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숙성 냄새
태풍의 핵심인 회사 내를 비켜나서 해외에 나가있으면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여기에서 근무한 지난 기간 동안 회사가 힘들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본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어디에 있든 모든 직원이 똑 같고, 본사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해외에서 들으면 더 안타깝습니다. 특히, 최근의 마이크론과의 “이상한 조건”의 매각 협상을 지켜보면서 하이닉스 직원으로서 혼자서 열도 많이 받고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랬는데, 이제 일단은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길로는 가지 않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우리 직원 모두가 또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클지 모르지만, 이번 일처럼 “대역전극”이 벌어진 날은 퇴근길에 동료 직원들과 회사 앞에서 한 잔 하는 게 회사원의 의무(?)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는 그런 직장 동료가 주변에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지난 4월 30일은 퇴근길에 슈퍼에 들러 맥주를 몇 캔 사서 집에서 혼자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맥주와 관련되는 이야기이며, 유럽 맥주에 대한 전문가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IMEC 어느 휴게실 벽에 누가 붙여 놓았는지 재미난 그림이 한 장 붙어 있습니다. 우리 회사 사무실마다 있는 그런 정수기 위에 물통이 얹혀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맥주 병이 꺼꾸로 꽂혀 있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What every office needs”입니다.
유럽 관련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와인은 프랑스 산, 맥주는 독일 맥주가 유명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요즘 EU 국가끼리는 상품들이 무관세로 자유롭게 유통되기 때문에 상점에 가면 독일, 덴마크, 네델란드 상표의 맥주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벨기에 사람들도 맥주를 참 좋아하고 잘 마십니다. 우리나라나 미국의 반도체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술을 사 먹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인데, imec 구내 식당에서는 맥주나 와인을 판매하고, 실제로 점심시간에 자연스럽게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직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벨기에의 맥주는 그 종류가 3,000 가지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20~30 가지만 상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흑맥주도 있고, 수도원에서 만든 무슨 맥주도 있지만, 제가 최고의 맥주로 점수를 준 것은 벨기에 산 Stellar Artois라는 것이며, 우리나라 일반 맥주와 마찬가지로 투명한 맥주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맥주와 관련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한국의 제 집은 이천 신하리 OB 맥주 공장 옆에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가끔 농담한 것이, 맥주 공장과 우리집 수도꼭지를 파이프로 연결해서 맥주를 미터기로 편하게 사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벨기에에서 그 소원을 실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입맛 기준으로 벨기에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인 Stellar Artois 공장이 바로 저희 아파트 근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운명(?)적인 것은 저희 집 주소가 Brouwersstraat 중에서도 1 번지입니다. 화란어로 “Brouwers”는 “맥주를 숙성시키는 사람들” 이라는 뜻이라고 하고, “straat”는 영어로 street 입니다. 옛날에 이 거리에 맥주를 만드는 가내 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도 거리 이름을 Brouwersstraat 로 부른다고 합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맥주 냄새입니다. 이천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야간 근무 후 안개 낀 새벽에 회사 내에서 간장 다릴 때 풍기는 냄새와 비슷한…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냄새를 맡은 기억이 한번씩은 있을 줄로 압니다. 그 냄새가 맥주 공장의 숙성 냄새다… 아니다… 반도체 공장에서 뿜어내는 유독한 냄새다…. 이런 저런 추측이 많았는데, 이제서야 그 냄새의 진원지를 정확하게 알겠습니다.
그 냄새는 반도체 공장과는 전혀 무관하게 맥주 공장에서 나는 숙성 냄새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벨기에 아파트에서도 저기압인 날 새벽에는 이천에서 맡았던 바로 그 간장 다리는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천에서 맡았던 냄새와 너무나 똑 같은 냄새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는 그 냄새가 반도체 공장에서 나는 유독한 냄새가 아니라 맥주 공장에서 나는 냄새이므로 안심하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여기에서 그 냄새를 맡으면 기분 나쁘다는 생각보다는 우리회사가 있는 이천의 냄새라고 생각하면서 기분 좋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2002.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