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의 휴휴암좌선문 19
치열하게 작용하나, 본래모습은 한결같다
合而言之컨댄 熾然作用이나 正體如如를 謂之坐요
(종합하여 말하자면, (천만경계에) 치열하게 작용하나, 그 본래모습은 변함이 없음을 이르되 ‘좌’라 하고)
지금까지 우리 성품의 텅 비고 고요한 특성을 ‘좌’라 하고, 밝고 두렷한 특성을 ‘선’이라 해서 여러 가지로 예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한데 모아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천만경계에) 치열하게 작용한다[熾然作用]’고 하는 것은, 우리 성품의 묘용(妙用)은 마주대하는 경계마다, 매순간 어김없이, 그야말로 활발하게 살아있음을 말합니다.
경계를 대하여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느냐 하면 ‘맹렬하게 불길이 타오르듯이[熾然]’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품에서 발하는 지혜는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발하는 게 아니라, 참으로 밝고 환하게, 분명하고 뚜렷하게 묘용[靈知]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마음이 망상분별 없이 허공처럼 비어있게 되면, 마음 간 곳이 없으나 또한 마음이 가지 않은 곳이 없으며, 육식(六識)이 생생하게 깨어있게 되어, 우리 자성이 육경(六境)에 남김없이 대응하여 공적영지[자성의 혜]를 나투게 됩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적적성성’하다고 하며, ‘온몸의 감각기관이 모두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하다’고 표현하는데, 이처럼 분별주착이 사라지면, 천만경계에서 성품의 광명이 그야말로 타오르는 불길처럼 생생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때에도 ‘그 본래모습은 변함이 없다[正體如如]’고 하였습니다.
자성의 혜광이 그처럼 활발하게 약동하는 중에도, 성품 자체의 텅 비고 고요한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적한 성품(자리)에서 밝고 두렷한 영지가 나툰다는 것이며, 자성의 정[空寂]을 여의지 않고 자성의 혜[靈知]가 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무시선법에 있는 “모든 분별이 항상 정(定)을 여의지 아니하여”라는 말씀은 바로 위와 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구절입니다.
縱橫得妙하야 事事無碍를 謂之禪이니
(자유자재로 묘용을 얻어서, 일마다 걸림이 없음을 일러서 ‘선’이라 하니)
‘자유자재로 묘용을 얻는다’고 한 것은, 위와 같은 우리 성품의 묘용[공적영지]은 누군가로부터 배우거나 또는 스스로 갈고 닦아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텅 빈 본래성품에서 저절로 발하는 것이며, 천만경계에서 그야말로 무한정 나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맑은 거울은 본래 텅 비어있지만, 밖으로 천만사물을 남김없이 밝게 비추는 것처럼, 텅 빈 성품에서 발하는 우리의 영지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마다 걸림이 없다[事事無碍]’고 하였는데, 수행인이 모든 경계에서 이러한 자성의 혜광을 따라 몸과 마음을 쓰면, 무시선법에 있는 법문처럼,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텅 비었으므로 밝은 영지를 나투고, 그래서 저절로 바른 행이 이루어지는, 공원정(空圓正)의 원리가 모두 이 속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요체(要諦)인 공원정이 우리 정전 무시선법에 그대로 들어있으며, 이것이 곧 진리적 수행의 본질입니다.
라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