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절정이었던 6·10대회의 진원지는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었다. 세상의 불의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신앙과 민주화운동을 접목시켜온 성공회는 폭넓은 교리와 중도노선의 전통으로 국민과 함께 성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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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초 축성된 강화읍성당. 바실리카 양식을 한국화하여 불교식 가람배치에 한국 전통문양과 유교식 현판을 건 건물로서 그리스도교와 한국문화가 어울려 빚어낸 걸작이다. | 1987년 6월10일 저녁 해질 무렵. 서울 시청 앞에 자리잡은 성공회 서울대성당과 그 일대에는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전투경찰과 ‘닭장차’가 겹겹이 둘러싼 그곳에는 미동마저 허락하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6시 정각, 성당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온국민과 전세계 언론이 이곳을 예의주시하면서 그 종소리를 기다렸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매일 저녁 6시만 되면 어김없이 울리는 종소리였건만 그날의 종소리는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클라이맥스이며, 현대사의 분수령을 알리는 역사적 울림이었다. 숱한 세월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온 군사독재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자유와 민주의 종소리였던 것이다.
6·10대회.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헌법 쟁취를 위해 넥타이부대와 학생, 시민들이 거리를 메웠던 그날의 함성과 몸짓은 바로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시작되었다. 성당 스피커를 통해 대표자들이 낭독하는 선언서가 들려오고, 성스러운 기도가 바쳐졌다. 그 성스러운 종소리는 지금도 매일 울리고 있다. 바쁜 발걸음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걷노라면 문득 들리는 그 종소리에 사람들은 자신의 심장 깊숙이 담겨 있는 소망과 아픔을 꺼내 보며 하늘의 은총의 세례를 받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사실 6·10대회를 통해 우리 국민은 대한성공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된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 또한 교회가 이름을 알리기 위해 한 일도 아니었다. 당시 억압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대회를 연다고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핍박과 도전을 자초하는 것이어서 여타 다른 교회에서는 회피했던 사안이었다. 그래서 세상의 불의와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신앙과 민주화운동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해온 ‘작지만 큰 교회’인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이 일을 감당한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세상과 교회, 신앙과 이성, 신교와 구교가 서로 대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협동하고 보완해야 할 요소인 것으로 인식하는 폭넓은 교리적 입장과 중도의 노선을 걷는 성공회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을 필연적으로 6·10항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핵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1890년 코프 주교 처음으로 한국땅 밟아
성공회는 천주교회나 장로교 등 개신교회보다 다소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19세기 말엽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로 대다수 민중의 삶이 곤경에 처했을 무렵, 당시 전파되기 시작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들 민중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8세기에 전파된 천주교회는 19세기를 거쳐 착실한 성장을 하였으며 개신교도 1880년대를 기점으로 복음 전파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한성공회는 에드워드 벤슨(1829∼96) 켄터베리 대주교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존 코프(1843∼1921, 한국명 고요한) 신부를 1889년 11월1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고요한 주교가 한반도 선교의 책무를 받고 초대 한국교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 국내외 선교여건이 좋지 않았으므로 고요한 주교는 한국 선교에 필요한 재정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나는 마치 나룻배 한 척으로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었다”는 그의 회고를 통해 당시 한국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890년 9월29일 코프 주교는 의사이며 선교사인 랜디스(?∼1898)와 함께 서울의 관문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써 선교의 첫 발을 디뎠다. 한국인 그 누구 한 사람 반겨주지 않았으나 코프 주교는 한국 선교에 대한 정책과 방법을 구상하면서 특히 병원선교와 한글성서 번역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랜디스는 진료활동 외에 영어학교와 영어성서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스스로는 한국어를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불과 2, 3개월 후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코프 주교는 여러 곳에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중 성루가병원은 그 이름이 한국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하여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樂善施醫院)으로 바꿀 정도로 진취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랜디스는 진료활동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및 문화유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서를 수집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이후 랜디스가 수집한 장서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랜디스문고’로 기증되어 오늘날 한국학 연구의 귀중한 보물이 되고 있다.
초창기 성공회는 영국 해군에서 기증받은 인쇄기로 1891년 인쇄소를 설립하고 각종 문서와 성공회 관계 책자를 발간했다. 또한 대영성서공회와 협력해 조선성서공회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여 성서를 민중의 글인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트롤로프(1862∼1930, 한국명 조마가) 신부는 조선성서공회의 전신이라 할 성서번역위원회의 스크랜턴·언더우드·게일·아펜젤러와 함께 성서번역자회의 위원으로 참가하여 마태오복음 및 여러 다른 복음서와 서신을 한글로 번역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일찍이 종교개혁 이전부터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던 성공회의 전통과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즉, 각 민족 고유의 말과 글로 성서를 읽게 해야 한다는 민족교회 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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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성당에서 봉헌된 성탄절 미사. 성공회는 신학적 차이때문에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典禮는 구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대한성공회는 1890년대를 넘어 1900년대 초에 이르러 강화읍에 성당을 건축, 축성(祝聖)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강화읍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한국화하여 불교 가람배치 구조에 따라 건축하고 여기에 한국 전통적 문양과 유교식 현판을 건 건물로서 그리스도교와 한국문화가 한데 어울려 빚어낸 모습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1899년 가을부터 시작된 성당 건축공사에 사용한 목재는 백두산 원시림에서 구해 신의주에서 뗏목으로 옮겼고,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목수가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강화성당은 기독교의 보편적인 진리가 한국 땅에 뿌려져 한국식 옷을 입고 나타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성공회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며, 이 땅의 기독교가 걸어야 할 좌표라고도 할 수 있다. 서양 기독교가 서구식 생활양식과 문화를 고집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비하하거나 파괴하는 현실에서 멀리서 보면 근사한 절이나 왕궁처럼 보이는 강화성당은 획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기독교의 한국화의 표상이라고 할 만하다.
1910년 10월28일 2대 주교 터너 신부가 과로로 순직한 이후 트롤로프 주교가 제3대 교구장으로 승좌하면서 한국성공회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트롤로프 주교는 1914년 강화도에 신학원을 설립하여 한국인 사제 양성에 주력한 결과 1915년 한국인 첫 영세자인 김희준에게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주었다. 1925년 9월 성가영광 축일에는 트롤로프 주교의 축성으로 현 성가수녀원 자리에 수녀원을 축성하고 이비비(1899∼1990)씨를 첫 지원자로 하여 수녀원이 설립되었다.
강화성당은 성공회 정신의 상징이자 좌표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에 강점된 한국의 어려운 상황 아래서 교회는 수난의 길을 걷는다.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병천교회와 그 부설학교가 가중되는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롤로프 주교는 1922년 대성당 건립에 착공하여 1926년 5월 완공함으로써 교회에 힘을 불어넣었다. 서울대성당은 동양에서는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춘 교회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돼 있다.
1930년대말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 거세지면서 일제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등 교회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고 자연 교회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해방의 혼란기와 6·25를 거치면서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희생되어 교회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5대 교구장 존 데일리(1903∼1993, 한국명 김요한) 주교의 취임과 동시에 교회 재건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는 산업사회의 교회 선교활동의 중심으로 산업선교를 채택하고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 한국 산업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김요한 주교는 교구장 재임 기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하여 교회일치운동과 지역사회 개발운동 및 기아해방운동을 전개하여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교방향은 한국성공회의 자립·자전·자정(自立 自傳 自政)의 바탕이 되었다. 대한성공회는 교구 설립 75주년이 되는 지난 65년 서울과 대전교구로 분할했다. 이후 한국성공회는 더욱 선교역량을 강화해 74년 대전교구를 대전교구와 부산교구로 분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1백주년 기념일인 지난 90년 9월29일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과거 1백년간의 역사를 재평가하면서 회개와 반성의 고백을 통해 새로운 1백년을 출발했던 것이다. 지나간 1백년 동안 대한성공회는 영국 캔터베리 관구에 소속되어 여러 분야에서 능동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 1백주년의 뜨거운 기도와 신앙고백의 결과 드디어 92년 독립관구로 승격하는 관구헌장 선포식을 갖게 되었다. 이어 이듬해인 93년 4월16일 초대 관구장으로 김성수(시몬-서울교구장) 주교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이제 선교 2세기 복음화 10년이라는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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