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번역서가 엉터리로 번역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 20~30쪽
정도를 검토하여 오역을 몽땅 찾아낸 다음에 오역된 문장을 원문과 함께 보여주면 된다. 오역의 수가 어느
정도 이상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반면 어떤 번역서가 훌륭하게 번역되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책 한 권에 나오는 모든 문장을 원문과 병기하면서 분석한다면 번역 비평문이 번역서보다 훨씬 더 두꺼운 책이
될 것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방법이 아니라면 오역이 거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따라서 엉터리 번역임을 보여줄 때와는 달리 훌륭한 번역임을 보여줄 때에는 번역 비판을 하는 사람의 권위가 중요하다. 나는 번역 비판 영역에서 나름대로 약간의 권위를 쌓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수십 권의 나쁜 번역서들을 상당히 꼼꼼히 비판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남의 번역을 비판한 나의 글을
여러 편 읽어본 사람은 내가 오역을 찾아내는 데 약간의 재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내가 어떤 번역서를 원문과 대조하면서 열심히 검토해 보았는데 오역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하자. 이 때 나는 그 번역서가 양호하게 번역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오역 찾기 능력을 어느 정도 믿는 사람은 나의 권위에 의존하여 그 번역서가 양호하게 번역되었다고 어느 정도는 믿게 될 것이다.
만약 오역을 찾아내는 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나의 양심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별 수 없다. 나의 양심을 어떻게 입증하겠는가? 게다가 프로이트와
진화 심리학자들이 공히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기 기만에 빠지기 쉽다. 나 역시 인간인 이상 자기 기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번역을 검토할 때에 사고 왜곡이
약간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자기 기만이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내가 어떻게 양호한 번역서를 선정해서 소개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첫째, 기준은 오직 “번역의 질”이다. 원서가 아무리 개판이라 하더라도 번역의 질이 양호하다면 나는 양호한 번역서로 소개할 것이다. 물론 엉터리로 쓴 책을 읽을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원서가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할 때에 번역 검토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둘째, 원서 기준으로 최소한 20쪽
이상을 검토할 것이다. 책 전체의 모든 문장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좀 더 나은 결론에 이를 수 있지만
그렇게 엄청난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없다. 내가 검토한 부분에는 오역이 거의 없는데 다른 부분이 오역투성이로
번역되었다면 어쩔 셈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셋째, 양호한 번역이라고 소개할 때에도 나는 번역 비판을 꼼꼼히 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번역에 시비를 걸 것이다. 이로써 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 책의 번역의 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훌륭한 번역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오역이 적어야 하며 한국어
문장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나는 이 두 기준 중에 주로 첫 번째 것을 따질 것이다. 따라서 원문을 충실히 옮겼다면 한국어 문장이 상당히 이상해도 양호한 번역서로 소개할 것이다. 물론 이 때에는 이상한 한국어 문장에 대한 비판할 것이다.
다섯째, 어느 정도로 오역이 적어야 양호한 번역인가? 이것은 애매한 문제다. 내가 얼마나 일관성 있게 기준을 지킬지도
의문이다. 10쪽에 오역이 하나 이하라면 좋겠지만 두세 개 정도까지는 양호한 번역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이 때 책의 난이도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어려운 책을
오역 없이 번역하기는 쉬운 책보다 어렵다. 물론 “무엇이 오역인가?”라는 문제도 애매하기 때문에 엄밀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이런 문제 때문에 나는 양호한 번역을 소개할 때에도 꼼꼼하게 번역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다.
2011-01-23
첫댓글 〈10쪽에 오역이 하나 이하라면 좋겠지만 두세 개 정도까지는 양호한 번역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 제 생각엔 위 기준은 너무 높은 기준인 듯합니다. “10쪽에 두세 개 정도의 오역”이라면 최상위 수준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번역의 대가라고 해도 이런 최고 수준의 번역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제가 살펴본 번역가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만, 제 번역 비판 경험에 따르면, 1쪽에 한두 개 정도의 오역만 저지른다면 우리나라에서 아주 높은 수준의 번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생각보다 지극히 귀합니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기가 너무 어려우면 기준을 낮추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