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우의 뒤
1980년 여름 , 레이와 아내 신시아는 정들었던 뉴욕 브루클린 본부를 뒤로하고 , 앨라배마주 북부의 가즈덴이라는 마을로 이사했다. 협회가 전별 금품으로서 레이에게 지급한 1만 달러에다 , 빚낸 5천 달러를 보태 , 그는 조립 주택을 구입하여, 친구인 피터 그레가손의 부지에서 살게 되었다. 그레거슨은 앨라배마 , 조지아주에 몇 개의 가게를 가지고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2대째의 헌신한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레이 부부는 이스라엘의 지대 여행을 함께 한 것을 계기로 , 그레거슨 부부와의 수년간의 우정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레거슨은 레이에게 , 그의 주거 부지와 그 부지의 손질을 하는 정원 일의 일자리를 주었다. 그레거슨 자신은, 생애의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생활속으로부터, 그 당시 스스로, 독립적인 성서 연구의 필요성을 통감해 실행하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성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 조직의 가르침이 성서와는 어긋난다는 점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장로 직분을 스스로 그만두고 있었다. 그는 레이에게 「나는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이 성서가 증명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연구하는 사회자가 될 수는 없어」라고 장로를 그만둘 때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
레이는 그레거슨의 소유지의 잔디 깎기 , 잡초 제거 , 식목의 초목 손질 , 등의 일을 했다. 벌이나 등에에게 물려 한 여름의 혹서아래에서의 연일의 육체노동은 , 레이가 지금까지의 59년간의 인생 중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 확실히 육체의 아픔이었지만 , 그런데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완화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레이 부부는 , 그 와중에서도 매일아침 부부사이의 성서 연구를 빠뜨리지 않았다. 레이는 그 당시에, 부부가함께 계속 읽은 시편이 그의 다친 마음을 달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편, 레이는 동쪽 가즈덴 회중의 일원으로서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레이는 처음에 회중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집회와 야외 봉사에 참가했다. 그리고 2개월 후에는 장로로서의 추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 이 추천은 브루클린 본부의 승인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레이가 통치체를 사임한 통지가 「왕국 봉사」지의 지면에 다른 제명된 사람들과 함께 게재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 라는 것이었다. 이 조치와 1980년 후반에 몇회인가 「파수대」지에 나타난 협회의 제명자에 대한 새로운 강경 노선은, 이 지방의 첫 번째 회중에서조차, 레이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켜 갔다.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서 당시의 분위기는, 일종의 반동 체제와도 비슷했다. 각 회중 안에서 의혹과 공포가 지배해, 「배교자 사냥」의 분위기가 분위기를 살려 갔다. 이것은 「파수대」지의 당시 기사를 읽으면, 분명하게 통치체가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 안에 자아내려고 한 분위기였다.
레이 자신도 자신이 회중적인 활동 안에서, 더욱 더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집회에서 전달되는 많은 내용 중에 성서가 오용되어 조직의 자화자찬과 자기중심적인 말이 말해지는 것을 계속 듣는 것은, 레이에게는 고통이 되어 갔다. 레이는 자신이 왕국 회관의 「손님」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집회에서 해설할 때에도 , 될 수 있는 한 성서로부터 인용하여 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회중의 분위기는 험악한 조짐을 배어, 「배교자 사냥」의 기운은 익어가기 시작했다.
판결
레이가 앨라배마로 옮겨져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호와의 증인의 사회에서는 「마녀 재판」과 닮은 반동의 분위기가 더욱 더 높아지고 있었다. 1980년의 9월에는, 전전장에서 소개한, 새로운 배교의 정의, 즉 조직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배교가 된다고 하는 지시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배교자 찾기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 시기와 일치하게, 동쪽 가즈덴을 관할하는 순회 감독자로, 보다 강경한 방침을 지지하는 사람인 벤나가 임명되었다. 이 새로운 순회 감독자 벤나는 동쪽 가즈덴 회중의 방문에 즈음하여, 먼저 피터 그레거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레거슨이 「파수대」지의 기사에 공공연하게 반론하고 있다, 라고 하는 소문이 회중의 안팎에서 돌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벤나의 추궁이 곧바로 끝나지 않는 것을 안 그레거슨은, 사법위원회에 의해 조사를 받아 제명되는 것보다, 스스로 이탈 신고해 조직을 탈퇴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레거슨의 가족 전원과 그의 사업상 고용인중 몇 십 명이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가 제명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다수의 가족과 고용자에게 많은 폐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그레거슨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발적인 이탈을 한 사람은, 제명 처분을 받은 사람과 같은 엄격한 처우를 받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81년 3월, 피터 그레거슨은 회중에게 사퇴의 신고해, 이것은 큰 문제도 없게 받아들여졌다. 그 시점에서는, 그레거슨은 그대로 가즈덴의 마을에서, 그때까지와 같이 사회 활동이나, 가족, 친구, 고용인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1981년 9월 15일 20페이지 「파수대」지(영문) (한국어판 「 파수대」1981년 11월 15일 14페이지 「제명처분-어떻게 볼 것인가?」) 의 기사로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제명자 에게도 어느 정도의 온정적인 취급을 하는 것을 인정했던 지금까지의 1970년대의 태도로부터, 극단적인 강경 노선으로 방침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파수대」 기사에서는 제명자에 대해 철저하게 기피하도록 가르침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탈퇴한 사람도 제명자와 똑같이 취급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처음으로 내세워졌다. 이 기사가 발표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해, 레이에 대한 조사가 동쪽 가즈덴 회중의 장로에 의해 개시되었다. 그 「죄」는 레이가, 자발적으로 탈퇴했었던 피터 그레거슨과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회중의 장로로서, 피터 그레거슨의 남동생인 댄 그레거슨이 목격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처음에 레이에 대한 조사는 이, 장로 댄 그레거슨에 의해 행해졌다. 또 한사람의 장로와 둘이서 레이의 집을 방문한 댄은 먼저, 고린도 둘째 13:7-9를 읽으며, 그가 레이의 생각에 「조정」을 더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댄은 레이가 피터 그레거슨과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회식했던 것은, 9월 15일호 「파수대」 기사에 비추어볼 때, 단절된 사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정」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레이는 그에 대해서, 피터 그레거슨은 그의 지주이며 , 고용주라고 말했다. 덧붙여 레이는 댄에게, 탈퇴한 사람을 그처럼 엄격하게 취급하는 성경적 근거를 물었다. 댄은 고린도 첫째 5:11이 그 성서적 근거라고 했다. 레이는 그에 대해,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라고 하는 사람이 음행하는 자이거나 탐욕스러운 자이거나 우상 숭배자이거나 욕하는 자이거나 술 취하는 자이거나 강탈하는 자이거든 더는 사귀지 말고,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레이는 이것에 해당되는 사람과 교제했던 적도 없고, 피터 그레거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 대해서 댄은, 이번에는 요한 첫째 2:19를 채택해서, 이 성구가 근거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그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지만 우리의 부류에 들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부류에 들었다면, 우리와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라고 나와 있었다. 레이는 이 요한의 편지의 전후문맥을 본다면, 요한이 문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이며, 레이는 한번도 「적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반역한 사람을 사귀었던 적이 없으며, 피터 그레거슨은 그러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안심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후의 조사는 오로지, 레이가 조직의 가르침에 얼마나 충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맞춰졌다. 레이는 조직의 가르침이 분명히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면 , 그 가르침에는 따르지만 , 성서의 근거가 확실치 않은 가르침, 예를 들면 이 탈퇴한 사람에 대한 처우의 방법과 같은 가르침의 경우에는, 때와 경우에 따라서, 라고 대답했다. 댄은 그 다음에 하느님의 가르침에 겸허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레이에게 설득했다. 레이는 이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겸허함은 먼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모본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레이는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이야기로 그것을 나타냈다. 어떤 사람이 몇 개의 의견을 말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몇 가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진다고 했을 경우 , 다른 사람이 전적으로 그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 한 그 방으로부터 나가라고 명한다면, 그 태도는 겸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고 레이는 물었다. 댄의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 그런데도 제1차 조사는 평화롭게 종료됐다.
제2차 조사는 순회 감독자 벤나와 함께 진행됐다. 이 새로운 순회 감독자는 성급해서 자주 레이의 발언을 차단해 말하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레이는 이 조사받는 도중에 로마 14장을 다루어 사도 바울이 믿음에 근거한 양심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하느님의 승인을 얻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것은 죄이며,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모두 죄입니다.」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로마 14:23). 성서에는 「악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자와 의로운 자를 악하다고 선언하는 자-그 둘은 모두 여호와께 가증하다.」라고 써 있다 (잠언 17:15). 레이는 그래서, 악한 인간이 아닌 피터 그레거슨을 악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은 , 이 성서원칙에 근거해볼 때 자신의 양심상 할 수 없는 것이다 , 왜냐하면 피터 그레거슨에 관해 레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으로는 , 그가 악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레이는 말했다. 벤나는 이것에 대해 , 레이가 자신의 양심에 근거해 행동한다면, 회중의 장로들도, 스스로의 양심에 근거해 레이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양심에 근거한 「조치」는 있어도, 양심에 근거한 관용은 없었다. 그 조치란 , 통치체가 결정하여, 가장 최근호 「파수대」지에 게재된, 이탈한 사람과의 교제 금지의 규정인 것은 분명했다.
1981년 11월 1일 , 레이에 대한 사법위원회가 회중내에 정식으로 설치되어 레이의 처분이 심리 받게 되었다. 11월 5일, 레이는 통치체에 직접 편지를 써서, 「피터 그레거슨은 그의 주인이며 고용주이다. 60세에 이른 레이에게 있어서 그레거슨과 관계를 끊고 새로운 주거와 일자리를 찾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그레거슨의 초대를 받아서 그와 회식을 했다는 것이, 「파수대」지 9월 15일호의 기사에서 밝혀진, 이탈자를 기피 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따라 제명의 사유가 되는지, 그렇지 않으면 레이의 개인적 사정을 고려해 보다 유연한 처분이 내려져야할 것인가」라고 하는 요지의 질문을 보냈다. 그러나 사법위원회는, 이 편지에 대한 통치체로부터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 없이 심리를 개시하는 것을 레이에게 통고해 왔다. 3명의 사법위원회 장로의 이름으로 쓰여진 이 통고의 편지는 , 마치 재판소에의 출두명령과 같이 차가운 사무적인 편지였다. 거기에는, 생애를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바쳐 , 통치체 성원까지 맡은 조직의 형제에 대해서의 , 그리고 노령에 곤란한 생활 처지에 놓여져 있는 사람에 대해서의 , 사랑 있는 배려의 자세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비록 레이가 정말로 실수를 범했다고 해도 , 거기에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의 실수를 걱정해, 사랑을 가지고 이끌려고 하는 자세가 완전히 없었던 것이다.
레이는 이 통고에 대해, 11월 21일로 설정된 제1차 사법위원회는, 다른 주로부터 오는 손님 때문에 연기하고 싶다고 신청했다. 이 일자는 연기되었지만 , 위원회는 11월 25일을 최종 기한으로 해, 만약 그 날에 출두할 수 없으면, 레이의 결석 상태에서도 심리를 진행시킨다고 레이에게 통고했다. 레이는 그의 지금까지의 통치체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이 성급하게「판단을 서두르는」자세가, 실은 회중 장로회의 결단이 아니고 , 순회 감독자가 본부의 통치체와 밀접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결정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레이는 11월 25일의 위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
이전 , 피터 그레거슨의 또 한사람의 남동생으로, 장로이지만 사법위원회에는 참가하고 있지 않는 톰 그레거슨은 레이에게 시종일관 동정적이었다. 톰은 레이의 사법위원회에 동석 해, 레이의 변호를 할 수 있도록 신청해 두었다. 11월 25일 저녁 , 레이와 톰은 이미 3명의 사법위원이 기다리는 왕국 회관에 출두했다. 심리 위원들은 톰의 동석은 인정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톰은, 그레거슨집안 사업의 인사를 담당하고 있어, 레이는 그 고용인 중에 혼자서 왔으니까 심리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반론했지만, 이것도 인정받지 않았다. 레이는 결국 변호를 하는 사람도 없고, 세 명 위원의 심문을 혼자서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법위원회는 먼저 증인에 대한 심문부터 시작하였다. 최초로 댄 그레거슨이 증언 했다. 그는 레이가 피터 그레거슨과 웨스턴 스테이크 하우스 레스토랑에서, 양쪽 모두 자신의 아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 했다. 레이는 이것에 대해 그 일자를 물었다. 댄은 이것은 여름으로, 9월 15일의 「파수대」의 기사가 출판되기 전인 것을 인정했다. 레이는, 위원회가 이 기사를 과거에 거슬러 올라가 적용되는 법률이라고 믿지 않는 이상 댄의 증언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제2의 증인은 로버트 데일리라고 하는 회중 장로의 부인이었다. 데일리 부인도, 역시 레이 부부가 피터 그레거슨 부부와 같은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회식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 했지만, 이 일자는 9월 15일의 「파수대」지 발행의 후에 있었다. 레이는 이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레이는 반대로, 데일리 부부도 피터 그레거슨과 식사를 같이 한 사실을 지적했다. 피터가 있는 날, 모리슨 카페테리아에 식사하러 가 열에 줄섰을 때, 우연히 그는 데일리 부부의 곧 뒤로 줄섰던 것이었다. 데일리는 실은 피터 그레거슨의 아버지가 죽은 후, 피터의 어머니와 재혼한 적이 있기에, 과거에 피터 그레거슨의 의붓아버지에 해당되고 있었다. 그런 관계 때문에 , 피터와 데일리 부부는 그 카페테리아에서 테이블을 같이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데일리 부인은 이 회식이 9월 15일 이후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데일리 부인은 과연 어질렀지만, 곧바로 그녀는, 이것은 벌써 다른 자매에게 보고를 하였고, 자신이 했던 것은 실수이며, 두 번 다시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자기변호에 급급했다. 그러나 레이는 나중에 피터 그레거슨으로부터, 그 후에도 데일리 부부와 같은 카페테리아에서 테이블을 함께 했던 적이 있다는 것, 게다가 그것은 데일리 부부가 피터를 불러 낸 경우였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증인 심문이 끝난 후, 심리 위원장 테오티스 프렌치는 레이의 「파수대」지 9월 15일호의 기사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레이는 11월 5일에 통치체에 질문장을 보내고 있어 그 반응을 기다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프렌치는 「파수대」지만이 우리의 필요로 하는 권위라고 말했다. 레이는, 만약 통치체가 직접적으로 이 건에 관해서 지시해 주면 보다 더 확실하지 않은지, 라고 물었다. 이것에 대해 프렌치는 처음으로, 사법위원회가 브루클린 본부와 밀접하게 연락을 하면서 심리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피고」에 해당되는 레이에게 이러한 중요한 심리의 경과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레이에게 있어서 놀라움은 아니었다. 벌써 브루클린 본부에서의 전년의 대규모 제명처분의 폭풍우속에서도, 피의자의 알 권리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던 것을, 레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리 위원장 프렌치는, 본부는 이 9월 15일의 기사에 굳이 덧붙일 것은 없다고 말했다고 레이에게 알렸다. 다른 성원도, 그들은 모두 「파수대」지가 가르치는 곳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에 대해, 레이는 성서에 근거한 논의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 새로운 「파수대」지의 가르침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요구했다. 레이는 성서가 자신의 유일한 지침이라고 말했다.
사법위원 존슨은 고린도 첫째 5장의 몇 개의 마디를 읽어냈지만, 그 읽는 법에는 망설임을 숨길 수 없었고, 곧바로 그는 읽는 것을 그만두어 버렸다. 그는 그 성구와 이 그레거슨과의 회식사건과의 관련성을 논할 수 없었다. 레이는 한 사람 한사람의 위원에 게, 피터 그레거슨이 이 고린도 첫째 5장에 써 있는 것 같은 인간이며, 요한 첫째에 써 있는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 인간이라고 믿는지 어떤지를 물었다. 프렌치 위원장은 이 레이의 질문에 대해 흥분하는 기색이 되어 반론해 왔다. 그는, 사법위원은 이 그레거슨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레이에게 말했다. 레이는, 그러면 사법위원도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레이가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어, 그 판단에 의해 그가 평가받는 것은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프렌치는 「프랜즈 형제, 우리는 당신이 가르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닙니다.」라고 레이에게 말했다. 레이는 이에 대해, 그는 사법위원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며, 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전체가 재판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권리가 허용되는 것은 아닌지, 라고 말했다. 레이가 피터 그레거슨이라고 하는 사람과 식사를 했다는 죄를 재판하려 하고 있는데, 어떤 성원도 , 피터 그레거슨이 성서적인 견해로 볼 때 어떠한 인간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일주일간 후에 레이의 제명 처분의 통지는 초래되었다. 그에게는 일주일간의 상소 기간이 인정되었다. 레이는 상소의 긴 편지를 썼다. 그것은 레이가 상소에 의해 이 처분의 결정을 뒤집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성서에 근거한 그가 믿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이것이 그 편지의 목적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부터, 어떠한 사법위원회여도, 성서에 근거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먼저 없을 것이다 것을 레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레이는 그 편지 중(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마 피터 그레거슨과 식사를 했던 것에 대해, 제가 회개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여러분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회개하기 전에, 나는 먼저 자신이 했던 것이 하느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확신은, 영감을 받고 틀림없이 신뢰를 둘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디모데 둘째 3:16, 17) 나의 성서에 대한 이해로는, 하느님과 그 말씀에 대한 충성은 최고의 것이며, 다른 모든 일에 대한 충성을 초월 하는 것입니다 (사도 4:19, 20;5:29). 그리고 나도, 어떤 사람도, 그리고 어떤 인간의 그룹도, 하느님의 말씀에 덧붙여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말쟁이」라고 불려 재앙이 더해지게 된다는 것을, 나는 성서를 통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잠언 30:5, 6;계시 22:18, 19) 나는 그러한 성서의 경고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성서의, 타인을 재판하는 일에 대한 모든 경고를 고려하면, 나는 자신을 (혹은 어떠한 인간도 , 인간의 그룹도 ) 입법자로 하는 것에는 건전한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판단은, 하느님의 말씀에만 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하려면 먼저, 내가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에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내가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기준은, 하느님의 기준과 같이 보이면서 실은 영감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지지받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표명하신 말씀에 의해 심판받지는 않은 사람에 대해서, 제멋대로인 추측과 건방짐으로 판단을 내리는 죄를 범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 14:4, 10-12;야고보 4:11, 12;「야고보서 주해」161-168페이지 참조)
만약 여러분이 성서로부터, 피터 그레거슨과 식사를 했던 것이 죄라는 것을 제시하여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겸허하게 하느님 앞에서 나의 죄를 회개할 것을 약속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곳, 나의 심문에 해당된 분들은 , 이 성서에 기초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위에 말한 잡지로부터의 인용만을 「권위」(심리 위원장이 사용한 말) 로서 내세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 회중내의 권위는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유래해, 하느님의 말씀에 굳건하게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해합니다. 잠언 17:15에는 「악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자와 의로운 자를 악하다고 선언하는 자-그 둘은 모두 여호와께 가증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꺼리시는 일을 할 계획이 전혀 없으며, 따라서 이 일을 매우 염려하고 있습니다.
레이가 이 상소의 편지를 제출한 7일 후, 상소 위원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프렌치를 통해 전해 들었다. 3명의 위원이 순회 감독자에 의해 새롭게 선택되었지만 , 이 3명의 장로는 모두 피터 그레거슨을 잘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다. 한 명은 이전의 사법위원회에서 젊은 여호와의 증인의 문제가 심리되었을 때에 , 그 지나친 방식 때문에 피터 그레거슨에 의해 비판받은 사람이며 , 다른 두 명은 , 그 아들이 그레거슨의 딸과 이혼한지 얼마 안 된 가족의 사람들이었다. 레이에 있어 이 상소 위원의 선택은, 그와 피터 그레거슨에 대한 불리한 결정을 의도한 것으로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레이가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될 리가 없었다. 레이는 즉시 위원 전원의 교체를 청원 했다. 레이의 상소 위원회는 12월 28일로 설정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뉴욕본부로부터는, 이전에 레이가 통치체 앞으로 보낸 11월 5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레이는 그 후 2회 더 편지를 써서, 어떠한 회답을 청원 했다. 그러나 , 브루클린본부의 통치체와 봉사 위원회는, 레이에 대한 사법위원회와는 밀접한 연락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레이가 3회에 걸쳐 보낸 「파수대」9월 15일호 기사에 관해 질문한 편지를 완전하게 무시했다. 통치체는, 회답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을 불리하게 한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질문의 편지를 무시한다는 것을 레이도 알고 있었다. 레이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원칙에 굳건하게 고착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조직의 지도부가 실시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에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협회 지도부의 본성을 분명히 볼 수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레이는 더 이상의 상소를 하는 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알고서, 상소를 취하할 결의를 했다. 그는 원래 , 상소에 의해 상황이 격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로부터 봐서, 장로회와 본부 통치체는 레이를 제명하는 굳건한 결의의 바탕으로, 온갖 레이에게 있어 불리한 방법을 통해서, 그를 반드시 제명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아마 이 피터 그레거슨과의 회식의 죄가 제명처분 하는데 충분하지 않더라도 , 그들은 어느 쪽 , 다른 사건을 채택해서, 레이의 제명을 요구해 올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상소 위원의 교체에 의해, 혹시 상소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는 것을 염려한 프렌치는, 다른 여호와의 증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레이가 조직을 비판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을 누군가 들은 기억이 없는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레이는 이것을 다른 여호와의 증인 중 프렌치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부인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어디에도 레이의 죄를 목격했다고 자발적으로 신청한 사람이 없을 때에 , 죄의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를 사람들의 기억 중에서 파헤쳐 찾아다니는 이런 태도는, 이미 상식을 넘고 있어 레이는 더 이상 이러한 부조리한 취급을 참을 수 없었다.
상소를 취하하는 편지내용 중에서, 레이는 갈라디아 6:17의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의 종의 낙인을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인용해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 그는 상소를 취하하는 것이, 자신의 죄를 인정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제명처분이 정당하여 성서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한 후에, 고린도 첫째 4:3, 4에 있는 사도 바울이 한 다음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여러분에 의해서나 인간 법정에 의해서 판단 받는 것이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나도 나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거스르는 것을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것으로 의롭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레이는 이 일련의 경험 가운데에, 하느님의 말씀의 올바름에 대한 그의 신뢰는 더욱 더 강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동포인 여호와의 증인과의 결별에 즈음하여, 레이의 선의의 마음과 하느님에의 소원은 동포의 여호와의 증인 편에 있는 것, 1938년 이래 그는 전력을 다해 여호와의 증인 형제들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쳐 온 것, 만약 그의 중재가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이 정말로 여호와의 증인의 형제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뻐해 계속하고 싶다는 것으로 로마 9:1-3 「나는 내 형제들, 곧 육체를 따라 된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에게서 갈라져도 좋습니다.」를 인용하면서, 이 편지를 맺고 있다.
1981년 12월 31일, 레이몬드 프랜즈의 제명 처분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일자는 기이하게도 그의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정확히 43년째 되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1939년 1월 1일에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공식적 죄명은, 조직을 탈퇴한 사람과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했다는, 단지 그 일 뿐이었다.
첫댓글 모두들 미쳤습니다. 여호와의증인조직만이 구원의 유일한 통로라는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희생을 강요하는지 보여준 생생한 경험담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를 중상 모략하는 놈들의 그 한 마디, 한 마디를....그런 소리가 들려올때 마다, 기쁩니다. 제가 거짓종교에서 벗어났다는 확증이기 때문이죠.
ㅎㅎ 원래 잘난 사람은 박해를 받아요. 아벨, 예수가 대표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