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불교와 자연주의
동아시아 종교/철학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불교는 위에서 설명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열반의 이상과 불교의 “세계부정적” 혹은 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성격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조용하지만 유쾌한 자연주의적 긍정과 공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불교도 위에서 살펴본 동양적 자연주의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중국화 된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보면, 불교는 넓은 의미로 자연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세 가지 사항을 통하여 이 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첫째, 대승불교의 세계관은 열반을 생사의 세계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상좌불교(Theravāda)의 이원적 실재관과 다르다.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이 생사의 세계와 동떨어진 별개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해탈도 속세 한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다. 대승불교의 존재론은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세계만 인정한다. 보는 바에 따라 — 지혜냐 무지냐에 따라 — 세계가 그 참 모습(空, 眞如, tathatā)에서 보이기도 하고 망상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생사의 세계를 바로 보면 곧 해탈의 세계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유명한 구절대로, "색(色)이 곧 공(空)이며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동아시아 불교는 상좌불교나 영혼지향적인 인도철학들과 달리, 세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유가와 도가처럼 세계 내에서의 구원을 추구하는 “세계 긍정적인” 종교이다. 도가철학의 영향 아래 피어난 중국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선불교는 이러한 “세속” 속의 영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불교다.
둘째, 동아시아 불교는 개별 존재자들이 각기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존관계 속에서 통전적이고 유기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도가 및 유가의 유기체적 세계관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은 만물이 상호 의존적이며 결코 독립적이고 고정적인 실체(svabhāva)가 아니라는 연기론(pratĪtyasamutpāda)에 바탕하고 있다. 중국의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대승불교 철학은 세계를 부단히 변하고 운동하는 것으로 — 개별적 사물로서가 아니라 상호 의존하면서 변화하는 우주 기운의 흐름으로 — 파악하는 역동적 실재관을 공유한다. 불교가 실제로 이러한 우주적 기운에 대해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변화하는 세계를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실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사물의 상호연관성을 통하여 불교는 공(空, sunyata)이라는 만물의 실상을 간파해냈다. 공은 사물들이 이름과 개념에 상응하는 고정되고 독립적인 본성과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물의 일반적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물들이 각기 고유한 존재와 본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무수한 사물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곧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공은 아무 형상도 없는 황량한 세계가 아니라 화려한 상의 향연이 펼쳐지는 세계이다. 공의 지혜를 통해 일단 사물의 실체성을 부정하면, 다양한 형상과 이름으로 충만한 묘유(妙有)의 세계가 펼쳐진다. 동양화에는 이런 도가와 선(禪)의 자연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셋째, 개별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인식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연기론은 기본적으로 통전적이고 비원자론적인 사물 이해를 갖고 있는 중국의 유기체적 자연주의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물들은 단선적이고 외적인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반응하고 공명하는 유기체적 통일성의 관계망 속에 있다. 화엄사상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실재관은 이런 통전적 세계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인간관은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가와 도가의 인간관에 부합된다. 아시아적 정신에는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이나 원죄와 같은 관념은 없으며 인간본성에 대한 비관론적 시각도 없다. 자연이든 인간본성이든 본래부터 선하고 완전하다. 이는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인문 정신과 영성의 근본토대이다.
마지막 다섯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세 철학전통 — 도가, 유가, 불가 — 은 인간의 언어와 분별적 사고가 도(道), 천(天), 공(空)으로 불리는 궁극적 실재의 본성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궁극적 실재는 철저하게 세계에 내재적이지만, 인간의 지성과 사고로는 그 미묘함과 깊이를 간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 자연주의에서 인생의 최고목적은 개념적 매개 없이 직관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이 궁극적 실재와의 완벽한 합일을 체화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세 전통 모두 우리의 언어적 구성 너머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말이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세 종교를 동시에 믿으면서도 별로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것을 서구적 시각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지만, 대승불교나 도가와 유가 사이에서는 이상할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근본적인 사상의 일치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현상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일부 사상가들은 심지어 삼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IV. 자연의 길
그렇다면 동양의 자연주의는 자연의 길을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았을까? 자연은 어떻게 운행되며 그 원리는 무엇인가? 자연에 대해 아시아인의 마음에 가장 인상적이고 명백한 사실은 자연이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변화(易)는 자연의 길이다. 동아시아 자연주의 정신은 시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자연주의 정신은 고대 서구의 형이상학처럼 변화하는 세계로부터 불변하는 초시간적 인 세계로 탈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영혼 중심적인 인도 철학자들처럼 반복되는 생사의 세계나 물질계를 벗어나려고(解脫, moksa) 하지도 않았다. 동아시아 정신은 우주에서 “집에 있는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인들은 인간의 삶의 안전한 기초로서 자연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동아시아 형이상학의 정신과 영성은 자연의 움직임이 매우 질서정연하고 신뢰할만하기에 시간과 변화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자연의 과정은 계절의 변화나 낮과 밤의 변화처럼 순환적이며 반복적이기에 안정적이다. 자연은 길에서 일탈하거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도덕경』의 표현대로 “되돌아 옮은 도의 움직임이다.” 자연의 운동에는 신뢰할만한 패턴이 있기에 인간의 삶은 이를 터득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룰 때 복되고 안전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아시아 자연주의의 인생관이자 지혜였으며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시아 자연주의는 자연의 질서 있는 운행을 두 가지 대립적이지만 상보적인 음양의 끊임없는 교호작용으로 보았다. 음양의 규칙적 전환은 빛과 어둠, 불과 물, 하늘과 땅, 태양과 달, 남과 여, 적극성과 수동성, 운동과 정지, 단단함과 부드러움 등으로 표상된다. 음양은 대립적이지만 모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어떤 위치도 고정적이거나 최종적일 수 없으며, 언제나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음과 양은 우주의 근원적 기인 도의 두 가지 양태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생에 발생하는 모든 일은 아시아 자연주의에 의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두 가지 힘의 교호작용에 의해 설명된다. 인간의 삶은 기의 운동이 지닌 리듬과 패턴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아시아인은 이러한 자연주의적 시각에 입각하여 삶의 기예에 대한 중요한 실질적 지혜를 찾아냈다. 중용의 지혜, 극단을 회피하고 지나침을 경계하고 지나침보다는 모자람이 더 낫다고 보았다. 인내와 기다림의 지혜, 인간의 운세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참고 기다림의 지혜를 깨달았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약함이 참된 강함이라는 역설의 지혜도 이런 데서 생겼다. 자연의 만물은 각기 제자리가 있고 때가 있으며, 어떤 것도 무용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고 보았다. 이것이 자연의 길을 통찰해서 얻은 중용의 지혜이며, 역사와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동야인들의 지혜였다.
V. 해월의 삼경 윤리
지금까지 나는 서구의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유신론과 무신론의 이원적 대립7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아시아의 유기체적 자연주의에 따른 통전적 세계관의 기본 정신을 서술했다. 여기에는 서구와 인도의 영성을 특징짓는 정신/물질의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영성이 있고, 세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연의 길에서 드러나는 도(道)와 천(天)과의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구원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자연주의는 범 아시아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나의 관심은 동아시아의 다양한 철학 학파들과 전통들 사이의 차이점을 규명함으로써 한국 철학사상의 특수성을 밝히려는 데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이제부터 19세기 후반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천도교 - 문자 그대로 ‘하늘의 길’ - 사상을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정신을 보여주는 전형적이고도 독창적인 사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천(天)”과 “도(道)”라는 두 글자가 암시하듯이, 천도교의 근본정신은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이지만 그 실천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이 글의 관심사는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에 의해 제시된 삼경(三敬)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 경전에 실린 삼경의 윤리를 제시하는 원문은 아래와 같다.
사람은 첫째로 한울을 공경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이것이 돌아가신 스승님께서 처음 밝히신 도법이라. 한울을 공경하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 하면 한울은 진리의 중심을 잡은 것이므로써이다. 그러나 한울을 공경함은 결단코 빈 공중을 향하여 상제를 공경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공경함이 곧 한울을 공경하는 도를 바르게 아는 길이니,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이 곧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라”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될 것이요,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나의 동포라는 전체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요,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과 세상을 위하여 의무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한울을 공경함은 모든 진리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움켜잡는 것이니라.
둘째는 사람을 공경함이니 한울을 공경함은 사람을 공경하는 행위에 의지하여 사실로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니라. 한울만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함이 없으면 이는 농사의 이치는 알되 실제로 종자를 땅에 뿌리지 않는 행위와 같으니, 도 닦는 사람이 사람을 섬기되 한울과 같이 한 후에야 처음으로 바르게 도를 실행하는 사람이니라.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이르라 하셨으니, 사람을 공경치 아니하고 귀신을 공경하여 무슨 실효가 있겠느냐. 어리석은 풍속에 귀신을 공경할 줄은 알되 사람은 천대하나니, 이것은 죽은 부모의 혼은 공경하되 산 부모는 천대함과 같으니라. 한울이 사람을 떠나 따로 있지 않는지라, 사람을 버리고 한울을 공경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해갈을 구하는 자와 같으니라.
셋째는 만물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만물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氣化)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아시아 자연주의의 근본정신에서 볼 때, 해월 사상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늘 공경은 해월 당시에는 일반적이었고 오늘날도 한국문화에서 일정 정도 이어지고 있다. 해월은 사람 공경을 보다 강조하고 있으며, 사람 공경과 하늘 공경의 불가분리성을 “사람을 하늘과 같이 공경하라(事人如天)”는 말로 표현하였다. 사람을 성별, 계급, 나이 등에 관계없이 하늘 같이 공경하라는 사상은 해월 당시 조선의 계급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우리는 1894년에 발생한 대규모의 동학혁명 운동에서 이러한 혁명성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 이 보다 더 충격적이며 혁명적인 해월의 사상은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모든 존재자들을 향한 보편적 공경의 윤리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는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한다”는 해월의 말은 내가가 아는 한 인류 역사상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도덕적 의무를 천명하는 최초의 선언이다. 여기에는 우주 생기력의 근원인 하늘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들을 낳는 어머니 자궁과도 같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 실제로 해월은 나와 타인, 나와 만물이 모두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한 ‘동포’(同胞)임을 곳곳에서 천명하고 있다.
해월이 보는 세계는 하늘의 “혼돈적이고 근원적인 생기력”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만물은 하늘에서 오는 생기력을 공유하는 거대한 유기체적 공동체로서, 해월은 “물건마다 한울이요, 일마다 한울이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범신론적” 시각에서 해월이 제시하는 생명체와 무생명물에 대한 보편적 공경의 가르침이 나올 수 있었다. 거대한 유기체적 세계는 하늘의 동일한 생기력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성스럽고, 중요하지 않는 존재자는 하나도 없다. 해월은 현대적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의 “본유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인정했으며, 그 범위를 무기물에게까지 확장했다. 그가 만일 알버트 슈바이쳐의 생명경외(Ehrfurcht)의 윤리를 들었다면 그는 동의하였을 것이 명백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까지 똑같은 공경의 윤리를 확장시킬 것을 주창했을 것이다. 해월의 눈에는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모두가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성스러운 기에 참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해월의 보편적 공경의 윤리는 무엇보다도 땅으로 향한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해월은 한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서 내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이 어린아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팠노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땅을 어머니의 살갗처럼 여기라고 가르쳤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땅에 물을 멀리 뿌리거나 침이나 코를 함부로 풀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머니의 살을 사고팔고 할 수 없듯이 땅을 사고 팔 수 없다고 백인에게 말했다는 한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해월에게 땅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조심스럽게 돌보아야만 할 “어머니 땅”(mother earth)이었다. 땅은 무기력한 물질의 덩어리도 아니고 인간의 삶을 위한 자원만도 아니다. 땅은 해월에게 끊임없이 다채로운 생명의 형태들을 산출하는 기로 가득한 유기체였다.
해월은 곡식을 땅의 젖이라고 했다. 땅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을 부모님처럼 모시라고 가르쳤다. 식고(食告)는 하늘과 땅을 살아계신 부모님처럼 공경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먹음을 알리는” 간결한 천도교 의례이다.식고의 원리를 알면 도통한다고 해월은 말했다. 해월에게 식사는 신성한 행위인 것이다.
해월의 눈에는 생명계 전체가 거대한 “하늘이 하늘을 먹는(以天食天)” 성사적(sacramental) 공동체였다. 이천식천은 모든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들과 거미줄 같은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공동체(web of life)라는 오늘날의 생태학적 통찰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모든 생명체가 하늘로부터 받은 기의 현현들이기 때문에 해월에게 이천식천은 문자 그대로 진리였다. 그는 같은 종끼리는 연대와 협력으로 살아가는 반면에 다른 종들끼리는 서로 먹으면서 살아간다고 보았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면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늘의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이천식천은 하늘이 만물을 차별 없이 기르는 방식이라고 해월은 지적한다. 해월에게 자연은 실로 보편적 사랑의 우주공동체, 서로 생명을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다. 게리 스나이더의 말 대로, “식탁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단지 현실적 통찰 이상이다. 그것은 신성이 나약하고 유한한 우리 개인들 속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며 그 성사적 측면을 수용하는 것이다.”
해월은 생태·환경의 위기가 우리의 행성과 인간 삶의 주된 위협이 되는 시대를 살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환경윤리를 논하는 오늘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면, 그는 필경 환경문제는 단지 윤리의 문제만이 아님을 경고했을 것이다. 해월의 보편적 공경의 윤리는 환경문제에 대한 도덕적 접근을 훨씬 넘어선다. 자연의 모든 존재에 대한 근원적 차원의 공경심 없이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하찮은 존재들까지 공경하는 겸손을 배우지 못한다면 오늘의 인류가 처한 위기의 극복은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을 것이다.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우리에게 다가올 대재난이 단지 기술적인 자원 관리의 차원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 있다. 마음의 근본적 변혁, 삶의 양식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위기의 타개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자연의 성스러운 깊이를 느끼는 근원적 감성의 회복이 필수적이다. 아시아 자연주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이를 향한 중요한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