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부원군 임견미 고정론(平原府院君 林堅味 考正論)
한 나라 宰相의 生死는 그 나라 存亡의 運命이 달려있다 하겠다.
宰相의 위치는 一人之下요 萬人之上이라 높기도 하려니와 맡은바 任務도 政治 國防 人物選用 經濟收拾등등 無數한 內外事情들이 한몸에 집중되어 크고 작은 影響을 받아 國政에 反映되고 强弱과 昇침의 氣勢로 變遷해 나가는 一國의 숨길수 없는 歷史이기 때문이리라.
그 實例로는 高麗末期에 執政大臣 平原府院君 林堅味의 遺跡에서 살펴볼수 있다.
公은 일찍 平澤林氏 名門인 忠貞公 彦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出衆하고 豪邁한 資품은 龍門에 오르기 어렵지 않아 공민왕 10년 紅巾賊의 亂때 羅州道 都兵馬使로 왕을 扈從하여 一等功臣이 되었으니 이때에 平原府院君이라는 封爵이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뒤로 安州巡撫使 副元帥 密直副使 西北面 都巡問使 西京上元帥 西海道助戰元首등의 중책을 맡은 將帥로서 燦然히 汗馬의 戰功을 세우시고 우왕9년에 守門下侍中이 되어 政房提調를 兼任하였으니 그야말로 出將入相의 柱石大臣이 되셨던 것이다.
이때에 國勢는 國王이 幼충하여 사냥과 女色을 좋아하여 국기가 튼튼하지 못하였으나 草野의 賢材를 모두 起用하여 適材適所에 配置하였으니 活躍하는 人物들은 거의가 平原府院君의 側近이라 할수 있고 國外의 事情은 中原大陸에 元나라와 明나라가 交替되는 瞬間이라 風雲戰局이 앞날을 占칠수 없는 昏迷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平原府院君은 明나라가 장차 中原의 주인이 될 것을 豫見하고 우왕에게 鄭夢周를 拔擢薦擧하여 修好使로 明나라에 가게하니 鄭夢周는 감격하여 感激하여 君父의 命이라면 水火라도 避치 않고 가겠노라 하며 出發하였다.
中原大陸에 大變革이 몰아치는 渦中에서 王室은 殘弱하였으나 人物培養에는 큰 成果를 거두어 道學 節義 文章 武功에 魁傑한 人材들이 많이 輩出되어 有史以來로 가장 많은 人物l 集結하였음은 自他가 共認하는 바이다.
이때 平原府院君의 位置는 나가면 元帥요 들어오면 宰相이라 德望 높은 人材들이 滿朝에 追從하고 一令之下에 國事는 處決되었다.
世上에 말하는 大丈夫의 能事畢이라 榮譽의 極致라 하겠다. 잘못이 있다면 너무 지나쳤다 할까 氣勢가 一國을 풍미하였고 家奴는 全國에 퍼져 있으며 所謂蓄財를 하였다는 것이리라.
한편 이때 李成桂는 邊方의 한낱 武將으로서 戰術은 能하였고 地位는 一員武將에 不過하였다 平原府院君에 比하면 雲泥之差가 있는 微微한 存在이나 그러나 그 끝없는 野慾은 高麗를 삼키고 疆土를 내 所有로 만들고자 晝夜로 불타고 있었다.
첫째로 平原府院君을 除去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崔瑩을 앞장세워 平原君一派를 謀陷하여 除去하는데 成功하였다.
無防備狀態에서 猝地에 當하는 慘禍였고 基盤이 너무 컷기 때문에 더욱 참혹하였다.
家族 五十餘人이 同時에 誅斬되고 襁褓에 싸인 子孫은 모두 강물에 던져 버렸다고 史要에는 써있다.
그의 家財는 全部 籍沒되고 田地는 모두 흩어버리고 家臣과 同志 千餘人을 逮捕하였다.
너무도 끔찍하고 凶毒한 일이라 後世 史家들도 지나친 殘虐을 통탄하였다.
錦南 崔溥는 말하기를 林堅味등이 권신으로 잘못이 있기는 하나 亂臣賊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魁首 李仁任만을 처단함이 可하거늘 崔瑩이 苛酷만을 주장하여 誅殺을 恣行하고 無辜한 사람들까지 죽였으니 玉石이 俱焚한 恨歎이 있다.
어찌 人心을 滿足시킬 수 있겠는가 또 妻子와 영孩까지 죽여 一家를 赤族으로 만들었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不仁하기 甚할 수 있을까. 崔瑩이란 爲人은 不學無術하고 모든 행위가 추솔하고 사납고 거칠며 殘忍함이 擧皆이러하니 取할 것이 한가지도 없다 하였다.
그뒤 崔瑩은 李成桂와 執政하여 前日에 平原府院君이 起用한 人物들을 모두 逐出하고자 하니 李成桂가 가로막고 하는 말이 오늘날 士大夫는 모두 林堅味가 薦擧 起用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그 本人의 賢不賢을 가릴뿐이지 旣往事는 물을 必要가 없지 않는가 하였으나 崔瑩은 듣지 않았다. 그 뒤에 崔榮은 賢人 李子松을 林堅味의 黨派라 하여 全羅道로 귀양보내 죽였다
다음에 李成桂가 攻遼를 反對하니 禑王이 말하기를 그대는 李子松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니 李成桂의 대답이 子松은 비록 죽었다 하여도 그 아름다운 名聲은 後世에 길이 빛날 것이 오나 臣등은 비록 살았다 하여도 이미 잘못이라 무슨 소용이 있으리까 하였다.
그렇다면 이때 誅戮을 당한 李子松이나 올라가서 林堅味 같은 분들은 아름다운 이름이 後世에 빛나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無罪한 執政大臣과 家族들을 一時的인 策略에 의하여 殺害했다는 것이 明白한 證左가 아니겠는가.
李成桂는 威化島 回軍後에 崔瑩을 죽였고 마지막으로 鄭夢周를 죽였다
다음날 明나라에 보내는 奏文에 林堅味 崔瑩 鄭夢周를 죽인 來歷을 區區하게 변명하였으나 그대로 믿어줄 史學者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崔瑩과 鄭夢周는 그런대로 伸寃이 되어 洗雪을 보았으나 平原府院君 林堅味만은 五六百年이 흐르도록 昭洗되지 못하고 억울한 그늘 속에서 高麗의 忠臣이 埋沒돼 왔다 하겠다.
이때에 萬一 平原府院君이 죽지 않았다면 高麗의 社稷이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鄭夢周같은 분들이 殺害되지 않았을 것이며 明 나라와도 對等한 國交가 이루어져서 自主獨立의 國家로 健在하였을 것이다.
李朝는 出發부터 明나라에 臣妾으로 奴隸로 달게 自處하여 廣大한 天地에 머리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짓밟히는 弱小國으로 轉落한 責任을 피치 못하리라
歷史를 再照明하는 오늘날에 있어 平原府院君의 行蹟을 옛 歷史에 다시 參考하여 이와같이 辨證하는 바이다.
辛酉 春元 湖山 金 憲 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