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22 중등교육의 시작(아이찌)
(글 황리애)
- 58년, <쿠로가와 학교> 의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는 학생들-
5번의 이전을 거쳐 현대적인 교사로
아이찌현에서는 해방후부터 1947년까지 동안에 32개의 국어강습소와 초등교육의 장이 생겨났고, 아동·학생수는 약 4,800명에 달했다. 그후 중등교육에의 요망이 높아져 48년에 <츄부(中部)조선중학교>가 창립된다. 아이찌에서 중등교육을 둘러싼 상황과 민족교육을 지키고 발전시켜온 동포들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이전, 또 이전…
‘전쟁 기간에 소학교 1학년부터 고교 3학년 사이, 저는 12곳의 학교에 다녔다. 실로 1년에 한 번꼴이다. 이것만 보아도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이찌 중고 창립 60주년에 즈음해 발행된 책자 「아이찌 조선중고급학교 60년의 역사」에 실려있는 익명의 수기 일부이다.
현내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점재해 있었기 때문에 이전 횟수는 거주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이찌중고의 전신이 되는 <츄부 조선중학교>시절부터 헤아려도 5번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아이찌 조고 제1기생인 김종진(金宗鎭, 80세)씨도 현내를 전전하면서 민족교육을 받은 한 사람이다.
“9살 때에 해방을 맞았으니까요. 9살 여름, 처음으로 우리학교(조선학교)를 다녔죠. 지금 같으면 수업 참관 때에 보호자가 학교에 오잖아요? 그 때는 수업참관과 관계없이 학교를 보러 오는 동포들이 정말 많았어요. 손자를 보러 오거나, 자녀를 보러요.”
고학년 졸업이 가까워짐에 따라 진학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 때 현의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산하 단체가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던 <태양빌딩>(나고야시 누노이케 소재)4, 5층을 빌려서 48년 4월 20일에 자주학교로서 중학교가 개설된다. 기후(岐阜)나 미에(三重)에서도 학생이 모여들어 약 200명이 입학했다.
- 츄부(中部)조선중학교의 시작, <태양빌딩> -
49년 <학교 폐쇄령>에 의해 누노이케(布池)에 있던 학교가 접수되자 이듬해에는 토카이시(東海市)의 오타가와(太田川)로 교사가 이전되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교통비 부담이 컸던 탓으로 학생수는 약 30명까지 급감. 동포들이 의논한 끝에 나고야시 모리야마구(守山区)에 있는 모리야마 조선초급학교 교사를 얻는 형태로 51년에 다시 이전했다. 개교 당일에는 그때까지 입구에 철조망이 있었기 때문에 교원과 학생들은 그것을 자르고 부지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 김종진씨(좌), 누노이케학교 시절 교원과 학생들(우) -
교통편이 좋아졌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학생수가 단숨에 증가해 부족했던 책상과 학습도구는 주변 학교에서 원조 받거나 해서 운영되었다. 또 향후 학생수 증가가 예상되었기에 새교사 준공을 위한 모금운동이 현내 동포들에 의해 널리 전개되었다.
중학교 운영이 이렇게 이뤄지는 한편 고교 설립은 늦어졌다. 이 시기에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대부분이 취직을 하거나 몇몇만이 아이찌현을 벗어나 도쿄조선중고급학교로 진학했다. 김종진씨는 전임 활동가였던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도쿄조고로 진학했다.
- 재일본조선인연맹 名中지부 치쿠사(千種) 초등학원의 수업증서 -
탄압을 이겨낸 에너지
53년 4월 28일, 고등부가 병설된 학교가 나고야시 나카가와구(中川区)에 창립되어 <츄부(中部)조선중고등학교>가 된다. 준공식에는 3,000여명이나 되는 보호자, 동포들이 참가했다.
정희승(鄭禧昇, 77세)씨는 그 해에 고등부에 입학했지만, 제3기로 졸업한다.
“원래대로 라면 나도 1기생이 될텐데, 도쿄 조고로 가서 공부하고 있던 선배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1기생, 2기생이 됐어요.”
당시는 고교에 진학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다지 없었음에도 민족교육의 발전에 전력했던 아버지의 강한 권유로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선생님을 만났어요. 고2 때 선생님인데.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서 자신을 얼마나 드높일 것인가, 그런 자극과 매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등의 보는 눈을 가지도록 가르쳐 주셨죠. 선생님 자신이 인생에 꿈과 희망을 갖고 있어서 그 분의 모습을 통해 삶의 태도를 보여주셨던 거죠.”
학생들은 충실한 학업을 실현하는 한편으로 이후로 예정되어 있던 교사 이전을 위해 모금활동과 학교건설에도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 나고야(名古屋), 사카에(栄), 아츠타진구(熱田神宮) 등 역 앞에서 모금상자를 들고 다니며 몇 주 동안에 100만엔 이상을 모았다고 한다.
‘조선학교 건설을 위해 협력해달라며 매일 모아진 금액을 통계 냈죠. 자신이 모은 돈도 내놓았고, 모두가 어떻게든 새 학교를 위해 애를 썼어요.“(정씨)
56년 나고야시 기타구(北区) 쿠로가와(黒川)로 교사를 이전. 학교명은 <아이찌 조선중고급학교>로 개칭되었다. 나고야시에 사는 어느 동포는 나카가와에서 쿠로가와로 이전하는 시기의 광경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교사 이전에 맞춰 비품과 교육기자재 같은 것도 옮겨야 되잖아요. 돈이 어딨겠어요, 우리가. 학생들이 의자를 하나씩 들고 옮겼지요. 물론 칠판이나 큰 것들은 트럭을 빌려와 동포들이 협력해서 옮겨주었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자며 작은 빗자루와 의자를 들고 데모행진은 아니지만 줄지어 걸어갔어요. 걸어서 1시간 이상이나요.”
학구 밖에 사는 동포들과 보호자들도 하나가 되어 이전을 실현시켰다.
귀국사업이 활발해진 59년 이후는 입학 희망자가 쇄도했다. 학교에서는 급하게 판자 건물을 증축하기도 했는데, 60년에는 학생수가 1,300명을 넘어 수용이 곤란해졌다. 61년 토요아케시(豊明市)의 미나미 야카다(南館)에 새교사가 건설되어 이전했다. 5,500평의 토지에 2층 건물 교사로 교실은 31개다. 이 장소가 아이찌 중고의 현주소이다.
64년에는 3층 철근 건물 교사를 증축, 66년에는 학생수가 1,500명을 넘었다. 70년에는 더더욱 현대적인 새교사를 건설하자고 교사건설위원회를 결성. 3년후인 73년에 5층짜리 본관건물(현 교사), 기숙사, 체육관이 준공되었다.
“전후 아이찌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탄압이 있었어요. 그 속에서 거점을 전전하면서도 민족교육을 지켜왔던 것은 해방된 민족의 끓어오르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에너지가 탄압과 싸워 이겨나갈 힘이 됐죠. 흔히 초창기=고생의 역사라고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 낸 창조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초창기의 민족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김씨)
*월간 <이어> 1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