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6) 류영모(柳永模, 1890-1981)
| | | ▲ 다석 유영모 | 다석(多夕) 류영모는 젊은 시절 한 평번함 과학도로 시작하여, 끊임없는 연구(진리탐구)와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서 세계(인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 불, 선, 기(기독교)의 회통과 창조적 조화를 이룩해 낸 인물로서, 20세기의 탁월한 통섭의 사상가인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사상가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일생동안 자신의 삶의 근거로 견지 하면서도, 단순한 교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 종교 사상들과 또한 한국고유의 전통종교 사상들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창조적 만남과 조화 회통을 통해서,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심층적으로 이해한 참으로 희귀하고 독특한 사상가이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 강좌를 맞게 되었는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 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박영호씨의 기록에 의하면, 연경반은 많이 모일 때는 수백명이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적게는 십여 명씩 모였으며, 평균 2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고 한다. 류영모는 이 연경반에서 기독교의 성경뿐 아니라, 유불선의 경전들즉 동양의 고전들도 강의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와 유불선의 종교적 가르침들과의 조화 속에서, 즉 기독교를 그 자체에 의해서만 이해하지 않고, 동양의 지혜를 통해서 이해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류영모는 1959년에 영경반에서 <노자>를 강의 했고 같은 해에 불교의 중요 경전인 <반야심경>을 강의하였다. 박재순 교수는 다석의 불교에 대한 친밀성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석은 공(空) 사상에 기초해서 만물을 공으로 보고 하느님의 본성도 공으로 보았다. 그는 23세 때부터 빔(空)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늘 빈탕한테를 말한 것도 불교적이고, 해혼 후 하루 한 끼 먹은 것도 금욕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모든 집착과 욕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는 것은 불교의 해탈을 추구한 것이다. 날마다 무릎 꿇고 앉아서 생각과 명상에 잠긴 것은 불교의 선(禪)을 수행한 것이다,...사람 노릇을 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했고 불교를 모르고는 이 세상을 바로 살 수 없다고도 했다. 다석은 자주 예수와 석가를 나란히 언급했다. 다석은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인 불성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보았고, 하느님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기독교와 불교를 연결시켰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pp. 313-314)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단순히 기독교와 불교(특히 선불교)의 대화나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 두 종교를 한 생명인 자신의 삶으로 직접 실천한,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의 창조적 일치를 실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보고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불타가 따로 있지 않고 둘이 진리의 스승으로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스승인 점에서 그 두 분은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통찰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류영모의 이러한 통섭의 정신은 바로 우리 한국인의 고유 철학인 “한사상”(韓思想) 즉 일즉다(一卽多)의 궁극적 조화와 일치의 원리인 “한사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참조, 류기종, 기독교와 동양사상, 황소와 소나무, pp. 12-37)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류염모는 인간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양측의 입장을 함께 종합해서 본 듯하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현존재를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에 의한 원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성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깃드려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불교는 인간이해의 핵심으로서 탐(貪,탐욕), 진(瞋,분노/시기/질투/미움), 치(痴,무지/어리석음/치정-성적충동) 3독을 보편적 성질로 이해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탐진치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나 생물들의 삶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이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탐진치 3독의 내재성으로 보는 불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죄성(롬1:29-3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에 대한 진술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동물적 요소인 탐진치의 속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참조, 박영호 풀이, 다석 류영모 명상록, 두레, pp. 472 이하).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 인간이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참 자유인 즉 진리를 깨달아서 참 자유함을 얻은(요8:32) “얼나” 곧 영적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3독을 제거하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류영모의 인간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가 함께 공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친밀성(공통점) 이해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바로 불교의 공(空/빔/없음)과 기독교의 하나님(하느님/한님/한얼)을 그 근본(본질)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어떤 의미로는 동일한 내용(개념)으로 이해한 점이다. 류영모에 따르면 허공(空)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순수하고/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하공을 알고 허공을 존중하여 맘에 품고 살 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와 인간의 바탕이 허공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석이 공 혹은 허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물의 근거로 본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류영모는 공(空)을 참된 실재로 보는 불교의 공의 철학 곧 공의 신비와 의미를 깊이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공)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내가 아버지(하나님) 안에 아버지(하나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여, 석가의 공 이해와 예수의 하나님(아버지) 이해를 대비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류영모는 이 “빔”(공/허공)을 최고로 높고 밝고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즉 류영모는 공 혹은 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령한 허공을 하느님으로 이해했으며, 허공, 마음(얼) 혹은 영(靈), 절대자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허공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허공과 하나로 되어 하늘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물질과 허공을 하나로 보는 공색일여(空色一如)의 자유함을 얻는 다고 하였다. 그러나 류영모는 공(허공)을 참된 실재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라 이해하면서도 불경에 하나님이란 말이 없음을 못내 아쉽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의 저변에 기독교의 신관과 함께 한국인의 고유 종교성인 하느님 신앙이 흐르고 있음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참조, 박재순, 앞의 책, pp. 316-319)
요컨대, 류영모가 이해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의 욕심(3독)을 뽑아내서 “빔”에 이르러 공색일여(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진리를 깨달음에서 오는 참 자유 곧 궁극적인 자유(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다석이 허공을 진리 곧 참 실재로, 만물의 바탕으로 본 것은 불교의 중심 진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공(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은 불교의 기독교적 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점에서도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조화와 통섭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얼나”의 현시자로서의 불타와 그리스도>: 류영모의 사상에서 또 하나의 독특한 개념은 “얼나”의 개념이다. “얼나”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인 “제나”(selfish ego) 즉 인간의 죄성인 탐진치 3독을 제거하지 못한 인간에서 “빔”(공)의 진리를 깨우쳐서 신의 본성인 "빔"(空性)과 하나가 된 영원한 자아, 즉 시공을 초월하는 공한 마음(空心)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참 자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삶의 목표는 바로 이 동물성(獸性) 곧 죄성으로 인하여 죽어 없어질 존재인 “제나”(육적인 자아 곧 땅의 존재)에서 영원한 생명과 광채를 지닌 “얼나”(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제나”가 “얼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나”가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이 제나의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다. 류영모에 있어서 완전한 자기부정의 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타(불교)의 진각(眞覺)에 이르는 4대 진리인 고집멸도(苦執滅道)의 완성/성취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얼나”는 득도 진각을 이룬 초월적 자아 곧 영적인 자아(enlightened/spiritualized self)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불타와 그리스도는 둘 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인류에게 득도 해탈의 길 곧 구원의 길을 제시해준 위대한 참 스승이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진인(眞人) 곧 “얼나”의 모형이다. 그런 점에서 불타와 그리스도는 이 “얼나”의 현시자요 화신(incarnation)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불타는 공(빔)의 진리와 또한 공과 만물이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모든 집착과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해탈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그리스도는 참 빔(참 실재)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길,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죽음까지도 포함된 모든 속박과 억매임으로부터 완전히 놓임 받는 참 자유함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에게는 불타와 그리스도 두 구원자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실은 이 둘은 하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타와 그리스도 두 분이 다 참 "빔"(공/허심/태일太一/하나님/궁극적 실재)과 하나가 됨으로써, 즉 “빔의 신비"(mystery of emptiness) 곧 “없이 있으며 참으로 있음”의 신비를 깨달음으로써, 궁극적 자유함(해탈)인 구원에 이르는 길(진리)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에 있어서 불타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태극의 음양 리기의 관계처럼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의 관계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류영모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와 만남을 넘어서 두 종교의 아름다운 조화와 상보관계를 실현한 독보적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류영모는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시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에 있어서 두 종교의 관계를 류영모 처럼 깊이 통찰한 사람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맺는말>: 이상에서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크게 기여한 즉 두 종교 간의 대화의 개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았는데, 필자는 그들 중에서 우리 한국의 기인(奇人) 다석 류영모의 방법이 가장 탁월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두 종교의 대화를 넘어서서, 양 종교를 친밀한 형제와 친구의 관계로 즉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이 꼭 필요한 (태극의 음양과 리기의 관계처럼) 필수적 동반자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독교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필요로(알아야)하고, 또한 불교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필요로(알아야) 하는 상보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류영모는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이해와 대화에 있어서 최대의 공헌자로 평가되리하고 사료된다. | | | ▲ 만년에 구기동 자택을 거닐고 있는 다석 유영모 | | | ▲ 함석헌과 유영모. 함석헌은 유영모의 제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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