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법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특권이다.
그만큼 거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보호구역을 방문하는 사역자들 중에는 말씀을 나누는 면에 있어서 두 종류의 사역자들이 있다.
첫째는 되도록 입을 다물고자 하는 분들이고 나머지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다.
전자는 이들의 현실도 모르면서 어쭙잖게 나서지 않겠다는 생각이고 후자도 복음을 전하는 등,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와 동기에 따라 옳고 그름, 낫고 못함이 갈릴 것이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각자의 생각에 달린 것이고, 또한 나의 몇 마디 말로 바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미천한 경험에 의거해 적어보려고 한다.
말씀만 전해라.
경험담, 경력, 학위 등 자신의 이야기를 삼가라.
설교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이곳 분들에게 아무런 의미 없다.
설교자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서 울리는 괭가리고 나쁘게 말하면 불쾌한 자랑이다.
물론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내용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상관하지 않는 것이 사실은 가장 심각하게 뚫고 나가야 할 절벽이다.
그 절벽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설교자의 과제다.
설교 후에 청중들이 다정하게 대해준다고 좋아할 것 하나도 없다.
그들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자신들에게 악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면 다 다정하게 대해준다.
예화도 최소화하라.
간증도 최소화하라.
간증설교의 덕목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상황 속에서의 경험담이 이들에게 근본적인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다.
어차피 단기 방문 중 벌어지는 단발성 말씀나눔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요는 그 단 한 방이라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최소한 말씀을 진지하게 섬기는 자세라도 보여야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내용 하나.
말씀나눔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설교자에 따라 나름의 목적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말씀나눔을 통하여 청중의 신앙적인 생각과 결단, 그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 믿음, 그리고 사역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격려하고자 함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와 능력의 말씀임을 믿기에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 말씀을 전하는 나로서의 목적이다.
그 목적을 달성함에는 오직 말씀을 전할 뿐이며 공통된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청중들에게 말씀 이외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지 말 것은 이미 말한 바다.
말씀 전하는 분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하나.
말씀을 전하기 전에 뭔가 청중들과 선을 대고 싶어 하는 생각이다.
관계설정, 친목도모? 뭐 그런 중차대한 과제일 것이다.
사실 이런 과제는 말씀나눔뿐 아니라 단기사역의 여러 가지 다른 현장에서도 많이 나타나지 싶다.
유식한 말로는 아마도 아이스 브레이커 (Ice Breaker), 혹은 안면트기?
혹자는 그래서 원주민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기도 한다.
분명, 식사대접을 하면 관계가 좋아진다.
그러나 식사로 이뤄진 관계는 식사에 대한 지속적인 기대감에 머문다.
침 치료를 통한 관계는 지속적인 침 치료에 대한 기대감에 머문다.
결국 언젠가는 진정한 영적 관계설정을 위해서는 진정한 말씀나눔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 싶다.
부수적인 양념도 나름의 몫이 있겠지만 진정한 영적 관계를 위해서는 말씀의 진검승부가 제격이 아닌가 싶다.
말씀을 전하는 진정한 목적은 그저 안면이나 트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에는 주제가 있고 본문과 제목이 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본문과 제목이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초신자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성도들이 대체로 아는 것들이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 새로운 메시지는 없다.
그러나 말씀나눔을 시작할 때의 “들어본 이야기네”라는 생각이 말씀나눔을 마칠 때까지 지속된다면 해로운 설교는 아닐지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발전적인 말씀나눔이라 하긴 어려울 것이다.
결코 쉽지 않게 주어진 말씀나눔의 기회를 최대한 유용하게 사용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꼭 언급하고 싶은 내용.
원주민들은 목회자들이 정규교육이나 제도적인 안수절차를 거치지 못한 경우가 많고 그런 목회자조차 없는 교회들도 많지만 절대로, 거의 절대로 외부인들에게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절대로, 절대로 내가 말씀을 전하겠노라, 혹은 누가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 부탁하지 않는다.)
설교의 전문성이나 능력 등에 대해서 거의 전혀 비판적이지 않은 현지 청중들의 암묵적인 격려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목사가 없을지언정, 자신들 스스로 돌아가며 간증이나 감상문 정도의 설교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외부인, 그들이 교육받고 제도적인 안수를 통하여 인정받은 목사라 할지라도 이들에게는 소위 말해서 “who cares?" 즉,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현상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기 마련이지만 결론은 위대한 교육을 받고 거대한 학위를 받고 엄청난 교단의 배경을 가진 설교자라 하더라도, 그런 배경을 가지고 얼마간의 적선의 성격을 가진 선심성 물량적 나눠주기를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말씀나눔, 또한 그걸 통한 하나님의 역사 도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나눔을 통한 순수한 말씀나눔의 목적 달성, 그것이 과제다.
어떻게 말씀을 나눌 것인가?
이미 언급된 것처럼 말씀의 시작에서 갖게 되는 “들어본 얘기”의 진부한 기대감을 어떻게 극복하고 말씀 말미에서는 말씀으로 인한 어떤 위대한 감동을 나누고 자리를 뜨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네 가지, 내가 심력을 기울이는 것을 나누고자 한다.
말씀을 충분한 범위(Scope) 안에서 다뤄야 한다.
범위는 시작부터 끝까지를 말하며 말씀나눔의 범위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다.
매 번 성경 전체를 섭렵하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일관된 교훈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렇게 해야 편파적인 나눔으로 인한 불필요한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으며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앎에 멈추지 않고 전체가 환히 보이고 눈이 훤히 뜨이는 감동을 나눌 수 있다.
말씀의 깊이(Depth)를 충분히 느끼고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한 것이다.
진리의 오묘한 부분은 하나님께 속해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우리가 다 설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 설파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오묘함의 실존과 성품과 역할까지 무지해서는 말씀의 깊이를 청중들과 나눌 수 없다.
어떻게 그 깊이를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그것이 꼭 구체적인 묘사가 아닐지라도 청중들에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은 아마도 각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말씀의 풍요로움(Richness)을 전해야 한다.
정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단 하나님의 말씀.
난 금 귀한 것은 잘 모른다.
그러나 꿀이 얼마나 달디 단 지는 너무 잘 안다.
아리조나 토종꿀을 많이 맛보았기 때문이다.
말씀의 단맛, 그 감동, 그 귀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전할 수 없다.
말씀의 단맛은 정제된 백설탕의 그것처럼 단순한 단맛에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우리의 삶, 신앙, 사역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들이 충분가득하게 담겨있다.
음식의 영양소는 식품영양학자들이 가려낼 것이지만 말씀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은 말씀을 나누는 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말씀의 능력(Power)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아마도 이 마지막 과제는 위의 세 가지, 즉 범위, 깊이, 풍요로움이 전해지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싶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깊이 찔러 쪼개는 말씀의 능력.
우리의 영혼과 생각과 육체를 낱낱이 분해하여 불순한 것들을 잘라내고 새로운 힘으로 채워주는 말씀의 능력.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전함으로, 우리는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그 감동이 있을 때 반드시 진정한 능력이 솟아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알고, 이해하고, 감동하고, 능력을 얻어 복종하는 과정에서 그 느낌, 감동의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부분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그런 과오가 나에게서 뿐 아니라 다른 설교자들에게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감동, 그것은 느낌(Feeling)이고 감정(Emotion)이다.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말들이 기독교계에서 가지고 있는 보따리(Connotation)가 있다.
그 보따리들은 특히 이성주의자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몰이, 이성적인 분별력이 배제된 감정몰이에 휘몰려 어떤 분별없는 행동으로 치닫곤 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런 일들로 인해서 발생하는 그 후의 부정적인 일들을 제법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적인 것이 배타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것은 감정의 병리적인 나타남(Pathology)일 뿐이다.
감정의 생리(Physiology, 병리가 아닌)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중요한 실존 중 하나다.
그리고 말씀으로 인한 감동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본성 중에 하나이며 이 감정이야말로, 느낌이야 말로, 감동이야말로 결단과 행동으로 나서는 가장 중요한 동력원인 것이다.
우리는 병리적 감정몰이, 그로 인한 사적 동기만족을 심히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생리적인 감정의 존재와 역할을 등한시해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종으로 이르는 순서에 주의해야 한다.
말씀을 알고, 이해하고, 그리고 감동하여 결단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게 되는 순서 말이다.
지식과 지혜가 배제된 감동은 광신으로 나타나지만 말씀에 근거한 감동은 위대한 순종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감동 없이 행동 없다.
냉담한 마음으로 진리를 설파하고자 하는 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감정위주의 광신자에 크게 나을 것이 없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가 우리에게 말씀의 진리에 근거한 느낌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라가 말씀을 전했다.
청중들이 그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슬픔, 혹은 절망감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갱신과 회복의 축복임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며 커다란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그들은 개인은 개인의 수준에서, 민족은 민족의 수준에서 개혁과 갱신과 발전의 발돋움을 감당했다.
말씀에는 진리가 있고 감동이 있다.
거기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리라 믿는다.
아니, 실제로 나타났고, 나타나고 있는 것은 성경의 기록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드러난 증거들로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글을 마치고 다시 읽어보니 글의 폐단을 다시 느끼게 된다.
조리 없는 단상(斷想)들로 읽는 분들에게 해석학 과제라도 드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그저 선교현장에서 말씀을 나누며 느끼는 한 사역자의 몸부림으로 생각해주기만 한다 하더라도 감지덕지다.
그리고 글을 쓴 자와 읽는 모든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역사가 온 천하에 조금이나마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천하에 넘치는 그날까지...
첨(添)
나는 본 글에서 “설교”, 혹은 “설교자”라는 말을 편의상 사용하였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또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말은 “말씀나눔”, 그리고 “말씀을 나누는 자”라는 말이다.
나의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청중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듣고 기뻐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 나의 말씀이 위대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다만 그러기를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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