러 고을에서 개경(開京)으로 올라오는 사람과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 이 길로 다니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어깨가 스치고 말은 발굽이 닿아, 분주하여 인적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서, 범과 이리가 떼지어 살면서 편안하고 이로운 곳으로 여기고는 숨어서 엿보고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쳤다.
이뿐 아니라, 간혹 도둑의 무리가 그곳이 숲이 우거져 숨기 쉽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빼앗기 쉽기 때문에, 여기 와서 간악한 짓을 하였다. 양쪽의 행인이 주저하며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여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한 뒤라야 지나갔다. 그런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이가 한 해에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왕 예종(睿宗) 15년인 기해년 8월에, 사명을 받들어 남쪽 지방에 갔던 근신(近臣) 소천(少千)이 돌아왔다. 임금(上)이 묻기를, ‘이번 길 어떠했느냐?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느냐?’ 하자, 곧 이 일을 아뢰었다. 임금께서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케 할 수 있겠느냐?’
(峯城縣南二十許里有一小寺. 㢮廢已久而鄕人猶稱其地爲石寺洞. 自東南百郡趣京都與 夫自上流而下者無不取道於此. 故人磨肩馬接跡.憧憧然未甞絶.而山丘幽遠 草木蒙翳 虎狼類聚. 自以爲安室利處. 潛伏而傍睨. 時出而爲害.非止此而已. 閒或有寇賊敓攘之徒. 便其地荒而易隱. 人畏而易劫. 爰來爰處. 以濟其姧. 二邊行者. 躊躇莫之敢前. 相戒以盛徒侶. 挾兵刃而後過焉. 而猶或不免以死焉者. 歲數百人. 先王睿王在宥十五年己亥秋八月. 近臣少千奉使南地迴. 上問若此行也. 有所聞民之疾苦乎. 則以是聞之. 上惻然哀之曰:如之何可以除害而安人?)
지금은 버스로 쉽게 넘을 수 있는 혜음령길은 900년 전에는 김부식의 글처럼 많은 이들이 지나는 길임에도 숲이 우거져 짐승과 도둑이 창궐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의 폐해를 줄이고 편안케 할 수 있겠느냐는 임금의 걱정에 근신(近臣) 소천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옛 절이 자리했던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그 곁에 마땅히 일이 없는 백성을 정착해 살게 한다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묘향산에 가서 승려들을 모으니 그 수가 100 명에 달했다. 예종 15년(1120년)~ 예종 17년(1122년) 두 해만에 백성 동원 없이 승려들의 울력으로 절이 세워졌다. 게다가 임금의 순수(巡狩)에 대비해 아름다운 집도 한 채 지었으니 작은 행궁(行宮)도 겸하게 된 것이다. 다음 임금 인종(仁宗)은 혜음사(惠陰寺)라고 사액(賜額)도 했다. 절은 물론 국립여관인 원(院)도 겸하였다. 고려시대 큰 절은 대부분 원(院)을 겸하고 있었다.
일례로 도봉산 도봉사(道峰寺)는 도봉원이었고, 고달사는 고달원, 희양사는 희양원, 미륵대사는 미륵대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위험한 고갯길은 안전한 길이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일을 일답게 처리하는 능력자는 있었던 것이다.
100여명 승려들의 울력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절
그런 혜음사는 어찌 되었을까? 조선조로 넘어 오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이미 혜음사는 없고 고적조(古跡 條)에 고혜음사(古惠陰寺)가 혜음령에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혜음원은 남아 주 남쪽 26리에 있다(在州南二十六里)고 소개하고 있다. 이 때는 이미 대찰 혜음사는 없어지고 건물 일부가 남아 원(院)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명맥을 유지하던 혜음원도 어느 틈엔가 그 역할을 분수원(焚脩院)과 세류점(細柳店)에 넘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그 위치조차 잊혀졌다.
다행히 1999년 지역 주민의 신고가 들어 왔다. 동네 산골짜기에 옛 건물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발굴을 시작한 결과 ‘惠蔭院’을 알리는 명문(銘文)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졌던 혜음원 터였던가.>
[이한성 교수님의 이야기길에서]
드디어 혜음원지를 찾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 혹은 홈페이지(http://cafe.daum.net/storyroad1)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교수님의 <이야기가 있는 길>에서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7604
* 이야기가 있는 길,1 - 옛 이야기를 찾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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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