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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 연구소
 
 
 
카페 게시글
임시정부 관련 자료 스크랩 경교장에서는 언제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개최되었을까?
운영자 추천 0 조회 35 15.04.26 18: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교장이 김구 주석의 숙사(宿舍)에 머물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로서의 입지를 가진다고 할 때 그 주요 표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에서 정부의 최고 정책 심의 및 결정기관이 무엇이고, 동 기관이 어디에 소재하느냐를 파악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복을 전망하고 정식 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개정한 제6차 헌법에는 행정부가 국무위원회의와 행정각부연석회의의 이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때 국무위원회의가 정책회의적 성격을 띄는 것이었고, 연석회의는 일종의 실무회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들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진이 1945년 11월 23일, 2진이 1945년 12월 1일 환국(입경은 같은 해 12월 2일)한다.

 

   1진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엄항섭 선전부장 등 6인이고, 2진은 홍진 의정원 의장, 조성환 국무위원, 황학수 국무위원, 장건상 국무위원, 김붕준 국무위원, 성주식 국무워원, 유림 국무위원, 조경한 국무위원, 김성숙 국무위원, 조완구 재무부장, 조소앙 외무부장, 김약산 국무부장, 최동오 법무부장, 신익희 내무부장 등 총 14인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모인 후에야 제대로 된 국무위원회의, 약칭 국무회의가 열릴 수 있었는데 '1945년 12월 3일' 환국 후 첫 국무회의가 바로 '경교장에서 열리게 된다. 

 

   1945년 12월 4일자 자유신문과 동아일보에는 고국으로 돌아온 후 처음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 개최 소식을 아래와 같이 신문 1면 머릿기사로 게재하고 있다.

 

   그 내용을 신문의 아래에 게재하니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1945년 12월 4일자 동아신문

 

동경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

주석 김구 각하 통재하 국무위원 초회합(初會合)

 

   공륙원정(空陸遠程) 풍운(風雲)을 무릅쓰고 작석(昨夕) 한양에 안착한 임시정부 잔류요인 일행은 한미(韓美) 호텔에서 일야(一野)를 안식하고 백발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정열에 넘치어 피로도 모르는 듯 조선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이 운후(雲後)에 쾌청된 12월 3일 이날 상오 11시 경교동 정부주석 숙소 문전에는 일삭(一朔)을 넘겨 다단한 국내의 정세를 살펴가며 통일하려 노력하여온 이승만 박사의 등청을 비롯하야 장남을 대동한 의정원장 홍진 선생, 조소앙, 유동열, 신익희, 유림 제 선생 일행은 전후하야 등청하엿다. 상오 11시가 지나서 역사적인 국무회의가 개최되엿는데 이 회의에서 가르칠 조선의 방향을 듣고 저 대기하고 잇는 기자들은 벽에 걸린 시계만 치여다보며 초조하게 대기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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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2월 4일자 자유신문

 

전 각료 일당에 회합

건국의 본격적 공작

작일 환국 후 최초의 국무회의

 

   의정원의장 홍진씨 이하 14명의 도착으로 마츰내 중경 임시정부의 전 각료는 입국하얏다. 김구 주석의 각 요인이 일은바 '개인의 자격'의 환국을 하얏느냐 또는 정부로서이냐는 큰  관심사이엇다. 그래서 결국 이에 대한 견해는 김구 주석 선생 자신의 '내가 왓스니 정부로 왓소'라고도 하얏고 또 엄 선전부장을 통해서 대외적 국제관계에 잇서서는 대인 자격이겟지만 국내에 잇서서는 정부자격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잇섯다. 거국의 기대가 임시정부에 집중되여 잇고 그들이 과거에도 그거하얏지만 지금부터도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야 서 할 노력에 의해서 시급한 완전 자주독립이 획득되기를 희망하고 잇는 것은 물론이다.

 

   입국 제일야(第一夜)를 한미호텔에서 보낸 홍진씨 이하 14 요인은 3일 오전에 죽첨정(竹添町) 김구 선생 숙사에 나타나서 이승만 박사까지 일석(一席)에 동좌(同座)하야 국무회의를 열고 오찬 후 오후에도 속개(續開)되엿다. 아즉 그 회담내용은 알 바 업스나 아연긴장해진 정국의 동향은 삼천만 민중의 주목을 끌어 건국의 본격 공작이 바야흐로 발전되려는 이 때 민중은 최대의 관심으로 지도자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잇스니 3일에 국무회의가 어떠케 민중의 참된 의사를 반영하얏고 국내 정치동향의 정당한 노선을 파악하얏느냐는 실로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해방 이후의 민중운동의 정당한 비판을 통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을 것이오 시급한 민족통일 노선의 결성에 잇서서도 이 민의에 좃차서 해야 될 것이다. 38도(三八度)의 해결 등에 대한 군정청과의 교섭 대중생활의 안정 확보를 위해서의 물가경제대책 등 긴급히 요청되는 문제의 해결도 적지 안흐니 국무회의의 결과가 삼천만 민중에게 속히 알려지기를 기대함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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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2월 4일자 자유신문

 

  알기 원하는 국내사정

조 외무부장 기자단에 발표

 

   2일 입국한 잔여요인 일동은 한미호텔에 여장을 풀럿는데 3일에는 오전 10시경부터 피로도 몰으는듯 장쾌한 자태를 연달아 죽첨정(竹添町) 숙소(宿所)에 나타내엿스며 이승만 박사도 이와 전후하야 내참(來參)하얏다. 일동은 정오경부터 약 1시간에 걸쳐 오찬을 가치하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역사적인 국무회의를 열엇다. 오후 2시반부터 국내 사정의 설명이 잇고 속회디기 전 오후 2시경 외무부장 조소앙씨는 기자단에게 다음과 가튼 담화를 발표하엿다.

 

   금일 전원이 일당(一堂)에 모혀 국무회의를 연 것은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제야 오기 때문에 국내사정을 몰음으로 구체적 정세문제는 이야기하지 안헛다. 우리들도 국내사정을 잘 알아보랴 한다. 우리는 국내 각계에서 요망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랴 하니 각 기관에서는 민중의 진의를 공평히 발표하야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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