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철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살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진화 심리학이 아직 인간의 자살을 설명하지 못했다”와 “인간의 자살은 진화 심리학과 모순된다”를 구분해야 한다. “전혀”라는 단어까지 사용하여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점과 “따라서 세월이 지나면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임원철은 자살이 진화 심리학 또는 이기적 유전자론과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든 동물처럼 인간도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살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청소년 때 자살은 자신의 유전자가 인류의 '유전자 풀'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풀(gene pool)은 어떤 생물집단 속에 있는 유전정보의 총량을 의미한다.
성인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돼 자신의 유전자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부정적인 행동이 아직 인간에게 남아 있다는 점은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진화는 왜 인간의 마음에서 '자살 충동'을 솎아내지 못했을까. 어떤 이점이 있는 것일까. 진화심리학자들은 그동안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많은 노력을 쏟았지만 속 시원한 설명을 찾아내지 못했다.
인간은 왜 자살 할까?
주변 사람들에 삶에 대한 각성 촉발
부산일보, 임원철 기자, 입력시간: 2008. 06.09. 09:51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609/070020080609.1021095116.html
자살은 사실 진화심리학자들에게도 미스터리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살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살은 자신의 유전자가 인류의 유전자풀(어떤 생물집단 속에 있는 유전정보의 총량)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행위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면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오랜 진화 동안 자살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데스크 칼럼] 황제펭귄의 군무
부산일보, 임원철 독자여론팀장, 2013-03-21 [10:59:35] | 수정시간: 2013-03-25 [10:43:33] | 23면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321000155
생물이 유전자 복제 최대화 또는 번식 최대화 또는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최대화를 위해 완벽하게 작동하도록 자연 선택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이기적 유전자론이나 진화 심리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겠다.
1. 육체적으로 건강한 젊은이가 자살을 한다.
2. 남자가 야동에 몰두하느라 실제 여자를 만날 기회를 놓친다.
3. 부부가 콘돔을 써서 자식을 한 두 명만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다.
4. 남자가 신부가 되어서 스스로 성교나 결혼 기회를 박탈한다.
5. 독버섯을 먹고 죽는다.
6. 남의 자식을 입양하여 정성껏 키운다.
7. 아내가 바람을 피워서 남의 유전적 자식을 낳았는데도 남편이 열심히 돌본다.
8. 병에 걸린 사람이 고열로 사망한다.
9. 독사가 있는 것을 모르고 건드렸다가 물려서 죽는다.
10. 음주 운전을 하다가 교통 사고로 죽는다.
하지만 자연 선택이 완벽한 생물을 만들어내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연 선택은 여러 유전자들 중에서 또는 여러 형질들 중에서 번식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자연 선택이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 과학자가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자연 선택은 위대하다. 하지만 자연 선택이 신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여전히 진화 심리학은 자살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온갖 가설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A. 사냥채집 사회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고도 비만이 현대 산업국에는 꽤 많다. 이것은 인간이 진화한 사냥채집 사회와 현대 사회의 환경 차이 때문인 듯하다. 상대적으로 굶주림의 위험이 컸고, 음식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고, 육체적으로 많이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 진화한 인간의 지방 축적 기제가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현대 사회에서 비만을 일으킨 것이다. 자살도 이것과 비슷한지 모른다. 만약 사냥채집 사회에 비해 현대 사회의 자살률이 훨씬 높다면 이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하다.
B. 늙거나 병에 걸려서 친족에게 도움은 거의 안 되고 폐만 끼칠 정도로 허약해진 상태라면 자살을 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이런 상황을 위한 절망 기제 또는 자살 기제가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빠진 사람의 자살률이 평균 자살률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C.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체온을 높이는 전략을 써서 바이러스에 맞서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고열 때문에 뇌가 손상되거나 사망하기도 한다. 자살도 이것과 비슷한지 모른다. 번식에 대체로 도움이 되는 우울 기제가 진화했는데 때로는 이 기제가 “폭주”하여 자살에 이르는 것인지 모른다.
D. 다면발현은 한 유전자가 여러 형질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어떤 유전자 X가 자살율을 높이기도 하지만 머리가 더 좋게 만들기도 하는지도 모른다(더 잘생기게 한다는 가설, 육체적으로 더 건강하게 한다는 가설 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X가 자살을 하도록 유도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번식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X가 유전자 풀(gene pool)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젊어서 팔팔할 때 자살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좋거나, 잘 생겼거나,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데이터가 있다면 이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 돌연변이는 계속 생긴다. 따라서 번식에 해로운 유전자가 개체군에서 완벽하게 박멸될 수는 없다.
F. 인간의 학습 기제는 아주 비대해졌다. 학습 기제가 과거에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했던 것 같다. 학습 기제가 비대해질수록 인간이 학습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신을 위해 순교하면 천국에 간다”는 식의 이야기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학습 기제가 작동한다면 번식에 도움이 안 되는 방향으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위에서 제시한 진화 심리학적 가설들이 아직 입증되지도 않았으며 입증하기가 쉬워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가설들이 반증되지도 않았다.
만약 자살이 진화 심리학과 모순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면 내가 제시한 진화 심리학적 가설들과 내가 제시하지 않은 진화 심리학자적 가설들 중 입증된 것들을 모두 합쳐도 현대인의 자살 규모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는 아직 자살에 대해 잘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면 진화 심리학과 모순되는 현상을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일 뿐이다. 물론 “뭔가 이상해 보인다”는 느낌이 드는 현상이 눈에 띌 수는 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보인다”와 “모순된다”은 엄연히 서로 다른 말이다. 전자는 우리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고, 후자는 진짜로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