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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슬라브 행진곡 작품 31' Tchaikovsky 'March Slave Op.31'
지휘 : 에리히 쿤젤(Erich Kunzel) 연주 :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Cincinnati Pops Orchestra) 녹음 : 텔락(TELARC), 2001 참고 : 이 곡을 파란에 있는 제 블로그에 올리면서 업로드제한으로 아쉽지만 부득이 용량을 조금 줄여 비트전송률을 128kbps로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제목은 세르비아러시아행진곡(Serbo-Russian March)이다. 러시아음악협회로부터 세르비아투르크전쟁의 부상병을 위한 자선연주회용으로 의뢰를 받아 1876년에 작곡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의뢰받은 후 5일 만에 곡을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i Rubinstein)의 지휘로 초연되어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전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무거운 멜로디(장송행진곡)로 시작되는 이 곡은 세르비아의 민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민속가락이 러시아 국가 《신이 차르를 구원하신다》와 다른 선율들에 배합되어 있다.
세르비아투르크전쟁(Serbo-Turkish War)
187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투르크와 싸운 전쟁.
1875년 6월 헤르체고비나와 보스니아의 그리스도교 주민들이 투르크의 박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반란 세력을 원조하여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결과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패배였고, 이 과정에서 발칸 위기가 고조되어 1877~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분쟁이 해결됨으로써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투르크에서 독립하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1875년 7월에 헤르체고비나의 그리스도교도 농민들이 이슬람교도 영주들과 오스만 투르크 지배자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삽시간에 보스니아로 확대되고 당시 오스만 투르크 내 자치공국이던 세르비아에서 열광적인 대중적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분쟁을 중재하려던 유럽 열강들의 노력이 실패한 뒤, 세르비아의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와 몬테네그로의 니콜라 공(公)은 대중의 압력에 굴복해 1876년 6월 30일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르비아의 군사력은 극히 미미했다. 러시아 장군 한 사람이 세르비아군을 지휘했으며, 러시아로부터 의용군과 재정 원조를 받기는 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기대했던 군사 지원을 즉각적으로 제공하지는 않았다. 보스니아를 침입하려던 세르비아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유일한 동맹국인 몬테네그로가 헤르체고비나에서 승리를 거듭하는 동안 세르비아는 알렉시나크 전투(1876. 9. 1)에서 패했고, 이어서 베오그라드로 진격하는 투르크군과 대전하게 되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러시아가 투르크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정전 압력을 가했다(1876. 10. 31).
그러나 뒤이은 국제교섭에서 타협안이 나오지 않자 세르비아와 투르크는 1877년 3월 1일에 현상유지를 내용으로 하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투르크에게 그리스도교도 주민을 위한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새로이 전쟁을 선포했다(1877. 4). 12월에 세르비아도 투르크에 대해 전쟁을 재개했다.
1877~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종결시킨 베를린 조약에 의해 세르비아는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 남동부 변경지역에 1만 360㎢의 영토를 얻어냈다. 그러나 세르비아-투르크 전쟁과 관련 협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세르비아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저버렸다고 생각한 러시아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결국 그 전쟁 후에 세르비아는 동맹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바꾸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한 1878년 이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 '슬라브 행진곡 작품 31' - 에리히 쿤젤,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