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를 시험해 그 정체를 드러낸 사실로 인해 부활하신 주님의 칭찬을 받았던 교회였다(계 2:2). 에베소 교회에는 말씀에 대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았던 성도들로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적 표상을 구현하며 현시하는 일에 최선으로 경주했던 교회였다.
그러나 2세대들로 구성된 당시 에베소 교회는 1세대들의 신앙적 유산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주님의 책망을 받는 교회로 전락했다.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돼야 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교회의 개혁의지의 여부는 일차적으로 말씀의 수종자로 세움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의 정체성 여부와 밀접하게 결부된다. 교회 속에 목회자란 은사자를 세우신 목적이 "성도를 (말씀으로)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기 때문이다(엡 4:10-12). 이런 관점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목회적 사명은 일차적으로 바른 계시관에 입각해 바른 신앙관과 바른 교회관을 정립하는 일에 집중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정체성 확립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다. 바른 목회자상의 구현을 위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자.
성경은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계시 의존적이 아닌 자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말씀을 빙자해 전달하는 것에 불과하다(겔 13:3-7, 렘 23:21-22). 에스겔은 본문에서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란 표현을 사용한다. 결국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란 지적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적용은 말씀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서 해석하지 않고, 사람의 귀를 간지럽게 해 주기 위해 철저히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씀을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이익의 재료로 삼아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한다는 데서 거짓 목자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지적이다.
둘째, 하나님의 소명이 아닌 자의적 소명관에 근거해 사역을 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본문(렘23:21-22)에서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한다”고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치 않았다는 의미는 ‘선지자의 말과 선지자의 파송’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의적인 것이란 사실의 강조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소명이 교회공동체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과정이 없이, 개인적인 체험과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동인으로 작용해 순전히 자의적으로 목회사역에 들어선 목회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교회 현장 속에 얼마나 많은 무(無)은사와 무(無)소명의 무자격 목회자가 난무하는지 모른다. 이런 결과는 말씀의 왜곡과 변질로 인해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가속화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는 일에 적극 일조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목회와 선교는 세속적인 비지니스가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교회의 합의에 따른 천상적 사역이다. 결코 사욕을 위해 이익의 재료로 이용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선한 목적을 빙자해 부당한 수단이 난무하는 영적 암매의 시대에 성경적인 바른 신앙/바른 교회/바른 목회 원리의 회복과 재정립이 어느 때보다 갈망된다.
첫댓글 저희 성도들은 목사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진리라고 믿고 따라가는 순진하고, 어린 양들입니다.
그러니 목사님의 잘못된 가르침은 많은 성도들을 일시에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 믿음의 길 위에서 끝도없이 방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하고 중한 사명을 맡으신 이 시대의 목사님들이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응하는 결단이 참으로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합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중하고 힘겨운 사명을 받으신 목사님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