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1)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조건들/ (2-1)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로마6,11)
<수 많은 과정 끝에 장애자인 내 아들과 나는 지난 9월 15일, 산 끝자락의 공기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작은 10평 아파트이지만 그저 감사가 넘친다. 아마도 이곳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것 같다. 수술을 앞둔 내 아들과 우편함과 대문에 “나자로의 집”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비록 가난하고 나이 들고 병들었지만 하느님이 도우시는 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이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주님의 품안에 안겨 편히 잠자고 있는 나자로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가난한 곳에서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묵상의 글들을 올릴 작정이다. 그러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체험하고 싶다(마태11,28-30). 오!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이 말씀에서 “여긴다”는 말을 무슨 뜻인가? 이 말의 원어적 의미는 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이다. 장부에 기록한다, 곧 회계를 한다는 것은 정확성을 전제로 한다. 왜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가? 이는 우리가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회계는 사실적인 계산이지 공상적인 계산이 아니다.
그러므로 같은 원칙으로 내가 참으로 죽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렇게 계산하라고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실이 아닌 것은 장부에 기록하라고 하실 수 없다. 이와 같이 만일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자라면 그분은 결코 나에게 나를 죽은 자로 계산하라고 하실 수가 없다. 이것은 계산이 아니라 오히려 오산(誤算)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여김은 허위적인 형식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여김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라고 하지 않으신다.
계시는 자연히 우리를 여기는 데로 이끈다. 우리는 결코 우리에게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 성장과 삶의 체험에서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장부에다 기록하라고 하셨다.
왜? 무엇 때문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내가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사실로 간주한다. 나는 내가 이미 그분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간주하고 선포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것이 참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언제나 참된 것일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당신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돌이켜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분이 이미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주여 내가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 있는 사실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토록 이 진실을 붙잡고 의지해야 한다.
<믿음의 여김>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로마3,28; 5,1).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과 죄 사함을 얻었고 하느님과 화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를 믿지 않고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로마서의 앞의 네 장은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에서 비록 믿음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여김”이라는 단어가 “믿음”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여김”과 “믿음”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이루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항상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믿음은 장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장래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소망이지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하느님께서 이미 이루셨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의 십자가에 못 박힘에 관하여 어느 때가 내게 믿음이 있는 때인가? 그때는 내가 즐겁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못 박혔습니다.’라고 내가 진실로 고백하는 때이다.
로마서 3장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되어 있고 이로써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보여 준다. 성령이 첫 번째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할 때 우리는 믿고 의롭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런 다음 하느님은 다시 우리에게 두 번째 사실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실행면에서 두 번째 부분의 “여김”은 첫 번째 부분의 “믿음”을 대치한 것이다. 서로의 강조점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거룩한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분의 십자가이다. 곧 자아의 파쇄이다.
<습관화된 옛사람의 충동>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은혜를 꼽으라면, 첫째는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로 처리된 것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로 처리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시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를 등장시켜보자! 이곳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며, 영적 성장의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앞의 두 가지 사실을 보고 믿었는데, 여전히 옛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내가 보고 믿기 전에 보다, 더 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전에 지었던 죄에 여전히 빠질 때에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만일 우리가 여전히 화를 내고 성질을 내고 있는 나를 수시로 발견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앞에서 체험하고 알고 믿었던 모든 사실들이 다 거짓되었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마귀의 주된 목적이 항상 우리로 하느님의 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창세3,4). 곧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실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보고, 또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긴다고 하자.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너희 속에 활동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느냐? 그것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것은 어찌된 일이냐?’라고 속삭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이것이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뽑아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완전히 잘못 안 것이다. 사실은 죄의 본성은 제거(除去)되지 않았다.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정복하여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범죄하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계속 보혈의 역사를 알고 적용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범죄를 처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십자가의 보혈로 인하여 그분은 다시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간접적인 방법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점이다.
그분은 죄의 본성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제거하신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전에는 죄의 도구였던 육신의 몸은 실직하게 되었다(로마6,6 원문 참조). 비록 옛 주인인 죄의 성품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를 섬겼던 노예가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을 지배할 수 없다.
도박꾼의 손이 실직하고, 담배와 마약중독자의 중독된 마음이 실직했고, 무의식 속에서 수시로 나를 괴롭히던 마음의 상처들(습관적인 분노, 열등감, 죄책감, 심리적 방어기제, 정서적 미성숙과 정서적 상처, 선입견과 편견, 주의와 사상, 집단 동일시)이 실직했기 때문에, 또한 맹세하는 자의 혀가 실직했기 때문에, 이제 이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로마6,13).
죄성으로 인한 이 모든 집합체인 옛사람(혼과 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지금 당신의 옛사람이 죽어 관 안에 누워있다. 곧 당신의 자아는 실직했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지금은 관 속에 누워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제 우리가 어떤 사실을 우리의 의지로 삼고 생활의 수단으로 취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체험 중에서 옛사람으로 사는가? 아니면 새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다’ 라는 더욱 강력한 사실을 택하는가? 그분의 부활 능력과 하느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한다(로마1,16).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신성한 사실을 우리 체험에서 실제화하는냐?에 달려 있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