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화요일에 다큐보러 왔던 양주연이라는 친구가 쓴 글이에요~
“ 나도 소수자가 되고 싶어요. ”
('이 별에서 살으렵니다.' - 지구인의 정류장 1 review)
양주연
2009년의 용산 참사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 누군가는 흐지부지 모든 사건을 마무리 짓고 고인의 등을 떠밀며 “이제부터 모두들 망각하여라.” 싸구려 주문 따위를 남발했지만, 역시 싸구려는 싸구려였나 보다. 그들이 지우려 했던 “용산”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2010년 6월 15일 해지는 여름 저녁, 소수자에 관한 다큐를 보러 작은 용산 “두리반”을 찾았다. 소수자의 공간에서 상영되는 소수자 다큐영화라. 우리는 “소수자” 라는 길다란 길 위에서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걸까.
지금까지 보통 이주 노동자들과 같은 소수자들은 매체 등을 통하여 접한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비춰지는 이들의 모습은 늘 연민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약자였고, 소외계층이었기에 강자의 논리에 의하면 당연히 동정과 관용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때마다 우리가 소수자들을 위해 대변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정당성은 “인권” 이었고, 목놓아 부르던 그 노래를 당신도 기억하고 있는가.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친구에게 “인권”이라는 이유를 들어 관용을 베풀어 준 적이 있는가? 우리가 사용하고 있던 “인권”은 어디까지나 다수자의 프레임에서 약자에게 만들어 놓은 연고약에 지나지 않았으며 상처는 결국 덧나기 마련이다. 소수자 문제를 단지 인권의 프레임으로 다루려고 할 때 소수자는 언제나 관용의 대상일 뿐이며 현재의 권력구조를 변화시켜 나가거나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기 보다는, 기존 체제를 존속시켜 나갈 뿐이다. 결국 소수자 문제는 그들만을 관용의 대상으로서 변화시키려는 시선이 아닌, 그들을 받아 들이는 상대방의 시선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모두가 전혀 다른 질서, 세계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큐를 보며 느껴졌던 김이찬 감독님의 소수자를 대하는 시선은 큰 감동이었다. 다큐를 보는 내내, 소수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을 유발할 만한 무거운 슬픔의 강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소수자되기” 를 실현하고 계시는 감독님의 모습에서, "소수자 vs 다수자"의 프레임이 아닌, "모두가 소수자"가 되어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소수자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로 소수자와 친구가 되는 방법을 선택하신 감독님의 따뜻한 시선에 나 또한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결국 우리 모두가 소수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노동자가 아닌, 우리의 노동자로. 그들의 두리반이 아닌, 우리의 두리반으로. 소수자란 약자나 소외계층이 아닌, 기존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속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니깐.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정치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체에 대한 지위를 의문시하여 지금껏 주체가 아니었던 대상들도 다양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새로운 주체가 되어 함께 차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니깐. 그 차이가 변화와 생성으로 확장되어 나갈 수 있도록, 두리반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