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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선언
근대국가, 자본주의
독점은 시대를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확실한 기준점이다. 중앙정부와 지역토호들이 나누어 쥐고 있던 폭력을 중앙정부가 독점하여 탄생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근대국가다. 근대국가는 이렇게 독점한 폭력을 섬세하고 세련된 기법으로 구성하여 완성되었다. 폭력 그 자체는 국가가 완전 독점하고 집행한다. 이것이 공권력이다. 경제는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조직의 유지를 위해 산업을 소수의 대행자에게 소유권과 시행권을 나누어주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그 틀을 다듬었다. 이렇게 자본이 탄생했다. 그 외 많은 분야가 각종 제도를 통해 민간에게 시행권, 소유권 등을 위임하여 근대국가를 유지하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 교육은 국가가 별도의 집행기구를 두어 간접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이 별도의 집행기관이 학교다.
이렇게 형성된 자본은 커진 힘으로 국가가 독점한 모든 것들을 포섭하며 모체인 국가 자체를 위협하고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러 마침내 시스템을 관장하는 체제 이념으로까지 커졌다. 자본은 범위를 넓히며 덩치를 키워 국가를 대체해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다. 이제 자본주의는 가장 크고 중요한 국가독점폭력인 공권력까지 서서히 잠식하고 있으며 교육은 노동력을 공급하는 식민지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학교권력은 자본권력의 하수인으로 활약하며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첨병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독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든 모순과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독점구조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이를 와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근본을 건드리지 않고선 어떤 분야건 치료와 개선, 즉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다.
교육
교육은 한자로는 가르칠 敎와 기를 育을 쓴다. 맹자에서 유래한 이 말은 가르쳐서 기른다는 뜻이다. 영어는 education이다. 라틴어 educare에서 유래한 이 말은 ~로부터를 의미하는 ex라는 단어와 이끌다는 뜻을 가진 duco라는 단어로 구성된 것으로, 원래 있는 소질이나 능력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같은듯하지만 뜻을 곰곰 따져보면 상당히 다른데, 이 다름이 敎育을 하는 지역과 education을 하는 지역의 학교 풍경을 각각 결정지었다. 동양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의 학교와 서구의 학교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쉽게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현상은 상당히 다르지만 본질로 들어가면 두 용어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르쳐지고 키워지는 존재, 소질이나 능력을 구현당하는 존재가 학생, student란 점에서 두 용어는 같다. 이렇게 되면 가르치고 키우고 소질이나 능력을 끄집어내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 존재가 교사, teacher이며 이들이 모여 만나는 곳이 학교, school이다. 학생, student가 수동태란 점에서는 양자가 전혀 다름이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이 용어와 뜻은 과연 참일까? 이것이 참이라면 ‘교육’ 현장에서 무수히 들었던, 교육의 주체가 학생이라느니, 공부는 자율적으로 해야 한다느니 하는, 학생 스스로가 ‘교육’의 중심에 있다는 말들은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까?
무릇 움직이는 모든 어린 생명들은 존재하기 위한 생존기술을 어미에게서든 환경에게서든 배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과 힘이 곤충의 애벌레보다도 약하기에 많이, 그리고 오랜 기간을 배우는데 써야 할 뿐이다. 게다가 개미나 벌처럼 함께 사는 무리 생활을 해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무리 생활에 대한 기본 능력조차 없이 태어나기에 부모뿐 아니고 다른 성인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도 무수히 많다. 그래야 무사히 생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교육’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이다. 본능도 배워야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 어차피 성인이 되면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존재가 ‘교육’의 수동태라면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먹이를 구하는 일을 주체적으로 할 길이 난감해진다. ‘교육’이 더 정교해지면질수록 성인으로 독립하는 준비기간이 길어지고 심지어 독립 자체를 포기하는 현상이 흔해지는 것을 보면, 가장 큰 ‘교육’적 문제가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주체성, 자율성 박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의 근원이 ‘교육’이라는 용어에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교육’이라는 용어의 변경, 대체다. 그래야 ‘교육’이 바로 선다.
학교
교육을 시행하고 관장하는 권리를 독점한 곳을 우리는 학교라 부른다. 학교가 학교로 존재하려면 교육도 교육이라야 한다. 만약 교육을 다른 용어로 바꾸면 학교는 학교라는 용어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뀌거나 사라져야 한다. ‘교육을 독점한 교육권력기관’이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한 학교는 여전히 학교일 수밖에 없다. 독점권력(이것을 독재라 한다)을 스스로 내려놓은 예는 수만년 인류 역사에서 단 한 건도 없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 또한 교육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만큼 학교가 서 있는 땅이 단단하고 좁다. 학교로서는 현재의 교육에서 변신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교육이 문제고 학교가 문제니 학교를 바꾸고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방식도 바꾸자는 측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측의 갈등과 힘겨루기는 허무한 짓에 불과하다. 병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해결할 생각도 없이 환자를 다루는 방법을 두고 싸우는 것은 환자에게 할 짓이 못된다. 교육을 진정 근본으로 되돌리고 싶다면 학교가 사라져야 한다. 학교는 ‘교육’의 최적화를 목표로 탄생한 곳이다. 현재, 학교보다 더 ‘교육’을 더 잘 하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학교는 사실, 문제가 전혀 없다. 왕따 현상을 필연으로 불러오는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에 이 문제 해소를 요구하는 것은 허무하기조차 하다. 경쟁과 낙오로 인한 일탈과 무기력과 심하게는 자살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배려없고 버릇없고 존중없는 생활태도 역시 교육 속에 그 씨앗이 있지 학교가 그 문제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 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는 근대의 룰과 ‘교육’에 충실하다. 된장찌개를 먹고 싶으면 한식당을 가야하고, 하다못해 양식당에 가서 뻔뻔하게 된장찌개를 달라고 땡깡이라도 부려야지, 공구상에 가서 된장찌개를 요구하면 망치로 맞을 수도 있다. ‘교육’을 바꾸어버리면 그것은 학교가 아닌 다른 시스템에서 해야 한다.
선언 1
그래서 우리는 이제 ‘교육’을 버린다. 어린 생명에게 ‘교육’의 주도권과 주체성을 돌려주기 위해 ‘교육’이 사라진 그 곳에 ‘배움’을 심는다. ‘education’ 역시 ‘learning’으로 용어를 바꾼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가르칠까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배울까를 스스로 모색하게 된다. 학교와 ‘교육’현장이 그토록 부르짖던, 그러나 전혀 실행되지 않던 자율학습이 비로소 구현된다. self learning과 자율학습이라는 용어의 불편한 비대칭성이 해소된다. 언어를 반듯이 세우는 일이야말로 현상을 고치는 첫걸음이다. 언어가 왜곡되면 필연으로 현상도 왜곡된다.
‘배움’을 원하는 대상은 더 이상 학교가 소용없어진 어린 생명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학교에서 말하는 불완전한 인간인 학생이 아니고 아직 성장 중인 어린 ‘사람’이다. 비로소 자신의 삶을 준비하는 개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 그렇다고 우리는 학교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는 교육권력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학교가 교육독점권력으로 공중 높이 떠 있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땅에 내려오길 바란다.
‘배움’ 속에서 선생은 자격증을 갖추거나 학교로부터 가르칠 권리를 위임받은 교사로 한정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이, 심지어 현상 그 자체까지 확장된다. 누구에게서나, 무엇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온 세상을 교실로 확장하는 일이고 이것이야말로 삶을 준비하는 기본 자세이며 나아가 독점권력을 와해시키는 조용하고 지극히 평화로운 혁명의 방법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선언 2
일정한 직업이 없다 해도 최소한 생존하기 위해서 누구나 일을 한다.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한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한 자의 몫이었다. 그것이 혜택이든 손실이든. 그러나 자본주의가 세상에 뿌리를 내리면서 한 일의 결과는 일한 자의 몫이 아니고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의 몫이 되었다. 내가 만든 나사가 어디에 쓰이는지 나사를 만든 이는 모른다. 내가 작성한 이 서류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서류를 작성한 이가 모른다. 그들은 그 일한 보수를 받을 뿐, 자신이 받는 보수가 한 일의 적정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모든 과정이 조밀하게 쪼개져 전체를 파악할 수단과 경로가 일한 자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볼 권리는 자본가에게 있다. 이것을 ‘노동에의 소외’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왜 국어를 공부하고 수학을 공부하는지 모른다. 오늘 배운 삼각함수를 언제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하라니까 ‘공부’를 한다. 공부하는 이가 공부의 필요성도 활용도도 모른다. 조밀하게 쪼개진 과목들이 어떤 형태로 재조립되어 자신의 삶에 쓰여 지는지 알 길이 없다. 노동에 빗대면 ‘공부에의 소외’로 표현할 수 있다.
노동에의 소외를 만든 이유는 명확하다. 일하는 자가 자신과 자신이 한 일의 가치를 몰라야 잉여이익을 자본가가 쉽게 가져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가 커리큘럼을 만든 이유도 설명 가능하다. 공부를 왜 하는지 몰라야 학생과 그 부모를 손쉽게 다루면서 권력과 그 혜택을 계속 누릴 수 있다. 한마디로, 학교가 번성하면서 존속할 수 있고 나아가 국가가 독점권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커리큘럼의 함정이다. 왜 공부를 하며 이 공부가 자신의 삶에 어떻게 쓰여 질지를 알면 교육권력에서 벗어나 공부할 권리를 공부하는 자가 누릴 수 있게 된다. 즉, 학교가 만든 방법인 커리큘럼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원래 지식은 낱낱이 쪼개져 있지 않다. 모든 지식은 흐르는 강물처럼 한줄기다. 이것을 낱낱이 쪼개면 지식은 파편으로만 존재해서, 이들을 한 줄로 꿰어 세상을 통찰할 수가 없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삶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리 공부해도 통찰력을 만들 수가 없다면 그것은 공부가 아니다. 통찰력이 없으면 다른 이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삶을 꾸리는 인간들의 사는 모습이 그렇다. 모든 문제는 이래서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리큘럼의 함정에서 빠져 나온다. 잘게 쪼개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개개의 교과목들의 꾸러미일 뿐인 커리큘럼도 버린다.
선언 3
동물들에게 교육이란 움직여서 먹이를 찾고 외부의 온갖 위험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이다. 마모트가 사막에서 생존하는 비결과 사자가 사냥하는 방법은 새끼들의 어미아비가 가르친다. 이게 교육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부모와 공동체 성인으로부터 오랜 기간 교육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제 생명과 가족, 나아가 소속된 집단의 생존을 책임지는 성인이 된다. 이렇게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끈질기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치는 이유는 부모 없이 혼자 잘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원체 복잡해서, 이걸 잘 하자면 알아야 할 것이 굉장히 많다. 처음은 가족이, 후에는 공동체가, 근대 이후엔 국가(학교)가 교육을 맡아 수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다. 이렇게 긴 기간 동안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건 그 많은 지식과 기술은 결국 몸을 움직이는 노동에 사용된다. 인간이 먹이를 구하는 방식이 직업을 갖는 것이므로, 교육의 기본은 바로 이 직업교육에 있다. 여기서, 노동과 직업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을 바꿔야 한다. 노동과 직업은 학업(신기하게도 우리말에는 학을 업으로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이 용어에 직업의 무게가 '은밀하게' 숨어 있다)을 마친 이후에나 갖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근대교육이 진행되었지만 그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다. 그런 과정으로는 진정한 성인이 안 나온다. 이 상황을 제대로 포착한 몇 사회는 학교교육 자체를 직업과 연계해서 진행한다. 주로 유럽, 그 중에서도 북유럽의 학교교육이 그렇다. 직업교육이 경쟁에서 탈락한 학생들이 받는 하위개념이 아니고 교육의 핵심이란 인식 덕분이다. 이 인식은 학벌, 먹물 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다.
그러므로 포스트 커리큘럼은 '직업과 노동'이라야 한다. 더 상세하게 풀어쓰면 직업과 노동을 행복하게 잘 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교육의 원칙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관념화되어 이제는 쓸모없어진 교과목 말고, 살아 움직이는 행위가 커리큘럼을 대체해야 한다. 이것을 학교에게 요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자면 학교 자체를 해체해야 하는데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교사 또한 그 개인의 의식이나 태도를 불문하고 교육의 행위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학교권력의 일부다)이 이를 용인할 까닭이 없다. 결국, 학교교육 시스템, 즉 커리큘럼에 기대면 작게는 아이의 성장에 도움 될 일이 없고 크게는 역사의 흐름에 반해서 도태되는 결과를 빚는다. 배움은 커리큘럼이 아닌 직업과 노동으로 해야 한다.
2부 쪽빛캠프
첫 단계 - 해동defrosting기
학교교육과 어른과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가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아이들을 얼렸다. 아이들은 냉동 상태로 피스캠프로 온다. 그러니 당연히 냉동된 아이를 녹이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래서 쪽빛캠프 첫 단계를 해동/defrosting기라 부른다.
갑자기 아이들을 녹여버리면 미쳐 날뛰므로 해동은 안전하게 서서히 시켜야 한다. 먹고, 놀고, 쉬고, 하고 싶은 자잘한 것들을 하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보살펴주기만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밖의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푼다.
아이들의 특성에 따라 해동하는 기간은 제각각이다. 빨리 해동된다고 좋을 것도 없고 늦다고 조바심 낼 이유도 없다. 중간에 해동을 그만두면 어정쩡한 상태로 본성을 자칫 다칠 수도 있으므로 충분히 정성을 들여 해동한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녹는 동안 아이들은 원래의 본성을 회복한다.
해동기는 심심하다. 그러나 해동이 되는 동안엔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없으므로 아이가 심심해하면 비로소 해동이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해동기간은 특별히 정하지 않아도 된다. 해동기는 아이가 심심해하면 끝난다.
둘째 단계 – 연습practice기
대저 아이들이란, 심심하고 무료한 건 못 견딘다. 이 때 욕구가 생긴다. ‘무엇을 해 보고 싶다’는 욕구는 꿈의 출발점이다. 꿈은 거창한 게 아니다. 그럴 때 해 보고 싶은 무언가가 아이의 근처에 있으면 아이는 행동을 시작한다. 우리는 아이가 꿈꾸기를 시작할 때 꿈을 만질 수 있게 여러 가지를 미리 준비해두기만 하면 된다. 가벼운 업무 도우미로 피스캠프 운영에 참여하며 보수도 받게 하고 내부직업으로 아이들 서로가 서로에게 일종의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준비도 하고 혼자 조용히 꼼지락거릴 수 있게 환경도 조성한다.
아이는 재미있으면 계속 할 것이고 재미없으면 또 다른 해 보고 싶은 것을 찾는다. 이렇게 원하고, 행동하고, 다시 찾는 행위가 아이를 점점 적극성으로 이끈다. 삶의 연습은 이렇게 꿈꾸고 행동하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이 과정을 연습/practice기라 한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해동기를 거친 모든 아이들이 겪는 두 번째 단계다. 연습기 또한 정한 시한은 없다. 산지사방으로 뻗던 아이의 꿈이 어느 정도 틀을 갖추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된 것인데, 이 과정은 쉽게 보인다.
셋째 단계 - 탐험exploration기
꿈이 서서히 일정한 방향으로 모이면 아이는 점점 무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그동안 연습이긴 했지만 실제로 겪은 많은 일들의 경험도 쌓였다. 뭔가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용기도 자란다. 이 때가 밖으로 나갈 때다. 그동안은 잘 보살피고 관찰하고 준비해주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길을 잡아주고 용기도 불어 넣어줘야 한다. 꿈을 실천하는 방법도 배워야 하고 그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도 쌓아야 한다. 아이가 필요한 학습을 위해 기관과 멘토를 찾아 아이에게 연결해줘야 한다. 연습기와는 차원이 다른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이 공부다. 이제 아이는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를 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써 먹고 싶어 한다. 이것이 직업이다.
꿈이 일정한 방향으로 모이긴 하지만 그 범위 속에서 아이의 꿈은 요동친다. 여행을 하며 즐겁게 살고 싶은 꿈을 꾸는 아이는 여행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오늘은 요리를 하며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가 한 달 뒤에는 사진을 찍으며 세상을 유람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요리를 배우고 그 요리를 직업 삼아 밖으로 나갔다가 좌절하고 돌아와서 카메라를 만지며 사진을 연구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나가기도 한다. 이런 준비 과정과 노동 과정과 좌절과 극복 과정이 다 아이들에게는 공부다. 꿈이 자주, 많이 바뀔수록 아이는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공부할 수 있다. 아이들 꿈이 정신없이 바뀌는 건 그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의미한다.
넷째 단계 - 독립independence기
아이는 탐험기를 거치면서 탐험이란 말 그대로, 학교교육을 받은 또래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을 대지 삼아 아이는 이제 자신의 삶을 담을 집을 지으려 한다. 이제 아이는 좀 더 긴, 자신의 삶을 견인하는 꿈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꿈이 시작되면 아이는 진중해진다. 겉으로 슬쩍 봐도, 몇 마디만 대화를 나눠도 아이가 이 단계에 도달했음을 느끼게 된다.
여행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 꿈을 꾸는 아이에겐 '무엇'을 해서 행복하게 여행할지를 생각하게 이끈다. 아이가 사람 만나기를 즐긴다면 이것을 수단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한다. 그러면 비로소 공부할 것과 습득해야 할 목록이 나온다. 여행을 잘하기 위한 어학, 지리학이 필요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다양한 공부와 체력이 필요하고 이를 정리하기 위한 논리력, 문장력이 필요하고 이것으로 상품을 만들기 위한 편집, 디자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꿈은 직업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의사가 꿈인 아이도 있을 거다. 그러면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대학도 가야 한다면 대학갈 준비를 도와준다.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된다. 검정고시든 치앙마이 대학 진학이든 한국으로의 리턴이든 꿈이 선명해지면 결정도 쉽다. 아이는 아주 구체적으로 성인이 될 준비를 다양하게 한다.
동시에, 본격적인 독립여행을 시킨다. 여행은 영혼을 가다듬고 풍성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다. 처음엔 짧게, 이후에 좀 더 길게 아이 혼자서 세상을 훨훨 날게 한다. 피스캠프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든다. 루트, 방식, 비용 등 치밀한 준비를 해 두고 아이의 비상을 돕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나이가 어떻든 아이는 독립할 준비를 마쳤다. 피스캠프는 아이의 날개를 펴 주고 세상을 향해 날 수 있게 격려하면 된다. 이제 피스캠프가 할 일은 다 했다.
이것이 피스캠프의 핵심 프로그램인 쪽빛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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