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지만, 나의 아마추어적 견해로는 역사를 인간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다. 다만 그 변화가 매우 더디거나 혹은 돌연적일 뿐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는 존재다. 현재의 인간은 시간적 변화의 산물이며, 역사학은 바로 변화하는 인간을 해명하는 학문이다.
시간 속의 인간을 읽는 코드는 무수한 복수다. 나는 학위 과정 중이던 시절 교보문고 뒤 피맛골의 싸구려 술집에 앉아 소주를 입에 털어넣으면서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술집이 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조직폭력배가 등판 가득 용 문신을 새기고 굴비두름처럼 엮여 경찰서 책상 앞에 머리를 박고 있는 TV 뉴스를 보면서 조선시대의 조직폭력배를 떠올렸다. 성매매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는 조선시대 남녀의 성의식과 성적 행동, 연애방법 따위의 한심한 주제를 상상했다. 사기도박으로 잡힌 도박꾼들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투전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생각한 것들은 모두가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이야말로 내가 알고 싶었던 과거 인간들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코드들이 거대한 이야기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큰 이야기에 가려진 조선시대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된다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다.
수만 백성 살린 이름 없는 명의들 - 민중의
조선 초기의 복잡한 의료기관은 성종 대의 『경국대전』에서 체계적으로 정비된다. 궁중에는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내의원(內醫院)과 대궐 내에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거나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이 있었지만 이것은 왕과 왕비, 세자 등 왕실가족이나 고위관료들만을 위한 곳이었다. 일반 백성을 위한 곳은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가 있다. 두 기관은 약간 차이가 있다. 혜민서가 주로 일반 백성의 질병을 담당하는 관청이라면, 활인서는 주로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 때 임시로 병막(病幕)을 지어 환자의 간호를 담당했다. 환자가 죽으면 묻어주는 일도 활인서의 몫이었다. 하지만 서울에 있던 의료기관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지방에 거주하는 민중들은 그나마 이런 의료혜택에서도 제외되었다. 더욱이 의학서적은 한문으로 쓰여 있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민중이 어떻게 질병과 싸워나갔는가 하는 문제는, 의료기관과 의학서적의 발달과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민중을 위해 의료활동을 펼쳤던 민중의(民衆醫)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래교가 지은 『백태의전(白太醫傳)』에는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의원, 백광현이 나온다. 백광현은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馬醫)였는데 오로지 침을 써서 말의 병을 고쳤고, 의서는 보지 않았다.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도 드물고 병 취급도 하지 않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 심지어 조선 전기에는 종기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까지 있었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 장면을 보자.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있는 종기는 옛 처방에 치료법이 없었다. 광현은 그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종기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사납게 써서 간혹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효험을 보아 살아난 사람이 또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렸다. 광현 역시 자신의 의술을 자부하여 환자 치료에 더욱 힘을 쏟았고,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쳐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정래교는 이처럼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의 신기원을 연 것이다. 태의는 곧 어의를 일컫는 말인데, 민간의 무면허 의사 백광현이 어떻게 내의관 의원이 되었는지 과정은 분명치 않다. 의과방목(醫科榜目 : 의과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의약동참(醫藥同參 : 사대부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의술만 좋으면 모두 보임될 수 있었던 제도)의 길을 밟은 듯하다. 그는 현종 때 내의원이 되어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 마침내는 현감이 되었는데, 귀한 몸이 된 후에도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했다면, 고약으로 유명한 종의(腫醫)도 있다. 홍양호가 남긴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을 보면 피재길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정조 17년 정조의 머리에 종기가 났는데 침과 약을 써도 아무 소용없었다. 방치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때 정조에게 누군가 피재길의 이름을 아뢴다. 피재길은 원래 의원 가문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지 못했고 의서는 아예 읽은 적이 없었다. 그가 어렵사리 의원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 생전에 보고 들었던 '고약' 만드는 처방을 그에게 가르쳐준 덕분이었다. 그는 오만 가지 종기에 듣는 고약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근본이 없는 의원인 탓에, 의원이란 소리도 할 수가 없었으나 고약은 잘 들었다. 정조는 피재길을 불렀고 약장수 피재길은 웅담을 주재료로 고약을 만들어 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웅담고인데, 사흘이 지나 정조가 깨끗이 낫자, 왕은 그를 내의원 침의(鍼醫)에 차정하고 6품의 품계를 내렸다.
종기가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가 전염병의 삼두체제를 구축하였다. 전염병의 발생 원인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알려지게 되었니 그 전에는 발본적 치료법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전염병이 돌면 정부는 가장 먼저 여제(?祭)를 지냈다. 그리고 국가의 의료기관인 내의원?전의감?혜민서에서 약재를 공급하는가 하면, 병막을 짓고 병자를 모아 간호했다. 이따금 전염병이 돌았던 곳에 세금을 감면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은 없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전염병 구제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었다. 정조 15년과 16년 사이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을 때 황해도 재령의 김경엽이란 사람이 매번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거의 1천 명이나 치료해주었다고 하여 특별히 표창을 받았다(『정조실록』 16년 2월 28일). 전염병이 돌고 나면 의원에 관한 전설이 생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의 마음은 약해지기 마련이고 그 허약해진 심리의 대지에서 우연과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싹튼다. 난치병과 불치병을 격퇴하는 명의의 전설은 이래서 시작된다.
투전 노름에 날새는 줄 몰랐다 - 도박
도박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 역사와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도박의 유행 정도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손에서 입으로 바로 가져가는 낮은 생산력의 사회에서 도박이 성행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높은 생산력이 도박을 성행케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도박이 성행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후진 사회에서도 도박은 성행할 수 있다. 이래서 둘째 조건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도박이 성행하기 어렵다. 도박은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성행한다.
조선 후기에는 투전?골패?쌍륙 같은 도박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투전이다. 투전은 중국의 마조(馬弔)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마조는 원대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 고금의 인물을 품제(등급을 매김)한 120장으로 된 놀음이고 이것을 간략화한 것이 투전이다. 투전은 80장(혹 60장짜리도 있다)의 종이쪽지로 구성되는데, 폭은 손가락 굵기만 하고, 길이는 15센티미터 정도이다. 투전은 사용되는 투전목이나 참가 인원 또는 내용에 따라 ‘돌려대기’, ‘동동이’, ‘가구’, ‘우등뽑기’ 따위로 나뉘었다.
강이천이 18세기 후반 서울의 풍속을 상세히 묘사한 106수의 한시 「한경사(漢京詞)」를 남겼는데, 여기에 도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앞의 시는 투전판의 모습을, 뒤의 시는 골패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길게 자른 종이에 날아갈 듯 꽃 모양 그려 둘러친 장막 속에 밤도 낮도 모를레라 판맛을 거듭 보자 어느새 고수되어 한마디 말도 없이 천금을 던지누나
네 사람 마주앉아 도박판을 열고서 골패 여덟 짝 나누어 쥐었네 그 중 한 놈 좌중 향해 제 끗발 자랑하며 1전으로 10전을 한꺼번에 따오네
도박의 성행과 함께 당시 도박장에서는 오늘날 전문 도박꾼들의 내기 도박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행태가 벌어졌다. 도박장을 개설하여 고리로 이자를 놓거나 자릿세를 뜯는 자들까지 나왔다. 사기도박도 있었다. 왈자, 협객 등이 도박장을 장악하였는데, 이들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깡패다. 그러나 단순하게 왈자와 깡패를 등치시킬 수는 없다. 왈자는 도박에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부류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예술적 취향도 겸비한 중간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이 어떻게 유흥계와 도박판을 장악하게 되었을까? 투전을 수입해온 인물, 장현을 예로 들어보자. 장현은 역관가문의 인물로 그 역시 역관으로서 대단한 치부를 했으며, 또 장희빈의 당숙인 관계로 한때 상당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중인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사회적 가치인 고급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중인들의 경우 양반에 필적하는 때로는 양반을 능가하는 경제력과 문화적 역량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훨씬 강렬했다. 이들의 경제적?지적?문화적 에너지는 정치적 출구를 찾자 못한 채 다분히 소비적인 데로 흐르게 된다. 투전이 시정공간의 오락에 머물렀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나 투전의 가공할 위력은 수입된 지 1백 년이 채 못 되어 양반층까지 전면적으로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조선사회가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투전의 유행은 거대한 사회문제, 곧 병리적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투전빚은 결코 잊혀지는 법이 없었다. 야차처럼 끝까지 사람을 따라다니며 개인과 가문을 결딴냈다. 도박의 유행을 막기 위한 금령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 거리의 점포에서는 투전?쌍륙 등의 도박 도구가 일상용품으로 공공연히 팔리고 있었다.
도박의 성행은 조선 후기 사회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 경제성장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농업의 생산량 증가 등으로 부의 축적이 가능해졌고 이것은 소비생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했다. 도박의 성행은 이러한 소비 수준 향상에 근거한 것이다. 화폐의 유통 역시 도박 성행에 큰 몫을 하였다. 화폐는 도박에서 거래되는 모든 물질적 가치를 단일한 단위로 환원하였는데, 이는 도박의 실행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편리를 제공하였다.
18세기 이후의 잦은 정변과 이인좌의 난과 같은 봉건권력층 내부의 반란, 그리고 장길산으로 대표되는 군도의 횡행, 전에 없던 전염병(장티푸스, 콜레라)의 유행, 과도한 수탈, 민란, 홍경래의 난 등으로 사회적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불확실성에 운명을 맡기는 도박의 세계관은 조선 후기 사회의 불확실성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도박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도박의 원리는 조선 후기 사람들의 의식과 경제활동 전반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타락과 부정으로 얼룩진 양반들의 잔치 - 과거
과거는 양반사회 내부의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마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거도 하나의 시험이니 ‘부정’이 당연히 존재했다. 응시자 혼자 책을 베끼거나, 출제자?채점자와 공모하거나, 서리를 매수하거나, 첨단기술을 사용하거나, 특정 정파가 자파 세력에게 의도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거나, 친인척을 뽑거나 하는 일들로 인해 시비가 일어났으며, 부정의 흔적이 없는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지 않은 일상화된 부정, 곧 이미 관례가 되고 풍속이 된 부정이다.
과장(科場)은 지금의 시험장과 달리 번호가 매겨진 좌석이 없었으므로, 과장에 들어서면 좋은 자리를 잡아야 했다. 좋은 자리란 시험문제를 빨리 볼 수 있는 곳,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곳이 으뜸이다. 이 좋은 자리를 확보하려면 남보다 먼저 입장해야 하는 바, 이때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자리 잡기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응시자 때문이었다. 정조 24년 3월 21일 경과의 정시(庭試) 초시(初試)에 응시한 수는 11만 1,838명이었고 이튿날인 3월 22일 열린 인일제에는 응시자가 10만 3,579명으로 이틀에 걸쳐 21만 명 이상의 거자가 시험을 치뤘다. 영조 15년 알성시에 응시한 거자가 1만7천 명~1만8천 명이었으니, 정조 24년까지 61년 동안 과거 응시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30만 사이였다고 생각해보면, 각 과거에는 서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이 몰려든 셈이다.
하지만 시험장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답안지를 작성해서 내는 것은 아니었다. 시험장에는 거자뿐만 아니라 힘센 무인과 심부름하는 노비들까지 들어왔다. 여기에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왔다니,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시험문제가 현제판에 내걸리면 본격적으로 부정이 시작된다. 시험장에 예상 답안지와 참고서적 등을 넣은 ‘행담(싸리나 버들로 만든 작은 상자)’을 갖고 들어간다. 전문적으로 과거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거벽(巨擘)’,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수(寫手)’도 있었다. 거벽과 사수의 손으로 답안지를 작성하면 그 다음 순서는 답안지를 빨리 내려고 경쟁을 벌인다. 일찍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들 중에서 합격자가 나오자, 거자들은 답안지의 서두만 대충 써서 일찍 제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될 때까지 과거는 타락에 타락을 거듭했다. 18세기경에 오면 과거는 이미 인재선발 기능을 상실했는데, 이 과정은 벌열(閥閱)의 형성, 노론 일당 독재, 세도정권 성립과 일치한다.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권력의 중심에 드는 가문은 열 개, 넓게 잡아 스무 개가문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들의 권력 독점이 과거의 모순에 기초하고 있었으니, 과거의 폐해가 바로잡힐 리 없었다. 이런 권력 독점은 자연 권력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좌절시켰다.
서울의 게토,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 지대 - 반촌
조선 정부에서는 법령을 정해 금지할 정도로 소 도살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고, 이 실천도 강력하여 태종 11년에는 전문으로 소를 도살하는 신백정(新白丁)을 도성 90리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그러나 쇠고기 식용 금지는 결코 지켜질 수 없는 법이었다. 서울은 조선 최대의 인구밀집 도시이고 생활수준도 가장 높았으니, 당연히 음식과 요리의 수준도 다른 곳과 비할 바가 못 된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서울의 쇠고기 소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계를 내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백 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饋 :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部) 안의 24개 푸줏간, 3백 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였는데 이 중 쇠고기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가늠해보면, 서울 시내에 있었다는 24개의 정육점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이 정육점을 ‘현방(懸房)’이라고 했는데 이 허가는 자유롭지 않았다. 이는 현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에는 “모두 반민(泮民)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삼게 한다.”는 말이 있다.
반민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성균관은 반궁(泮宮)이라 불렸는데, 성균관과 관련된 곳에 흔히 ‘반(泮)’ 자를 붙여 성균관 주위의 마을을 ‘반촌(泮村)’, 그곳의 주민을 반민 혹은 반인(泮人)이라 불렀다. 반촌은 적어도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구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대사성(大司成) 이하 관료조직과 교수진 그리고 유생들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위해 자질구레한 노역(주로 육체노동)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다. 반인들은 바로 이 성균관의 잡역을 세습적으로 맡아보는 사람들이었다. 조심스럽게 추정하면, 반촌민의 도살을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부터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에 쇠고기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이 때문에 반촌민들에게 소의 도살을 허락했던 것 같다.
반촌은 그 범위가 정확하게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 구획은 단순한 행정구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촌민이 아니면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 특별구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의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만은 들어가 조사할 수 없었다. 금란이란 조선이 5백 년 동안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던 소나무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釀造) 금지를 가리킨다. 이를 어긴 범인이 반촌에 숨어버리면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했다. 반촌이 이렇게 독특한 구역이 된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포교가 들어갈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묘, 곧 대성전이란 성화(聖化)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반촌민은 분명 백정은 아니었지만, 소의 도살과 판매에 관계하는 이상 천대받았다. 사실상 이로 인해 반촌민은 반촌 바깥 사람들과 친교?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반촌은 사실상 게토(ghetto : 옛날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역,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일컫기도 한다)였던 것이다.
이러한 게토화로 반촌민들은 독특한 에토스(ethos)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윤기의 「반궁잡영」에는 이런 주석이 있다.
반인은 원래 송도(개성)에서 이사해 온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말씨와 곡성은 송도 사람들과 같다. 남자들의 의복은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예사 사람과 다르다. 기절을 숭상하고 협기가 있어,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왕왕 싸움이 일어나면, 칼로 가슴을 긋고 허벅지를 찌른다. 풍습이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대적 교육제도가 시행되자 성균관은 옛날의 위상을 잃고 중세의 유물이 되었다. 성균관이 무너지자 반촌도 따라서 해체되었으며,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반촌 사람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차별 역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1920년대 신문기사에 의하면, 반인들은 여전히 소의 도살과 쇠고기 판매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과 싸우기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1910년 보통학교 과정의 사립 숭정학교를 세워 반촌의 아동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해온 사회적 차별을 생각해 쇠고기 판매 금액의 일부를 내놓아 학교 재정을 충당했으며, 지방에 이사해 살더라도 숭정학교를 위한 헌금은 우편으로 부칠 만큼 열성이었다고 한다.
신분제가 사라진 이 시대에 반촌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의미가 없겠는가.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돈과 권력, 학벌, 출신지로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여전하다.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라 사는 곳 역시 경계가 지어진다. 지금도 서울 시내에는 반촌과 같은 게토가 존재한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뒤흔든 무뢰배들 - 검계와 왈자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민정중이 말하기를, “도하(都下)의 무뢰배가 검계를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습진(習陣)합니다. 시정이 이 때문에 더욱 소요하여 장래 대처하기 어려운 걱정이 외구(外寇)보다 심할 듯하니, 포청(捕廳)을 시켜 정탐하여 잡아서 원배(遠配)하거나 효시(梟示)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신여철에게 명하여 각별히 살펴 잡게 하였다. -「숙종실록」 10년 2월 12일
서울 시내의 무뢰배가 결성한 검계가 습진을 하여 서울 시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말이다. 습진이란 진법을 익히는 훈련이므로 군사훈련을 뜻한다. 정식 군사도 아닌 무뢰배 조직이 군사훈련을 하니 일반 시민들이 불안해 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도대체 이 기록에 등장하는 문제의 검계란 무엇인가? 영조 때 포도대장이었던 장붕익의 전기 「장대장전(張大將傳)」에 검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에는 오래 전부터 무뢰배들이 모인 것을 ‘검계’라 하였다. ‘계’란 우리 나라에서 사람이 모인 것을 이르는 말이다. 검계 사람은 옷을 벗어 몸에 칼을 찬 흔적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낮에는 낮잠을 자고 밤에는 나돌아다니는데, 안에는 비단옷을 받쳐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 혹은 스스로 칭하기를 ‘왈자’라고 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 쓰는 재물은 전부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다. 양가 부녀자들이 겁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대개가 호가(豪家)의 자식들이어서 오랫동안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검계와 왈자는 일치하는가?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검계는 왈자에 포함된 부분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검계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왈자들이지만, 모든 왈자가 검계는 아닌 것이다. 왈자와 검계는 폭력성을 공유하지만 그 폭력의 방향이 반사회적인 방향, 곧 강간?강도 등의 행위로 향할 때 검계가 된다. 물론 그들이 조직화할 때만.
「서광문자전후」를 비롯해서 왈자를 언급한 자료들은 왈자가 대체로 부유한 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왈자들은 돈이 풍부하여 무진장 써대는 그런 속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돈 쓸 곳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치와 낭비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과 상품 따위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기녀들은 국가에 복역하는 한편 시정에 기방을 열고 자신들의 예능과 성적 서비스를 팔았는데, 이 기방을 장악한 이들이 바로 왈자들이다. 이들은 기방의 운영자인 동시에 고객이었다. 기방은 생산 공간이 아니라 유흥공간, 곧 놀고 마시는 곳이었다. 왈자들의 소업은 오로지 ‘노는 것’뿐이다. 노는 것에서 도박을 빼놓을 수 없다. 「장대장전」에서도 왈자에 대해 “도박장과 창가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왈자에게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왈자는 조선 후기 민간예능의 주 향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왈자들은 <신선가(神仙歌)>, <춘면곡(春眠曲)>, <어부가(漁父歌)> 등 민간 가요의 주 향유자였다. 실제 왈자들은 노래명창 ‘황사진’, 가사명창 ‘백운학’ 등 연예인을 지배하고 있기도 했다. <한양가(漢陽歌)>에 묘사된 ‘승전(承傳) 놀음’을 보면, 왈자의 한 부류인 대전별감이 서울의 기생은 물론 금객?가객 등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 있다. 왈자들은 연예인의 예능을 소비하는 주체였으며, 돈 이외에도 그들을 불러올릴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왈자와 검계는 주로 먹고 마시고 노는 데 골몰하던 부류다. 조선 후기 시정공간을 북적대게 만든 이들은 대개 중간계층을 모집단으로 하고 있다. 당시 사회체제에서 과거를 통해 고급관료가 되거나 학문을 하여 명예를 누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 부를 축적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들이 유흥으로 빠진 것은 거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조선은 조용한 아침이란 이미지와는 결코 맞지 않는 나라였다. 검계가 살인과 강도를 저지르고 왈자가 술집과 기방과 도박판에서 왁자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곳이었다. 조용하긴 뭐가 조용하단 말인가. * 이선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15 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