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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5 열두제자강해 12 나다나엘(바돌로매) 식도성결교회
제목 : 주님을 만난 나다나엘
본문 : 요 1:43-51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께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하시던 주요 무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그 때부터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지역 출신 제자로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 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시대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앗수르 땅으로 끌려가고, 앗수르의 다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으므로, 남 유다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지만, 이방인으로 취급을 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마리아 땅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주로 사회적인 하층민이 거주하던 곳인데, 주로 어업이나 목축업을 하고 살았으며, 다행히 그곳에는 국제적인 교역로가 있어서 그곳을 관리하여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습니다. 헤롯 왕 때에는 주민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목욕탕, 체육관, 경기장과 같은 것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갈릴리는 이방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므로 순수한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외받는 대상이 많이 거주했던 이곳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위쪽에 있는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다니기까지 하였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기 위하여 요단강 건너편 길을 택하신 것으로 보고 있고, 이때에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만나 제자로 삼았는데, 빌립은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을 좇기로 결정을 하고, 곧 바로 그 비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1.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제자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왕상 4:25).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만드는 그늘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휴식처나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습니다. 대부분의 집들은 방을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도 그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기대하면서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에 있을 때 보았다는 말씀은 그를 어느 시점에 잠깐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와 신앙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고 하신 것이 나다나엘이 어쩌다 한번 무화과 나무 밑에서 기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무화과나무 그늘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요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는 고요한 가운데 늘 기도에 힘쓰며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회당과 큰 길 어귀에 서서 나 보란 듯 기도했던 바리새인들(마 6:5)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나다나엘 어떤 모습이 진실하고 올바른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을 진실한 행동으로 받으실까요? 이제 고요한 가운데 겸손하게 무릎 꿇고 은밀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든 봉사를 하든 은밀한 가운데 하는 여러분이 될 때에(마 6:4, 6, 18)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요, 스스로에게도 더 큰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2.이름의 뜻(Batholomew // Nathanael)
1)바돌로매 - 그는 왕족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실제로는 귀한 신분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마10:2-4에 보면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2)나다나엘 -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입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는 ‘나다나엘’에 대한 기사가 없고,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가 앞에 붙으면 그 뒤에 이름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마 16:17에서 “바요나 시몬”이라고 할 때에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바돌로매는 정식 이름이 아니고 ’나다나엘‘이 정식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이유: 마태, 누가, 마가와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요21: 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합니다.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도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습니다. 요한은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은 친구였으며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2.나다나엘은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1)나다나엘은 묵상을 즐겼습니다.
무화과 나무 밑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께서는 “너 혼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배에 없으면 정원의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를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신앙깊은 사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정직한 마음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늘 묵상하는 나다나엘의 습관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습니다.
(예)우리는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십대의 아이들은 귀가 아프게 스마트폰과 MP3 음악을 들으며 어른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텔리비젼을 켭니다. 우리는 또 매우 바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다나엘 시대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때론 조용하게 생각하고 기도할 장소를 가져야 합니다. 이삭은 한밤중에 들로 나갔습니다.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하나님과 친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을 피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후 은밀한 곳을 추구했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밑에 던져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홍수와 같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회개했다.”
2)나다나엘은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인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해주며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적인 세상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고 규모있는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빈방을 기도장소로 마련하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기도실의 벽을 막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은 묵상하고 기도하는 열성 이상으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약속을 찾으려고 구약을 공부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습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메시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무화과 나무 밑에서 구약성경을 펴들고 메시야의 강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즉석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2.나다나엘은 회의론자였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열심으로 설명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요 1:46)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마10:2-4절을 보면 바돌로매는 빌립과 연관하여 기록되고 있으며, 마 10:3; 막 3:18, 눅 6:14을 보면 베드로, 야고보의 형제와 더불어 예수님의 처음 여섯 제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기로 한 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나다나엘에게 소개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나다나엘의 처음 반응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부터 정복자가 올까? 나다나엘이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나사렛의 배경을 이해한 것은 부활과 다락방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알고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마 2:23/눅24:44-48)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성경을 끌어와서 해석을 하곤 했습니다.
정직한 회의론은 빛과 진리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나다나엘의 결심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의 적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해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습니다. 이들의 편견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인격과 위엄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나다나엘의 정직한 회의론은 더욱 상고하여 빛을 찾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의 개방성은 그의 성실한 정직한 마음은 가서 직접 보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3.나다나엘의 큰 발견
두 사람은 빌립이 예수와 헤어진 그 장소로 갔습니다. 빌립은 속에서 안달이 났고 나다나엘은 좀 흥분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모습은 이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1)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습니다(롬 9:6-8).
육신의 씨들은 아브라함을 믿고 행하며 그리스도에 앞서 메시야의 임하심을 간절히 고대하던 조상들과 같은 영적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은 영적인 씨에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나다나엘 속에는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교활하거나 속이는 피를 이어받지 않았습니다. 위선도 없고 간사함도 없기 때문에 성격은 맑은 물처럼 투명했습니다. 그는 어떤 말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숨겨진 동기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용하고 속이는 것까지도 용인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의 행운은 이루 말할수 없는 귀한 보석(예수)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함과 위선에 진노하고 꾸짖은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격을 속이지 않고 숨겨진 동기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의 의문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당황하면서도 나다나엘은 솔직하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요1:48)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1:48)하시는 메시야의 시원한 대답이 의문을 풀어 주었을 것입니다. 확신을 가진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나 도마의 경우만큼 의미심장하지 않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훌륭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마 16:16/요20:28)
빌립은 나다나엘의 반응을 보고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서 단 한 마디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와 보라” 그런데 뜻밖에 나다나엘은 이 말에 끌려 예수님께로 갔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 한 마디도 나누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품에 대하여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그 이름에 걸맞는 진실된 사람이 없고 외식적인 모습만이 가득했다고 마태복음 23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나다나엘은 진실한 사람으로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간사함이 없다고 하여 절대로 흠이 없다거나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정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였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께서 자신을 평가하는 말씀을 듣고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자신에 대하여 누가 말하지나 않았는가 알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계신 예수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를 당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즉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창 28:10-22). 주님께서는 나다나엘로 하여금 쫓기어 도망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나다나엘과 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목격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4. 나다나엘은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기적을 이루시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기적이 성취되면 뒤이어 또 기적이 성취되었습니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경은 눈을 뜨며, 벙어리는 말을 하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지고 큰 무리가 먹으며, 폭풍은 잠자고, 죽은 자는 살아났다. 때로는 어리둥절했으나 자신이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먹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배신의 밤이 오자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을 받으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부활이 있기까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믿음은 완전히 죽어있는 듯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파할 결심을 하는 새로운 삶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며 이 사닥다리는 죄지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준다는 것을 나다나엘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5. 생애
후에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짓고 모셨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습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교훈
1. 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듭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겠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자기의 약점을 끝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깨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져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여십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십시다. 그때부터 교정은 시작됩니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합니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줍니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었는데 ‘네 이미 잘 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라고 말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집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합니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의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한 전도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를 대상이요 구주로 믿어야 할 분일 뿐 아니라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여기면서도 막상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최대 명령인 복음 전파의 사명(마 28:19,20)를 저버리는 것이며, 혼자서만 구원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기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다나엘에게는 예수님께서 단순한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신적인 권위와 위엄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성도들의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나타나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도 입증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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