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절)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 무겁던 머리와 갑갑하던 가슴이 뻥 뚫린다. 심지어 감기로 코가 막혀 있다가도 시원하게 뚫린다. 어떤 사람이 머리와 가슴이 일치되는 데는 무릎을 꿇는 것이 상책이란 말을 했다.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는 항복이다. 영혼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고 몸도 드리는 행위다. 행위예술이 있다면 이건 행위영성이다. 무릎을 꿇어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꿇어 그 분 앞에 엎드리니 아버의 기쁨이 되신다.
무릎을 꿇고 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생각하라. 자신과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지 말라.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어떻게 살지 등은 묻지 마라. 우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라. 생각하라. 영성은 그 과정을 깨닫고 자신에게 대입해서 따라가는 것이다. 물론 성령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이다. 따라서 진리의 지식과 진리의 성령의 역사하심은 영성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우선 많이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심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야 한다.
듣는 제사를 포기하면 삶의 제사는 요원하다. 듣는 영성을 포기하면 기도의 영성은 엉터리가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전에는 표적이나 기사로 하나님의 용도를 계산한다. 그러다가 한참 회의에 빠진다. 과연 하나님이 인생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창조적인 지성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 평강과 물질의 복을 주시는 재판장이 아닐까? 보편적인 룰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나중에 죽고 나면 천국 지옥 이렇게 구분하시는 게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러다가 말씀이 듣고 싶어진다. 영혼의 배가 주리고 목마른 거다.
이때부터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허겁지겁 양식을 찾고 생수를 찾는다. 그렇다고 어느 날 쨍하고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서서히 스며든다. 오래 걸린다. 믿음에 인내를 더해야 한다. 그 사이에 큰 사건이 자꾸 일어난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하시는 고난이다. 환난이다. 핍박이다. 십자가를 짊어진다. 아니 짊어지고 산다. 밤낮으로... 무릎을 꿇는다. 반드시 아버지는 살아계시고 주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현재적인 구원을 베푸심을 느낀다. 이런 사람은 무릎을 꿇는 것이 즐겁다.
그 이름을 내게 주신 아버지, 아! 이름은 그 존재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 이름을 아무런 효능도 없이 보았던 지난 세월들...이젠 안다. 느낀다. 확연하다. 다만 나는 이미 죽었고, 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로 인해 나는 없어졌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내 것은 다 차압당하고 압수를 당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그리고 빈다. 나를 버리고 그 분의 은총을 생각하며 진리의 성령의 도움으로 아버지께 안긴다. 이게 그렇게 행복하다. 가슴이 쭉 펴지고 목청이 열린다.
첫댓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평안해 집니다 아멘입니다 감사합니다
예, 내가 살아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주여, 저를 도우소서.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그리스도로..그리스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