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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川齋舍重修記
金鶴山一枝逶迤東轉爰有小溪環山而美麗者曰沙川以沙而名川也山麓臨溪有若拱揖者曰也谷以形而名谷也昔我先祖少尹公當麗季自永來宣盖爲此山水之勝而睠玆也谷實爲冠屨之攸藏夫人李氏墓在越山之南而子孫因近居焉始知吾先祖始卜之功其將與天地無窮而子孫之卽墓下置齋舍永世奠掃者豈徒然哉第年深歲久物換星移堂序之突兀者或至於頹碎制作之堅固者漸至於傾圯百世交神之所豈可一日而苟存也頃在白猿會奠之日遂發重刱之議盖出於不得已也詢謀旣同卜日經始欂櫨株檽或不無增損而左右齋堂各因其舊制不數月而功告訖苟非在天之靈有以默佑烏能完役之及期而抑亦近地僉宗賢勞之致也豈不偉歟於是劑庖樁庫比前殊備釜鼎床席亦皆有藏至於典守之人咸得以安其所而不侈於前無廢於後則當初先輩之白地營建者可謂勤且至而孱孫今日之事半功倍者不亦幸也嗚乎奉先祖於誠敬而不貴於物侈守業在於繼述而每患於終怠使後日諸族人必愛護此舍隨毁隨補而各思樹立無貽門戶羞則報本追遠之義尊祖守祭之道不外於是僉宗其勔之哉勔之哉咸曰諾遂爲記 十一代孫 慶泰 謹記 ■ 사천재사 중수기
금학산의 한 갈래가 구불구불 이어내려 동쪽으로 돌아들고 실개천이 산을 안고 흐르니 아름답고 수려하여 사천(모란)이라 하는데 모래가 유명한 개천이란 뜻이고, 산기슭은 개천에 다다라서 공읍하는 것 같아서 야곡이라 하는데 모양이 유명한 계곡이란 뜻이다.
옛날 우리 선조 소윤공(李軒)이 고려 말엽에 영천에서 선성으로 오신 것은 아마도 이곳 산수의 훌륭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곳 야곡은 실지로 묘소를 모셨고 부인 이씨의 묘소도 건너 산 남쪽에 계시고 자손들이 그로 인하여 근처에 살고 있다. 우리 선조의 터전을 잡은 공로를 비로소 알았으며 앞으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리니 자손들이 바로 묘소 아래에 재사를 마련하고 길이길이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해가 가고 세월이 오래되면 물건도 바뀌고 별자리도 이동하는데 우뚝하던 집도 무너지고 부서지게 되고 견고하게 만든 것도 점점 기울고 무너지는 것이니 백세토록 신을 모시는 것이 어찌 하루 같이 보존될 수 있을까? 신미(1751)년 묘사 때에 드디어 중건할 의사가 발의된 것은 아마도 부득이하여 나왔을 것이다. 계획과 함께 시작할 날을 받았고, 두공 등 재목은 혹 보태고 뺄 것이 없지 않으나 좌우의 마루는 옛날의 규모에 따랐고 몇 달이 안 되서 공사를 마치고 고유를 했으니 참으로 하늘에 계신 신령이 묵묵히 돕고 있지 않았는가? 어떻게 역사를 기대에 미치도록 완전하게 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또한 인근의 여러 어진 종친들의 노력으로 이루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이에 방과 부엌과 방앗간과 창고를 이전에 비교하여 뛰어나게 갖추고 가마솥과 밥솥과 밥상과 깔 자리 역시 모두 갈무리 하니 고지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안전한 곳이라고 했으며 이전보다 사치하지도 않고 이후로 폐함도 없을 것이므로 당초 선배의 빈터에서 건축을 맡은 사람은 부지런했다고 말할 수 있겠고 또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오늘 일의 공로의 반을 보태었으니 역시 다행이지 않은가?
아! 선조를 정성과 공경으로 받드는 데는 사치한 물건이 귀중한 것이 아니고 물려받은 사업을 지키는데 있으며 매양 걱정은 끝에 가서 태만 하는 것이다.
훗날 여러 종친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 집을 애호하며 헐리면 보수하여 각자 문호에 수치를 끼침이 없도록 생각을 다져라. 그러면 조상에게 보답하고 공경하는 의리와 조상을 받들고 제사를 모시는 도리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여러 종친들이 권하고 또 권하며 모두 옳다고 하여 드디어 기문을 한다. 11대손 경태5)는 삼가 기록한다. 李慶泰(1689-1755):永川人. 字는 大裕, 號는 黙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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