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가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16일에는 새 얼굴 정훈이가 처음으로 모임에 왔어요. 대학원에서 신앙인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고민하기보다 함께하는 가운데 길을 찾기 위해 왔다고 나누었어요. 환영합니다. ^_^
저녁 밥상을 나눈 뒤 김용옥 선생님이 쓰신 <논술과 철학 강의 1> 둘째, 셋째 대목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았던 두 문장을 나누었습니다. 주로는 둘째 대목에 마음의 밑줄을 많이 그어 오셨어요.
저는 지금 교정교열 일을 하고 있어선지, 죤 록크가 쓴 책 제목을 예로 든 것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영국경험론을 대표하는 사상사 죤 록크가 쓴 유명한 책으로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라는 철학서가 있다고 해요. 이 책 제목을 번역하면 ”사람의 이해력에 관한 한 수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을 ”인간오성론“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인간오성론“은 영국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제목입니다. 가장 핵심 문제는 바로 ”오성“이라는 ”understanding"에 해당하는 번역술어에 있습니다. ”understanding"은 당시 영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죤 록크는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학계에 논문으로 제출한 게 아니라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학계의 소수 전문지식인을 위해 쓴 게 아니라 혁명적 사회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선남선녀를 위하여 쓴 것이었습니다.
“인간오성론”이라는 번역은 한국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번역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화기 시대의 일본인의 번역을 우리가 답습한 것이었습니다. “오성”은 일반적인 “이해”보다는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앎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일본인의 일상어휘 속에도 “리카이료쿠”(理解力)와 같은 적합한 단어가 있으면서도 굳이 “오성”이라고 쓴 것은, 일상언어와의 연계성을 단절시키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한학인 송학의 훈련을 거친 개화기 일본사상가들이 서양사상을 일본인들이 재빨리 수용하지 않으면 서구문명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할 길이 없다는 구국의 신념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지식인들은, 우리나라의 조선왕조말기의 고루한 유생들이 그러했듯이, 서양사상을 하잘 것 없는 오랑캐사상으로 깔보았습니다. 그래서 서양사상을 과시하며 소개할 필요가 있어서 좀 더 심오한 단어로 번역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맥락을 알 길이 없는 후대에는 철학이 어려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번역용어 탓도 크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김용옥 선생님은 역사 이야기를 알려줌으로써, 다양한 비판을 통해 철학은 어려운 것,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설명해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토착적 사상이 빈곤한 이유는 바로 사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온 자들의 대부분이 그 사상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확보하지 못한 채 민중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갔고, 따라서 우리민족사의 흐름에 참여하면서 뚜렷한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1쪽)라는 날카로운 비판도 공감되었습니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선생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다. ... 좋은 선생님은 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을 지닌 학생 스스로 발굴해내는 것이다. 진정으로 나보다 무엇 하나라도 더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배움을 구하는 것은 학생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 그리고 선생님에게 무엇을 물을 때에는 구체적이고 순수한 물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철학적 문제에 대한 논리적인 물음이 있어야 하고, 묻기 전에 이미 그 주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논리적으로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찾아가서 ‘인생이란 무엇입니까?’라든가, ‘선생님의 나이가 몇이십니까?’, ‘선생님은 연애를 어떻게 하셨습니까?’라는 따위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짓이다. 구체적 맥락이 없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다. 그리고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것은 대답해야 할 하등의 가치나 의무가 없다. 한국 사람들은 ‘논리적 대화’의 전통이 너무 박약하다. 만나기만 하면 우선 사람의 외모에 대하여 평하기를 좋아하고, 사람의 평가에 관한 이야기나, 정치적‧사회적 사건에 관한 가십, 그리고 스포츠의 승패에 관한 이야기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다. ...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체 타인의 용모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을 인사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나서 누가 좋은 사람이라는 등, 누가 나쁜 사람이라는 등 이런 ‘사람이야기’를 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모두 반철학적인 사유이고 시간살해이다. ... 그러한 문제보다는 젊은이들은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쾌락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평등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 우주는 과연 어떻게 구성된 것일까? 우주는 유한할까 무한할까? 실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기 서 있는 저 나무를 나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 이러한 질문으로 청춘을 보내는 자만이 진리의 문으로 다가갈 수 있고 궁극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참 공감되었고요.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또는 그보다 어린 아이에게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어떤 부분은 공감이 되면서도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이야기 나누었어요.
생활에서 고민하는 것도 나누고, 늦은 시간까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다음 모임은 7월 7일 쇠날(금요일) 저녁 7시입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1~7장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첫댓글 나눴던 얘기들 다시 생각나네요. 다음 모임은 777 !!^^
책 나눔도 좋았는데, 삶의 고민들을 나눈 것이 마음에 많이 남았네요. 나눔이 감사했고, 나눌수 있는 곳이 있어 감사했습니다. :)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