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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청춘,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스승에게 길을 물어라 | |||||||||
이 름 | visionschool | |||||||||
청춘,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스승에게 길을 물어라. 한 청년이 런던에서 상점 점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 5시 청소를 시작으로 하루에 만 14시간씩 꼬박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곧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그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체력의 한계와 정신적인 공허감 때문에 더 이상 근무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은 고민 끝에 자신의 옛 스승에게 편지를 썼다. 먼저 경제적인 어려움과 마음의 답답함을 호소하고,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러나 청년은 편지를 써놓고도 한참 동안 그 편지를 보내야 할지 망설였고, 또 겨우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내 놓고도 스승에게 일자리나 구걸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창피스럽고 한심해 자살까지 마음먹었다. 그러나 옛 스승의 답장은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스승은 청년을 위해 교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 청년은 교사가 된 후에 서서히 잠재되어 있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1895년에 이르러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 청년이 바로 영국의 저명한 문필가 하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이다. 그가 스승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가 부끄럽고 자존심 상해서 끝내 편지로나마 스승을 찾지 않았다면, 《타임머신》도 ‘문필가 웰즈’라는 명성도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1982년 가을, 서른 세 살이던 나는 서울의 공장지대에 있는 한 제조 기업에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일하는 재미로,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으로 열심히 뛰어 다녔다. 해외시장 개척한다고 동남아 각국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신제품 개발한다고 유럽에까지 출장도 가고 했다. 그래서 조금의 성과도 있었고 나름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더 이상 회사생활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칠 년이 지났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별다른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기업주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의 가치관이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 그리고 나의 창의성을 살리기보다는 그냥 주어지는 일을 해야 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좀 더 나다운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보다 더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명성이나 업적을 쌓을 수 있는 있는 일에 청춘을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몇날 며칠을 고민했다. 친구도 만나보고 선배도 찾아가 보고 여러 책들도 읽었다. 그러나 시원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았던 옛 스승이 “신랑이 입장하는 모습을 보니 제자라기보다 마치 아들이 걸어 들어오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그 스승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고 향후의 진로에 대해 지도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 업무적인 말이나 공식적인 회합에서는 비교적 활발하게 자기주장을 내놓는 편이다. 그러나 내 자신에 관한 일, 특히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러 달 동안 그 스승의 전화번호를 다 눌러 놓고도 신호가 울리기 직전에 그냥 내려놓곤 했다.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 있는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 공연한 걱정을 끼치는 것도 싫었고,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도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것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당시 그의 집이 있었던 금호동 고개를 걸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은 나에게 따듯한 커피를 권하면서 내가 학생 때 보여준 자질과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켰다. 그는, 별로 잘 하지도 않는 영어실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나를 불러내서 외국인의 설교를 즉석 통역케 하곤 했었다. 그리곤 엉터리 통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학생시절의 나의 모습에 대해 특히 긍정적인 요소들을 상기시키며 더불어 여러 가지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회사생활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해야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지를 물었다. 나는 스승처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채 못 되어 나는 스승의 도움으로 대학 교수가 되었고, 30년이 지난 지금 그 스승의 유훈을 받들어 비전교육이라는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내가 금호동 고개를 걸어 올라갈 무렵 만약 멘토라는 말을 그때도 알고 있었다면 나의 발걸음이 그토록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멘토라는 말은 그 후 십 수 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고 나도 사전을 찾아보게 되었다. 하여간, 그날부터 경희대 부총장, 한남대 총장, 그리고 숭실대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이원설은 나의 멘토가 되었다. 그 전에도 늘 찾아뵙고 인사도 드리고 질문도 하였지만 그날의 문답은 어떤 운명적인 맥락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면 무조건 그를 찾아갔다. 명색은 멘토링을 한다는 것이고 실제론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은 도움을 청하러 왔으면서도 어떤 객관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그것에 대한 의견을 질문하는 나의 심리를 모두 궤뚫어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며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발휘해 나를 도왔다. 그렇게 하여 그의 도움으로 작은 성취를 하나씩 쌓아 지금은 내 나름 하나의 전문영역, 하나의 도메인(Domain)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길을 잃었는가?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가? 혼자 가기엔 길이 너무 험난하고 위태로운가? 멘토에게 가라. 멘토는 이미 해결의 열쇠를 손에 들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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