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혜개가 말한다.
“은하수를 풀어먹이는 달변도 소용없고,
팔만 사천 법문의 해설도 도무지 소용없다.
만일 여기서 대응할 수 있다면 이때까지 죽어 있던 길을 살려내고,
이때까지 살아 있던 길을 죽여버릴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정거린다면, 먼 훗날의 미륵을 기다려 구걸할 밖에.”
*송하여 가로되,
“향엄은 정말 엉터리라, 짓궂기가 한이 없어.
납승의 입을 틀어막아, 온몸에 도깨비불 번쩍거리게 하네.”
향엄(香嚴智閑 ?~898)은 앞에서 본 여우의 주인공 백장의 제자이다.
그의 깨달음은 간고한 데가 있다.
총명한 자질에 학식이 뛰어났던 향엄은 처음 백장 문하에서 수년을 지냈으나
근본 소식을 뚫지 못했다. 백장이 천화(遷化)하자,
사형인 위산(山靈祐 711~853)에게 갔다.
위산이 묻는다.
“듣자니 자네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한다는데,
그런 잡다한 지식을 떠나 생사의 근본과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네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어디 말해보라.”
향엄은 눈 앞이 아찔했다.
숙소에 돌아와 그 동안의 저작과 노트를 다 뒤적여 보았어도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향엄은 탄식하며 위산에게 그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위산은 냉엄하게 거절했다.
“얘기를 해 줄 수는 있다. 허나 그랬다간
나중에 틀림없이 너는 날 원망할 것이다.”
매몰찬 대답에 향엄은 인연없는 불법을 한하며,
그저 유랑 걸식승으로 한 세상 마치겠다며 울면서 위산을 떠났다.
각지를 떠돌다가 남양(南陽) 혜충국사(慧忠國師)의 유적 근처에 처소를 정했다.
여느때처럼 밭에 나가 풀을 뽑고 김을 매
고 있는데, 무심코 집어던진 자갈 하나가 대나무에 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예기치 않은 소리에 문득 향엄의 칠통같은 마음이 열렸다.
부모 이전의 자기를 선연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워 위산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 은혜 부모보다 높습니다.
그때 만일 친절을 베푸셨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위앙종(위仰宗)의 종풍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임제나 운문처럼 험준하거나 날카롭지 않고,
조동(曹洞)처럼 면밀하거나 재치있지 않으며,
법안(法眼)처럼 사려깊거나 폭넓지 않다.
그러면서도 장강의 깊이를 갖고 있다. 향엄의 이 예가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족을 붙이기 전에 제기된 이야기의 후반부를 덧붙여 주는 것이 좋겠다.
향엄이 이 질문을 던지자, 호두(虎頭)라는 사람이 성큼 나섰다.
“나무 위에 올라간 뒷일은 제쳐두고, 나무에 올라 가기 전의 일을 말씀해 주시오.”
이 말에 향엄이 가가대소했다.
(是時有虎頭上座, 出問, 上樹卽不問, 未上樹時, 請和尙道.
師呵呵大笑.)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무 위의 일은 무엇이고 나무 아래의 일은 무엇인가.
호두의 대답에 왜 향엄이 가가대소했는가. 이를 두고 누가 이렇게 읊었다.
“향엄은 괜시리 나무 위로 올라가 평지 풍파를 일으켰고,
나무 아래서 근원을 궁구해 호두에게 웃음으로 답했다.
나무 위에 올라 향상의 도리를 밝힐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어찌 나무 밑 고요의 사바하만 같渼째?
(雪竇寧頌, 香嚴樹上鼓風波, 樹下窮源笑答他.
上樹更能明向上, 爭如靜處薩婆訶)”
이 이야기를 듣고 <벽암록>의 저자 설두(雪竇)가 나서서 이렇게 자신했다.
“나무 위에서 대답하기는 쉽지, 나무 밑에서 대답하기가 어렵다.
내가 나무 위로 올라갈테니 어디 한번 물어보시구랴
(樹上道卽 易 , 樹 下 道 卽 難, 老僧上樹也, 致將一問來)”
여기에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한 ‘향엄’, 나무 위에 올라가기 전의 소식을 알려 달라는 ‘호두’,
그리고 한술 더 떠, 가지를 물고 대답하는 것쯤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다는
‘설두’가 그들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는 개암 붕(介庵 朋) 화상이 낸 이런 수수께끼가
실려 있다.
“황당 무계한 소극(笑劇)의 주인공들은 모두 도적이다.
그 중 하나는 진짜 도적이요, 또 하나는 도적에게 사다리를 건네준 놈이고,
또 하나는 앉아서 장물을 챙긴 놈이다.
과연 누가 누구인지 가려낼 수 있겠는가.
이들을 가려낼 눈이 있다면 향엄의 진짜 속을 읽을 수 있을 것인 바,
생사의 쳇바퀴로부터 벗어날 길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