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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Asian Art News, 홍콩, 1995. 11./ 12. pp. 77.~88. 번역
행위예술 입지를 마련하다.
문정규와 이불은 한국 행위예술을 이끄는 작가들이다.
그들은 힘있고 중대한 작품에서 우화, 풍자, 정치를 혼합했다.
제임스 리 (미술 평론가/홍콩)
1967년 이래로 행위예술은 한국현대예술의 중요하고 의미있는 부분으로 발전되어 오고 있다. 한국에서 행위예술의 최초는 아마도 1967년 비닐우산이 있는 해프닝이라는 제목의 단순한 정치적 비유인 작품인데, 이 작품은 무동인이라 부르는 젊은 허무주의적 예술가 그룹에 의해 행해졌다. 서양에서처럼 한국에서의 첫번째 행위예술은 엄격함을 중시하고 억압적이고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을 중요시 여기며 형식적인 문화가치와 사고에 대한 반대적 반응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오면서 박정희, 전두환의 군부정치 기간 동안 한국 행위예술가들은 한 비평가가 '문화적 테러행위'라고 이름지은 양상의 작품들을 공연했다. 그들의 작품을 극장, 카페나 바, 도시거리, 공원, 시골시장, 산 등지에서 실현시킴으로써 독재정권으로부터 보호되는 높은 문화수준의 성역인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역할을 침식시키려 노력했다. 1980년대 후반부로 가까워지면서 서울올림픽대회 준비에 실행되는 정치적 개혁은 문화적 풍토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고 많은 시민적 자유가 회복되었으며 예술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확대되었다. 1989년 7월 한국 행위예술의 선두적 이벤트에서 20대부터 40대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의 18명의 행위예술가들이 '예술과 행위, 인간, 사고, 소통'이란 제목의 행위예술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나우갤러리」에 모였다.
기존 전통 예술에 도전하기 시작한 매개체이며 문화적 이의제기를 위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지닌 행위예술은 전시장에서 작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불안한 위치에 있음이 돌연히 인식되었다. 같은 해 후반 국립현대미술관이 나우갤러리의 몇 명의 예술가를 포함해서 '젊은 예술가 초청'이라는 놀랄만한 결정을 내렸을 때 그것의 전위적인 상태는 앞으로 더욱 위태로워질 것으로 보였다. 반제도적인 경향을 띤 또다른 예로서 제시되었을지도 모를 이 이벤트는 예술가들에게 미술관의 애매한 문화적 의제로써 그들이 인식했던 것을 논박할 기회가 되었다. 윤진섭이 그의 작품 안에서 전시장 벽에 달걀을 던지는 것을 그만두기를 거절하자 어리둥절하고 분노한 미술관 관계자는 그의 작품행위를 방해하려 했다. 그 후로 사실상 반대가 전시관에서 있을 미래의 행위예술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높은 문화의 뚜렷한 성채인 미적 관례와 관습을 고수하는 그들의 거절로 인하여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행위작업을 한 예술가들은 비록 심각하게 주목을 끌만한 예술시설에 격분했던 이벤트에 참석했지만 가까스로 전위적인 성격은 유지했다.
1989년 두번의 행위예술제에서 열연했던 두 행위작가는 문정규와 이불이다.' 89년 이후 그들은 함께 작업하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행위예술제에 함께 초대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행위예술계에서 가장 행동적이고 두드러진 예술가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각자는 아주 서로 다른 전략, 스타일, 목적을 추구한다. 넓게 말해서 그들의 작품은 한국에서 행위예술의 양상들 중에 두 우세한 조류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정규는 자신의 대부분 퍼퍼먼스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미술에 관한 기존 관습과 개념을 다시 생각케 하는 문제들을 제기하는 반면에, 여타 퍼포먼스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철학적인 딜레마를 끄집어내고 있다. 좀 더 최근작인 「생성과 소멸(1991)」, 「당신에게(1993)」와 「포장 문화(1994)」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산업적-상업적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는 나라인 한국의 상황과 적절히 밀착시켜 환경적인 파괴와 정신적인 소외감 같은 문제들의 자각을 거론했다. 그의 퍼포먼스의 주제와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일관성있고 결집력있게 보여지는 측면은 그의 지극한 인본주의적인 감수성이다. '나의 고집스런 관심사 중의 하나는 인간성의 상실에 관한 문제이다.' 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인간성 상실의 문제는 포착하기 힘든 단계를 거쳐 오랬동안 지속되어 왔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나는 나의 퍼포먼스에서 그것을 예리하게 강조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반응하도록 자극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듣는 분열적인 다원주의에 의한 경험의 파쇄성(破碎性)과 공유적인 믿음의 이탈로 특징지워지는 시대에서 문정규는 예술의 긍정적인 잠재력의 존재를 아직도 믿고서 그토록 항상 위축되고 있는 진영에 잔존해 있는 소수 저항자 중의 한 명, 즉 반항자 군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문정규는 여러 가족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부친과 두 형제의 죽음에 직면했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 뿐만아니라 생을 풀어나가는 실마리와 관(觀)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문정규는 젊은이로서 자신이 설명하듯이 존재의 딜레마나 혹은 '생과 사의 파라독스'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국의 역서(易書)인 주역에서 그 기운을 도출해냈다. '주역은 우주 속에서 삼라만상의 윤회적 속성인 생과 사의 원리를 다룬다'고 그는 설명한다. 주로 서구적인 이원론적 대립의 개념을 초월하여 상호 연관성과 공존성을 주장하는 전통적으로 동양적인 그러한 사고방식이 그의 작품 형성에 주요한 역할로 작용했다.
「인체의 도형화 가능성」(1984), 「우리는 하나의 원(圓)이다」(1989)의 퍼포먼스로부터 이것보다 더 최근작인 「그대에게」(1993)에 이르기까지 문정규의 작품에서는 속박이 특징적인 요소로 되어져 왔으며, 이 요소는 다중적인 의미와 모순 조차도 동일한 제스처와 경험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는 조금도 수상히 여기지 않고, 다소 흥분한(분명히 의심이 없고 신경질적인) 관객을 대표적으로 선택한 다음 로프나 테이프 뭉치로 그들을 둘둘 말아 나아간다. 가끔은 낯선 사람끼리 한데 속박되어 버리는 반면에 일부는 기둥에 묶이기도 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로 완전히 감아진 일부는 그가 마루 위에 늘어 놓았던 기하학적인 문양과 그들의 인체를 조화시키기 때문에 야릇한 인간 설치(installation)같은 사물로 전환된다.
문정규의 경우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 참여 관객 사이에 야기되는 상호작용에서처럼 속박의 행위에서는 황홀경이 많지 않다. '내가 그들을 묶고 있을 때 나는 그들과 대화를 통하여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것이 속박일 수 있지만 관계성의 일종인 결합일 수도 있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연인, 당신의 부인, 당신의 남편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한 상호연관의 의미는 관객이 단순한 수동적인 관망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정규의 말을 빌자면 '나는 두렵다'로 부터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다'로 전환되는 관객들의 특별한 반응으로 인해 그들은 작품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의미들을 구성하게 된다. '나는 어떤 것이든 그 자체 안에 모순을 포함할 수 있는 점을 표현하려 노력한다'고 그는 말한다. '타인들, 연인들, 가족, 사회나 심지어는 우리들 자신과의 관계인 일종인 결합 뿐만 아니라 그러한 속박과 복종같은 이 모든 의미들은 누군가를 묶어버리는 단순한 행위에서 즉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문정규는 서양화를 공부했고 배재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물감이라는 표현재료와 평면에서의 표현 한계가 가져다준 불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으로 퍼포먼스로 행하게 되었다. 그의 80년대 초 퍼포먼스 작품들에서는 관습적인 미학적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서 인체의 표현적인 범주로 표현수단으로 탐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작품들에서는 사각형, 삼각형과 원적인 사물들을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은 인체가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의 기본적인 기하학적 기반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보여줌이었다.
「인체의 도형화 가능성(1989)」과 「천당과 지옥(1990)」 같은 작품에서는 종전에 사용했던 친숙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인간의 존재를 지배하는 범주의 상징적인 기능을 추정케 한다. 「인체의 도형화 가능성」에서 문정규는 화랑 관객을 선택하여 그들을 테이프로 묶는다. 그럼으로써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들은 그가 마루 위에 늘어놓았던 다양한 패턴-사각형, 원, 내부로 들어간 삼각형-을 형성케 되는 것이다. 부조리극에서 나오는 희극적이면서도 야릇하게 접촉하고 있는 한 장면의 모방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큰 원의 외곽선 위에서 타오르는 나선형의 모기향을 들고서 서로 누워있게 된다.
문정규의 경우 속박같은 범주의 개념은 모순적이면서도 상호결합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원시인이 동굴 속에 들어가 한 '가정'의 경계를 지운 순간, 그는 하나의 카테고리를 창조했다'고 문정규는 말한다. '이제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카테고리들이 많이 있다. 나는 우리의 삶들을 규정하고 또 구속하는 다양한 유형의 카테고리들, 관계성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러한 원형과 삼각형, 사각형들 등을 사용한다.
'「천당과 지옥」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좀 더 복잡한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회 한․일 퍼포먼스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도쿄의 도키와자 극장에서 상연된 퍼포먼스는 극장 밖 보도 위에 있는 놀란 구경꾼 무리들 중 한명을 이유없이 큰 자루에 넣어 유괴하듯 애써 나아가는 문정규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몸부림치는 인체를 담은 큰자루를 밧줄로 끈다. 그 장면은 포획되어 살해되는 동물 그리고 마치 누에고치로부터 변화된 삶 속으로 빠져 나오려고 기다리는 어떤 것을 연상시킨다. 문정규는 일단 실내로 들어서 중앙에 자화상과 추상화를 복사하여 작은 사각형으로 자르고 무작위로 쌓아 만든 콜라쥬로 덮여 있는 무대 바닥 중앙에 자루를 놓는다. 이것은 창조적인 에너지-혹은 물질의 어떤 에너지-가 결코 소모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에 변형의 과정을 거쳐 다른 형태로 메워지게 된다는 문정규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경우에서 처음에는 회화의 판판한 평면에서 구현되었던 창조적인 에너지가 사각형들로 분할되었으며 일종의 설치로 전이되었고 이윽고 행위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주역과 불가에서 설명된 것과 같이 모든 존재의 윤회적 속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그리고 불교사원에서 들렸던 주로 목판 타악기로 이루어진 음악적인 반주에 퍼포먼스에서 강조되는 하나의 아이디어이다.
천당과 지옥」에서 대부분의 행위는 깃처럼 자신의 목 주위에 매달려 있는 한 더미의 텅빈 사각구조로부터 스스로가 벗어나려고 헛되이 노력하면서 무대 주위를 기어다니는 관객과 퍼포머(마임(mime) 심철종)에 의해 진행된다. 그는 종종 무언의 호기심으로 인체가 들어 있는 자루에 접근하지만, 곧 이어 문정규가 생소한 포즈로 속박하거나 동결시킨 채 무대의 여러 지점에 설치해 놓은 관객들에 의해 괴로움을 받는다. 작가 문정규가 한데 모아 놓은 것은 현대적인 상황의 알레고리적인 장면이다. 자신의 범주들의 한계 내에 갇혀있는 우리 각자는 진정한 대화를 이루어 낼 수 없거나 아니면 그럴 의향이 없이 서로 서로 경계하는 고립 속에서 살아간다고 문정규는 제시한다. 그 메시지는 작가가 퍼포먼스를 끝마칠 때 태연하게 직설적으로 반복된다. 큰 스케치 종이를 든 그는 그것을 세 번 접고서 세 개로 찢어버린다. 그는 정신적인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 종이를 펴고 찢는데 그런 행위를 통하여 결과 지어진 그 십자가를 돌발적으로 불에 태운다. 그는 나머지 종이 조각들을 갖고서 일본어로 '지옥'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사실로 이것은 한국어나 영어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비록 문명이 과학기술과 함께 진보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갈수록 더 심하게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내가 느끼기에 일종의 지옥이며 내가 십자가 혹은 천국을 불사르고서, '지옥'이라는 철자만을 남겨놓는 하나의 이유인 것이다. 나의 의도는 천국과 지옥이 바로 우리 주위에 있으며, 심지어 이와 같이 텅빈 종이 한장에서조차 「천국과 지옥」이 항상 공존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이 퍼포먼스에서 반영된 점을 문정규는 피력한다.
「생성과 소멸」(1991)에서 그의 일반적인 지옥 개념은 우리의 증가일로에 있는 과학기술적인 시기에 있어 환경파괴와 비인간화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주제는 「인간, 자연과 문명」(1992)과 「당신에게」(1993) 같은 작품들에서 거듭 거론되고 있다. 한국의 공주에서 열렸던 국제자연미술제에서 개막식 행사로서 옥외 퍼포먼스로 치러진 「생성과 소멸」은 비닐과 나뭇가지로 만든 임시적인 샤우어 대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 대의 차는 짐승과 같은 기계화의 구현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수십마리의 금붕어는 자연의 희생적인 앙블렘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합성세제와 샴푸로 오염된 양동이 물에서 헤엄쳐 다니도록 내버려져 있는 물고기는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 개념상 간단하고 행위 동작에 있어 함축적인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널리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몹시 위험한 산업발전이 자연의 균형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있다는 작가의 요점을 잘 전달한다.
가장 최근 퍼포먼스인 「포장 문화」(1994)에서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점증하는 부와 상업주의 가운데서 만연해가는 무절제한 소비주의에 대한 풍자적인 시각을 던진다. 비인간화되고 있는 물질주의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을 가하는 문정규가 일부는 바코드가 새겨진 대형 쇼핑백을 걸치고서 타블로이드판 신문, 잡지 광고물 그리고 일회용 문화의 파편인 물건 포장지와 같이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물건들을 계속 주워 담으면서 관객들 사이로 쏘아다니는 몇몇 퍼포머들을 등장시킨다.
「포장 문화」에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는 사회적인 자각과 문화적인 논평은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그가 과거에 추구해왔던 좀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전환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나는 무분별한 소비가 우리의 비인간화된 상황의 징조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순수한 자아 어떤 진정한 정체성(正體性)을 갖지 못하고 오직 사고, 팔고 또 사용해버리는 텅빈 포장이라는 인위적인 이미지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포장 문화」의 의도에 답하는 코멘트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인간주의적인 경향은 불변하고 있다.
비교적인 동양철학에 이끌리어 '자연', '죽음' 그리고 '재생' 같은 숭고한 개념들에 호소하고 있는 문정규 작품은 그의 모든 숭고하고 인간적인 의도 덕분에 질서정연한 우주의 길고도 믿기지 않는 미로로부터 헤어나오려는 몸부림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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