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가 왜곡된데는 신경수 선배님이 쓰신 것처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왜곡된 내용입니다.
1993년 국민학교 5학년 2학기에 실린 내용입니다.
' 김정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때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대동여지도'를 보고, 이 지도는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김정호의 피땀이 어린 지도의 목판본까지 몰수해 불사르고 말았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는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빛나며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다. 아울러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신념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방후 50년이 넘도록 국정교과서에 실어 전 국민을 일제강점기 논리에 따라 인식하게하였습니다.
김정호는 옥에 갇힌 적도 없고, 대동여지도의 목판본이 불살라진 적도 없습니다.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으로 인쇄된 것에 대하여 당시 조정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병조판서를 지낸 신헌이 대동여지도 제작에 협조하였다는 글을 남겼고, 유재건은 사대부가 아닌 인재들의 행적을 기록한 이향견문록에 김정호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김정호의 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정호는 자시이후 궁정출입이 자유로운 3정승과 같은 대우를 받아 궁정출입이 자유로웠습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만 목판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최한기의 도움으로 지구전후도라는 세계지도 목판본도 만들었습니다.
목판본이라는 것 자체가 수요가 많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제작한 청구도가 필사본이므로 대중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조선후기 상업받달에 따라 유통이 급성장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하여 김정호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접근을 하였습니다.
우선 과거 우리나라 지도들을 모두 조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대동여지도의 저본으로 여지도를 활용하였고, 최초의 근대지도로 평가받는 정상기의 동국여지도에서 사용된 축척을 발전시켜 축척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답사하기도 하여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백두산 지역도 1번은 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기준점으로 현재 보신각옆에 표석으로 새겨져있는 지점(경도로 표현)을 정한후 나침반을 사용하여 방위와 거리를 표시하였습니다. 축척은 백리척을 사용한 정상기와 달리 십리척을 사용하였구요. 여기서 잠깐 확인하고 가실께요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160,000이라고 책들을 찾아보면 나옵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216,000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10리를 4km로 환산했을 때 적용되고, 후자는 10리를 5.6km로 본 우리 선조들의 거리단위에 기초할 때의 축척입니다.
대동여지도의 우수성은 이와같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지도로 매우 정확하며, 범례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경계 표시방법, 거리, 가항하천과 비가항하천의 표시 등 목판에 새긴 내용의 풍부성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상 제가 아는 김정호 이야기입니다.
첫댓글 좋은 정보, 바른 정보 감사합니다.
노교수님!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인정해주시고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하신 내용 알려 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틈나는대로 읽어 제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범례까지도 그렇게도 자세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선생의 지도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가 이미 어떤 경지에 올랐다는 반증일 것 같습니다.
박범신 선생의 '고산자'에서 본 선생도 거의 그런 수준으로 기록이 되고 있으니....
古山子가 孤山子보다는 高山子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좋은 정보 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