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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이인로(李仁老 ; 1152~1220)가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진양계산승치영남제일 ; 晋陽溪山勝致嶺南弟一)'라고 예찬한 음풍농월(吟風弄月)과 신선의 고을(仙鄕)인 진주성을 찾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을 벌인 진주대첩의 진주성(晋州城) 사적지는 원형으로 잘 복원되어 있다.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전적지이다. 몇번이나 탐방하여도 항상 새롭고 신선감을 주는 역사 사적지이며 진주시민의 휴식공원이다.
이번에 진주 가는 길이 있어 시간이 남아 진주성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들아가는 초입에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CNN GO'에서 선정한 한국 관광지 Best 50 촉석루, 진주성 한국 관광 100선 3년 연속 선정》이란 현수막이 진주성의 북대문인 공북문(拱北門) 성벽에 걸려있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조선 말기 진주 목사를 지낸 목민관 정현석(鄭顯奭, 1817~1899, 83세 졸)의 족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본관이 초계로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시조인 고려의 대학자 정배걸(鄭倍傑 ; ?~1051)의 27세손으로 강원도 횡성(원주시 인근)에서 났다.
시조 정배걸은 사숙(私塾)을 열어 홍문공도(弘文公徒)라고 불렸는데, 이는 십이도(徒) 중의 하나였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守太衛)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광유후(光儒侯)에 추증된 인물이다.
정현석의 자는 보여(保汝), 호는 박원(璞園)으로 24세 때인 1840년(헌종 6), 증광진사(增廣進士)에 합격하여 30세 때 후릉참봉을 지냈다. 이후 내직으로 삼조(三曹)와 사부(四府)의 내직을 두루 지내고 외직으로 10읍의 수령을 역임하고 황해도 관찰사,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10읍의 수령을 지내면서 치적이 현저하여 누차 은전(恩典)을 받았으며 고을마다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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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의 치적이 현저하다는 기록은 진주 목사 재임 때의 기록에도 나온다. 의정부의 좌목 인용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다음~
1869년(고종 6, 기사년, 청 목종 동치 8)
음력 6월 21일, 좌목(座目 ; 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
진주 목사 정현석을 잉임(仍任 ; 기한이 다 된 관리를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게 함)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啓 ; 임금에게 올리는 말) 기록에 의하면,
의정부가 아뢰기를, “진주 목사 정현석(鄭顯奭)은 치적이 현저하여 연전에 이미 자급(資級)을 올려받는 포상을 입었습니다. 이번에 임기가 다하는 날이 가까와졌는데, 백성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잉임(유임)시켜 책임지고 효과를 완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傳敎 ; 임금이 명령을 내림)하였다.
註 ; 자급(資級)~? ; 벼슬아치의 직품(職品)과 관계(官階), 조선 시대는 정(正), 종(從)의 각 품(品)마다 상(上), 하(下) 두 자급이 있었으므로 총 36자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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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는 1860년(철종 11) 음성현감으로 재직 때 세워진 선정비가 현존한다. 비 앞면에는 '현감정후현석애민흥학영세불망비(縣監鄭侯顯奭愛民興學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1864년(고종 1)함경도의 고원군수(高原郡守) 재직당시 치적이 높았으며, 1866년(고종 3) 삼가 현감으로 있을때, 남명 조식 선생이 시를 읊었던 정금당(淨襟堂) 앞에 있는 수정지(水晶池)에 연꽃을 심어 연지로 만들기도 했다. 삼가현 객사 정금당 앞에는 수정지와 수정강(水晶江, 水晶川 ; 현, 양천강)이 흐르고 있다.
삼가현(三嘉縣) 객사인 봉성관(鳳城館)은 현재 삼가면사무소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객사의 바깥채인 정금당(淨襟堂)은 1592년 음력 5월 초 임진왜란에 합천 삼가의 정인홍, 박사제, 노순, 정질 등 유림과 장정이 창의(倡義)한 곳이다. 1919년 삼가장터 3.1만세운동 때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 건물이기도 하다. 정금당은 훼철되었지만 사적지로 복원이 요청된다.
1871년(고종 8) 삼가읍지에 나와있는 정금당은 일제시대에 훼철된 후, 목재와 기와 등 자재(資材)를 1923년 계해(癸亥) 10월 쌍백면 죽전리 이암마을 초계정씨 재실인 이암재(耳巖齋, 일명 ; 龜巖齋)를 지을 때 재사용되었다. 이암재 건립은 1927년 삼가농업보습학교 기성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한 정의규(鄭義圭)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고 한다.
구(舊) 삼가아문(三嘉衙門) 앞과 쌍백국도변 3개처에 박원(璞園) 정현석(鄭顯奭)의 송덕비(頌德碑)가 소재하고, 아사(衙舍 ; 東軒),객사(客舍 ; 봉성관(鳳城館), 정금당의 정위치는 삼가현지(삼가읍지)에 전한다.
註 ; 정현석 송덕비 현 소재지 ; 삼가면 일부리 면사무소 인근 기양루 앞 송덕비 집합군 맨 뒤에 위치, 의령 대의면 마쌍리에서 삼가면 외토리 남명 조식 선생 생가지 뇌룡정 사이의 양천강 다리(옛 잠수교) 건너기 전의 대의면 쪽 도로변에 위치한다. 쌍백면 국도변의 나머지 1개는 현재 확인 중이다.
정현석은 51세 때인 1867년(고종 4)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부임하면서 교방가요 편찬을 착수하기 시작해 1870년(고종 7) 김해부사로 부임해 2년만에 ‘교방가요’를 완성했다. 진주 목사는 1870년까지 재임하였다.
의기사(義妓祠)는 논개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에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 1668~1742)가 창건한 이래 정현석이 진주 목사로 부임한 다음해인 1868년(고종 5) 경상우병사와 의논하여 의기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의 중건을 의논 정현석에 의하여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정현석은 교방기구(敎坊機具)를 재설치하고,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신설하였다. 문장명필(文章名筆)을 겸비한 선비로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곧 바로 ‘의암별제’를 만들어 진주의 기녀들로 하여금 논개의 충절을 기리도록 했다.
교방가요(敎坊歌謠)는 진주 목사 정현석이 1867년(고종 4)에 당시 지방 교방에서 연행되던 춤과 노래의 종류, 순서, 가사 등을 엮어 기록한 책으로 무용 분야 연구에도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여러 정재(呈才)와 민속무용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특히 검무(劍舞)의 경우 다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무보(舞譜)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진주논개제는1868년 정현석이 창제한 것으로서 제향에 악, 가, 무가 포함되고 여성들만이 제관이 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제례인 의암별제를 서막으로 진주오광대를 비롯한 민속예술과 진주 기생들이 남긴 교방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통문화와 여성을 테마로 한 축제가 되었다.
1867년 편찬을 착수하여 1872년(김해 부사 재임 때임) 정현석이 편찬한 교방가요는 진주 교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소리와 춤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교방가요에 기록된 진주한량무는 1979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민속무용이다.
논개바위(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의 서쪽 면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휘호 각자(刻字)도 항간에 알려진 1629년(인조 7)에 진주 선비 정대륭(鄭大隆 ; 1599~1661)의 서쪽 벽면 전서체와 한몽삼(韓夢參 ; 1598~1662)의 남쪽 벽면 해서체 글씨는 당시 젊은 선비(정대룡 ; 31세, 한몽삼 ; 32세) 두 사람이 아니고, 정현석이 진주 목사 재임 때 유묵체 글씨를 따서 새겼다고 전해진다.
구전으로 전해진 의기 논개의 야담을 최초로 담아내어 소개한《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柳夢寅)《 1559년(명종 14)~1623년 (인조 1)》이 인조반정 후 역률(대역모사건)로 다스려져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은 1623년(인조 1)과 정대륭, 한몽삼의 1629년(인조 7)에 새긴 연대는 6년 후로 시대가 너무 근접하여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겠다.
일찌기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 지방의 양반들과 백성이 이 바위를 의암(義巖)이라고 부르긴 했어도 바위면에 의암 각자를 새긴 연대는 조선 후기로 보여진다
조선시대의 지방 수령은 오늘날 3부의 전권을 쥐고 있었기에 촉석루(矗石樓)《별칭 ; 남장대(南將臺)》앞 명승지의 의암에 지방의 젊은 선비가 함부로 각자하기란 어려우며, 관아의 허락(지시) 없이는 깊은 강물 회오리 소의 바위 벽면에 받침 난간대까지 설치하여 시공하는 글자 새김은 관아의 지원이 아니고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자연석 불툭 불툭한 암벽면 '의암(義巖)'의 대각자(大刻字)는 사각형의 깍아낸 평면에 새겨져 있다. 정현석은 1870년(고종 7)에 김해 부사《재임 ; 1870년(고종 7) 음 6월 8일~1873년(고종 10) 음 12월 27일》로 전임되어 갔다.
그는 1870년(고종 7) 김해부사로 있으면서 김해부의 흥성을 기원하는 사찰인 가야국의 고암(古庵)인 흥부암(興府岩)의 법당 중창을 적극 지원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송빈(宋賓)의 송담서원이 훼철된 후 지방 유림들의 건의로 1871년(고종 8) 김해 부사 정현석(鄭顯奭)이 나라에 보고하여 삼충신을 기리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면서 류식(柳湜)도 추가로 함께 배향하여 사충신을 기리게 되었다.
1872년(고종 9) 2월에 김해 사충단(四忠壇 ; 宋賓, 李大亨, 金得器, 柳湜) 축조하고, 동년 의병장 송빈의 '송공순절암기(宋公殉節岩記)'를 남겼다. '宋公殉節岩(송공순절암)'의 각자도 정현석의 글씨다. 사충단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되었다.
1873년(고종 10) 부사 정현석이 폐사된 호계사(虎溪寺)에 있던 파사석탑(婆娑石塔, 일명 ; 진풍탑, 鎭風塔)을 현재의 허왕후릉으로 이전하였다. 허물어진 봉토를 높이고(개축) 대대적인 수리 정비를 하였다. 정현석은 삼국유사 등 역사 사적에도 밝은 애민흥학의 선각적(先覺的) 관료(官僚)였다. 파사석탑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이다.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1871년(고종 8)~1873(고종 10) 김해 분산성(이칭 별칭 ; 분성산성, 만장대)을 다시 축조하였다. 분산성의 자연석 바위면에는 대원군의 친필 휘호인 만장대(萬丈臺)와 낙관(落款, 도장)이 새겼는데 이것도 대원군의 휘호를 한양으로부터 내려받아 김해 부사 정현석이 1873년에 새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분산성에 올라 만장대라 명명한 것이나, 만장대 휘호 각자, 충의각의 대원군 비석으로 볼 때 대원군이 성곽 축조 진행 확인차 2~3 차례 김해부를 직접 내방한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에 김해부는 동래부와 함께 일본을 비롯한 구미 해양세력과 접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다. 당시는 대원군의 섭정 시기(섭정기간 ; 1863년 12월~1873년 11월)로 어린 고종(당시 12~ 22세)의 왕권강화를 위하여 쇄국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분산성 개축 축성 완공 무렵 부사 정현석이 대원군으로부터 휘호를 내려받아 각자(刻字)한 것이다. 분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 특징인 테뫼식(鉢卷式)을 따른 점을 미루어 그 시축(始築) 연대가 가락국 금관가야의 중심 근거지임을 추정할 수 있다. 둘레 약 924m가 보존되어 있으며 분산성은 국가사적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충의각(忠義閣)에 있는 4개의 비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분산성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려말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朴蔿)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는 조선 말기 김해부사로 부임한 정현석이 1871년(고종 8)에 다시 산성을 축성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그리고 2기는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로 김해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축조한 후 이를 허가해준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고려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 관련 글도 새겨져있다.
또한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府使通政大夫鄭顯奭永世不忘碑)”는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1873년(고종10)에 건립한 것이다.
김해와 덕원(옛 함경도 함흥)에서 부사로 재직할 당시 양지역이 연해의 요충임을 고려, 이 지역의 방비와 교육, 농잠, 광무(鑛務) 등을 위한 인재의 등용과 장려책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분산성 개축, 김해향교 중수 등의 일을 했으며 1873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의 벼슬을 제수받아 서울로 올라갔다.
정현석은 부임한 고을마다 찾으면 찾을수록 치적과 사적이 계속 밝혀져서 놀랄 따름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지방관으로 충북 음성, 경남 삼가, 진주, 김해와 함경도 고원, 덕원과 원산, 황해도 해주 등지에 많은 족적을 남긴 조선 말의 선각적 관료이자 유능한 현신(賢臣)이었다.
정현석의 거처간 주요 중앙 관직과 지방 외관직은 동지돈녕부사(1886), 첨지중추부사, 공조참판, 한성부좌윤, 형조참판, 호조참판(1891), 황해도관찰사(1894), 황해도병마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저서 수십권이 있으며 그 중 계비번사고(戒備蕃司考), 계비고(戒備考), 유원고(柔遠考), 경개록(傾蓋錄), 여지고(輿地考), 기계도설(器械圖說), 백행록(百行錄), 오총도관견록(五總圖管見錄), 시종록(始終錄), 교방가요(敎坊歌謠) 등이 세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그 중 교방가요는 진주목(현 진주시) 지방 교방의 노래와 춤에 관하여 엮은 책으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자료이다. 진주 교방가요는 현재 의기 논개제에서 시연하는 무형문화재(2017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이다. 진주목사 정현석의 문화사적 치적은 실로 지대하다 하겠다.
조선 말기 1910년의 일제강점(경술국치, 국권박탈, 한일합병늑약) 이후 36년 일제강점기 침탈로 우리 역사의 단절이 있었기에 조선 말기 지방 관리의 사적에 대하여는 연구 미비로 대부분이 역사 속에 뭍혀 있음을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