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 입학한 학생은 예과 2년, 본과 4년을 마치고 의사 면허를 따기 위해 시험을 본다. 시험에 합격한
후 인턴 2년, 레지던트
3년 정도를 거친 후에 전문의가 된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보통 10년 이상을 공부한다. 게다가 의대 공부는 힘들기로 유명하다. 그 전문의들 중 소수정예가 의대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내 번역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의대에 비유(?)하자면 본과 4학년생 정도의 실력은 되는 것 같다. 본과 4학년생이 의대생을 위한 교과서를 쓰는 장면이나 의대생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나는 번역을 가르치는 책을 쓰려고 하고 있다. 너무 건방지고
무모한 짓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번역을 가르치기에는 번역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적어도 한국의 학술 번역계에서는 나에게도
남들을 가르칠 자격이 약간은 있어 보인다.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50권 정도나 되는 변역서들을 원문과 대조하면서 검토해 보았다. 그
중에서 학술 번역을 나만큼 또는 나보다 잘 한 번역가를 아직까지 단 한 명 밖에 찾아내지 못했다. 한국
학술 번역계에는 전문의에 비견할 만한 번역 실력을 갖춘 번역가가 지극히 드문 것 같다. 학술 번역서를
출간한 번역가들 중 1%나 될지도 의문이다.
번역 입문서는 많이 있지만 학술 번역가 지망생을 위한 맞춤 입문서는 없어 보인다. 나는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학술 번역 입문서가 아예 없다면
아직 실력이 부족한 내가 쓰는 책도 쓸모가 약간은 있을 것 같다.
보통 번역 입문서에서는 원문을 제시하고, 번역가 지망생의 번역문을
제시하고, 글쓴이의 모범 번역을 제시한다. 이 때 글쓴이는
독자에게 일단 원문을 스스로 번역해 보라고 강력히 권고한다.
나 역시 독자가 먼저 스스로 번역해 볼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먼저
스스로 번역해 보아야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다. 번역 공부에서도 이 말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자신이 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많이 할수록 번역 실력이 더 빨리
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번역을 번역 고수에게 보여준 후 난도질 당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쌍방향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스스로 열심히 번역을 해
본 후 모범 번역과 비교해 보면 난도질 당하는 것과 얼추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창피한 경험을
하나씩 해 가면서 깨닫는 것과 그냥 눈으로 읽고 넘어가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스스로 번역을 할 때에는 정성을 많이 들여서 해야 한다.
1.
우선 원문을 한 번 정독한다. 물론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나오는 경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전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인터넷도 열심히 뒤져보아야 한다.
2.
초벌 번역을 한다.
3.
원문을 덮어 놓고 번역문을 정독한다. 그리고
수정할 곳을 찾아 밑줄을 쳐 놓는다.
4.
원문과 번역문의 모든 문장을 꼼꼼히 대조하면서 수정한다.
5.
다시 원문을 덮어 놓고 번역한 것을 정독한다. 그리고
수정할 곳을 찾아 밑줄을 쳐 놓는다.
6.
밑줄 쳐 놓은 문장만 원문과 대조하면서 수정한다.
적어도 이 여섯 단계를 거친 후 본문과 모범 번역을 읽어야 한다. 번역을
대충 했다면 오역을 지적 당해도 별로 쓰라리지 않다. 실수일 뿐이라고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정말로 정성껏 번역했는데도 자신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정말 쓰라리다. 자신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번역 지망생의 번역문을 제시하는 대신 기존 번역가의 출간된 번역문을 제시할 생각이다. 이것이 기존의 번역 입문서들과 다른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번역
입문서이기도 하지만 번역 비판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기존 번역가들이 학술서를 어떤 식으로
번역하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번역서들의 질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을 보고 “이 정도는 나도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렇다.
한국 학술 번역계가 전반적으로 한심한 수준이기 때문에 번역을 조금만 공부해도 남들만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희망만 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그런 실력으로 번역을
하기 때문에 돈을 별로 못 번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번역할 사람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고를 때 실력을 별로 따지지 않음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번역을 잘 해도 빠르게 인정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번역을 잘 하려면 어느 정도는 희생 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 “전문의”의 수준에 근접할 수 있도록 계속 번역 공부를 할 생각이다. 그러면서 이 책을 업그레이드 할 것이다. 초고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은 몇 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2011-06-23
첫댓글 이덕하 선생님께 인정받은 번역가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