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1억 2천만 원이라는
액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주최측에서 홈페이지를 만들고 번역 비판 공모를 한다. 누구든 출간된 번역서 하나 선택하여 비판한 것을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올릴 수 있다. 그리고 매달 우수작 10 편을 선택해 100만 원씩 준다. 한 달에 1천만
원이니까 1년에 1억 2천만
원이다. 물론 당선된 번역 비판은 특별히 마련된 페이지에 공고된다. 또한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번역 비판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도 따로 공고된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데에도 돈이 들고, 당선작을 가리는 사람들에게도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 1억 2천만 원보다는 훨씬 더 많이 들겠지만 그냥 1억 2천만 원이라고 하자.
나는 이런 식의 사업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번역 비판 공모에 응모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최소한 한 달에 100 편
이상의 쓸모 있는 번역 비판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한국에는 100만
원을 아쉬워하는, 외국어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들의 관심도 상당히 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장담 못한다. 100만 원이라는 돈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꼬셔서 번역 비판 공모에 응모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과연 그 결과를 얼마나 관심 있게 지켜볼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TV나 신문 같은 대중 매체에서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다. 한 번 TV에 제대로 나오면 독자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그럴 듯한 아이템이다. 특히
유명 대학 교수나 유명 정치인이나 유명 방송인의 번역이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번역 비판은 뉴스 거리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출판사들은 번역의 질이라는 문제의 경우에는 독자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들은 번역할 책을 고를 때, 제목을 뽑을 때, 표지 디자인을 할 때에는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번역의 질은 뒷전이었다. 왜냐하면
번역이 얼마나 나쁜지를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쓸 만한 번역 비판이 1년에
1000 편 이상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널리 알려진다면 상황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번역서의 질이 갑자기 좋아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번역을 잘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번역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오랜
기간 훈련해야 잘 할 수 있다. 또한 설사 번역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줘야 그들을 번역계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한국의 독자들이 번역의 질에 대해 잘 알게 된다고
해서 갑자기 출판사로 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변화가 생길 수는 있을 것이다. 만약 엉터리
번역이 널리 알려져서 출판사가 마비될 정도로 항의 전화가 쇄도 한다면, 그리고 리콜 요구가 만만치 않다면
출판사에서는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대리 번역의 관행이 상당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대학 교수나 번역
회사 사장이 이름만 빌려 주고 번역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번역 하청을 주는 것이 대리 번역이다. 번역의
질이 알려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대학 교수라는 명함이 번역의 질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반대로 번역의
질이 널리 알려지는 상태에서는 명함보다는 실력이 더 중요해진다. 출판사에서는 그럴 듯한 명함보다는 실력을
기준으로 번역가를 선택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의 대부분의 출판사 편집부의 번역가 감식력이 형편 없다. 누가
번역을 잘 하고 누가 못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경력자를 우대하는 식으로 번역가를
고른다. 많이 번역해서 출판하면 그 번역의 질이 어땠든 장땡인 것이다.
만약 번역의 질이 널리 알려진다면 출판사에서 번역을 잘 아는 사람을 한 명 정도는 편집부에 고용할 것이다. 그러면 그럴 듯한 경력(대학 교수,
유명 번역가)보다는 실제 번역 실력을 기준으로 번역가를 선택할 것이다.
책 값이 뛸 가능성이 있다. 더 좋은 번역을 위해서는 번역가에게 돈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 돈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책 값을 올려야
한다. 나는 만약 이런 식으로 책 값이 올라가고 번역가에게 돌아가는 돈이 많아짐으로써 번역의 질이 좋아진다면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대대적인 번역 비판으로 한국 번역계가 얼마나 한심한지 알려진다면 세금을 들여 번역가를 보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큰 돈이 국고에서 번역계로 옮겨갈 가능성이 생긴다. 대대적인 번역 비판과 함께 큰 액수의 세금이 번역가들에게 돌아간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대적인 번역 비판이라는 방패가 있기 때문에, 엉터리로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이 낭비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가 당장 이 일에 나섰으면 한다. 아니면 기업이 나설 수도
있다.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큰 돈을 안 들이고 이미지 개선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웬만한 자선 사업보다 더 작은 돈으로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자선 사업은 너도 나도 하기 때문에 묻히게 되지만 이런 식의 사업은 완전히 튀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돈 벌이와 상관 없이 순전히 한국 번역계의 발전을 위해 돈을 내 놓으려는 돈 많은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덕하
2010-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