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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 [過猶不及] 은 금물 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은 한번쯤 되새겨 볼 수 있는 지침이 되는 말이다. 모든 것은 과하면 화를 부른다는 말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자신의 속을 채우든, 겉을 치장하든 마찬가지이다. 배고프다고 폭식하면 배탈이 나거나 몸에 이상을 초래하고, 사람과의 첫 만남에 이성에 대한 과도한 물질 공세를 하면 상대방이 거부하게 되고, 지나친 친절은 대려 상대의 부정적인 의심을 초래 하는 경우도 있다. 하심의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은 인간 사회에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나친 친절과 예의는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과도한 친절은 어떨 때에는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는 속성을 지닌다.
그 인정받음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업그레이드되고, 실추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정받음 속에는 두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다. 순조롭게 나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긍정적으로 단정 지울 수 있을 것이며, 후자는 부정적으로 결론 지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인정받기 위해 ‘친절’은 몸과 행위로 행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 형태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친절한 모습을 보이다가 스스로의 감정적인 소용돌이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감정의 조절이 잘되지 않는다. 혹,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타인으로부터 거절당하면 어쩔까.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은 혹, 상대방이 ‘따끔한 일침’의 말을 할 때에는 마음의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제가 파 놓은 함정에 오히려 스스로 빠진다”는 말처럼, ‘과도한 친절’은 인간이 팔 수 있는 ‘큰 함정’일 수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빠지는 함정이다. 그것은 인간은 보편적으로 끊임없는 욕구를 가지며 그 욕구가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난한자나, 부유한자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가난한자에게 ‘친절은 저렴한 도구’가 될 것이며, 부유한자의 ‘친절’은 물질로 포장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가 성공이나 행복을 방해 하는 경우도 많다.
영국의 배우 로빈 챈들러는 말했다. “착하게 구는 병은 알코올 중독보다 더 많은 생명을 불구로 만든다. 착한 사람은 안 된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끝없이 남에게 맞춰 나간다.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에 도달 하지 못한 채로” 라고
그렇다.
친절은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개인을, 사회를 밝고 안정되게 만드는 교육에 의한 인간 내성의 소중한 인성의 예절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유연성의 문제이며, 융통성의 문제이다. 유연성과 융통성이 결여된 ‘절대적 친절’은 사회를 ‘아부’와 ‘아첨’과 ‘부조리’를 잉태하는 ‘마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라는 생명체를 알코올 중독보다 더한 ‘사회적 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 정치, 경제, 문화 다방면에서 사회가 혼탁해 진 것은 ‘절대적 친절’이 낳은 결과물 이다. 또한 친절은 시간을 요한다. 어떨 때에는 무례하기 작이 없는 사람의 괴변을 들어 줘야 하고, 불평불만의 소리도 들어주며 시간을 활해 해 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는 낭비된다. 그러나 그러한 관대함이 지속되면 그 관대함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남도 알아야 한다. 인간이란 의지적 존재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 되어 있는 ‘선의지’마저 상실하고 산다면 ‘인간’이란 자체의 존귀한 가치를 상실하며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할 때 진정으로 ‘예’하고 ‘아니오’할 때 진심으로 ‘아니오’ 하는 것이 인간의 ‘ 선의지’의 참 본질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친절’이란 함정에 빠져 누군가의 욕구 충족을 위한 대상물이 될 필요는 없으며 강박관념에 빠질 필요도 없다. 그러다가는 오히려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수 있다. 더욱이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 어떠한 제도적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의한 것이기에 어리석은 의지에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몸과 시간을 지나치게 내 줄 필요는 없다.
친척이니, 동료이니,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굽실거리며 인생의 여정 길을 지워지지 않는 오점의 상처를 심하게 남기면서 살 필요는 없다. 유연하게, 부드럽게 살되 ‘과도한 친절’이란 함정에 빠지지 말고 산다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자기의 주체’가 없는 삐에로처럼, 해바라기처럼 살지 않을 것이며, “과유불급”의 도리를 알면서 진정 자신의 행복과 삶의 만족이 무엇인가를 느끼며 스스로를 기쁘게 하며 살지 않을까? 싶다.
- 글/하운 김남열(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