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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사전 - 하 -
♣ 하가찬[何家饌]진(晉) 나라 하증(何曾)이 호사(豪奢)를 좋아하여 날마다 먹는 음식에 만전(萬錢)을 쓰고도, “젓가락 댈 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 하간[河間]하간은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약칭으로 한 경제(韓景帝)의 셋째 아들 유덕(劉德)인데, 민간의 선본(善本)을 많이 수집하고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산동(山東)의 제유(諸儒)들이 많이 종유(從遊)했다.
♣ 하간유객성[河間有客星]어떤 사람이 떼를 타고 은하에 올라 직녀(織女)와 견우(牽牛)를 보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촉중(蜀中)의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으라 하였다. 돌아와서 엄군평을 찾아가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군평이 대답하기를, “모 연월일에 객성이 견우성을 범했다.”고 하였다. 《博物志》
♣ 하간전[河間傳]하간의 지역에 대대로 전해오는 정악(正樂)을 이름.
♣ 하간전[河間錢]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경도(京都)의 동요(童謠)에 “하간의 미녀가 돈을 세는 데 능하여, 돈으로 집을 만들고 금으로 당을 만들도다[河間姹 女工數錢 以錢爲室金爲堂].” 한 데서 온 말인데, 하간의 미녀란 곧 하간으로부터 궁중(宮中)에 들어온 영제(靈帝)의 모후(母后)인 영락태후(永樂太后)를 가리킨 말이다. 《後漢書 五行志》
♣ 하감[賀監]당 나라의 풍류객 하지장(賀知章)을 말함. 그가 비서감(秘書監) 벼슬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임. 만년에 현종(玄宗)에게 도사(道士)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자 현종황제(玄宗皇帝)는 특별히 그에게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하여 그 곳에서 지내게 하였다. 86세 때 죽었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賀知章傳》
♣ 하감청유[賀監淸遊]하감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고사로 일찍이 비서감(祕書監)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이르는데, 그는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임금으로부터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받아 그 곳에서 은거하였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하감호[賀鑑湖]하 감호는 당(唐) 나라 하지장(賀知章)의 별칭으로, 현종(玄宗)이 그에게 감호 섬계(鑑湖剡溪) 일곡(一曲)을 하사한 데서 온 말이다.
♣ 하개[荷蓋]연꽃으로 만든 덮개.
♣ 하거[河車]하거는 본디 도사(道士)가 연단(鍊丹)하는 원료인 연(鉛)을 가리키는데, 단(丹)을 수련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 하거불각양풍비[下車不覺攘馮臂]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의 습관이 나왔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때 진(晉) 나라에 풍부(馮婦)라는 자가 있어서 범을 잘 잡다가 착한 선비가 되었는데, 들판을 지날 적에 여러 사람이 범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려오자 선비들이 비웃었다고 한다. 《孟子 盡心下》
♣ 하걸축조구[夏桀築糟丘]조구(糟丘)는 술지게미가 산처럼 쌓인 것을 말한 것으로, 하 나라걸왕(桀王)이 무도하여 음주(飮酒)에 탐닉했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卷四》
♣ 하결산조지[河決酸棗地]사기(史記) 하거서(河渠書)에 “한(漢) 나라가 일어난 지 39년 만에 하수(河水)가 산조(酸棗)에서 터졌고, 그 뒤 40여 년이 지나 원광(元光) 연간에 호자(瓠子)에서 터져 설상(齧桑)을 휩쓸고 회수와 사수에까지 범람했다.” 하였다.
♣ 하계[霞溪]하계는 권유(權愈)의 호인데 숙종 때 대사간과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 하계구가[夏啓謳歌]하(夏) 나라의 우(禹)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우의 아들 계(啓)에게 칭송[謳歌]하고 따랐다.
♣ 하계진[賀季眞]당 나라 초기의 시인인 하지장(賀知章)을 말하는데, 계진은 곧 그의 자이고, 호는 사명광객(四明狂客)이다.
♣ 하곡[荷谷]허봉(許篈)의 호.
♣ 하공[何公]하공은 진 무제(晉武帝) 떄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른 하증(何曾)을 말한다
♣ 하과[夏課]고려 때 선비들의 학습 관례. 5~6월이 되면 선비들이 절의 승방(僧房)을 빌려 약 50일 간 함께 모여 글을 읽는 것을 말하는데, 십이도(十二徒) 초창기에 성행하였다. 특히 최충(崔冲)의 문도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을 빌려 하과를 닦았는데, 그들 중 학업이 우수한 자들을 뽑아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를 술로 표창하였다.
♣ 하과[夏課]옛날에 공부하는데 가을과 겨울에는 글을 읽고, 여름에는 글짓기를 일과(日課)로 하였다.
♣ 하관[荷冠]비를 막으려고 연잎으로 만든 고깔.
♣ 하괴[荷蕢]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거(隱居)한 현인을 말한다. 하궤는 삼태기를 진 사람으로 은거한 현인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공자가 위(衛) 나라에서 경(磬)을 치고 있었는데 삼태기를 지고 공자의 집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에 “이 역시 은거한 현인이다.”라고 하였다.
♣ 하괴[河魁]하괴는 문곡성(文曲星)을 말한 것인데, 이백(李白) 사마장군가(司馬將軍歌)에 “몸이 옥장에 거하매 하괴(河魁)가 임하고 붉은 수염 창 같은데, 머리에 쓴 관 산처럼 높아라.” 한 시가 있다.
♣ 하괴[荷蕢]하궤는 논어(論語)에 있는데 공자가 위(衛)에 있을 때, 삼태기를 멘 사람[荷蕢者]이 문 앞을 지나가며, 공자의 세상을 건지려고 다니는 것을 조롱한 은사(隱士)이다.
♣ 하교[河橋]이별하는 장소로 곧잘 등장하는 시어(詩語)이다. 보통 하교 양류(河橋楊柳)로 많이 쓴다.
♣ 하교일자다[河橋一字多]이별할 때에는 한마디의 말도 오히려 많다는 뜻. 하교는 교량(橋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별을 읊은 시에 주로 등장한다.
♣ 하군[何窘]어찌나 군색한지.
♣ 하궤[荷簣]혼란한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삼태기를 메고 가던 사람[荷簣人]이 공자의 경쇠 소리를 듣고는 “경쇠 두들김이여, 마음이 세상에 있구나.[有心哉 擊磬乎]”라고 비평한 내용이 나온다.
♣ 하규[夏畦]증자(曾子)가 이르기를 “어깨를 으쓱이면서 아첨하여 웃는 짓이 무더운 여름날에 김매기보다 괴로운 일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하규(夏畦)는 곧 여름날 논밭에 나가 김매는 것을 말한다. 《孟子 滕文公下》
♣ 하낙도서[河洛圖書]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에 “하도는 중국 고대 복희씨(伏犧氏)가 왕 노릇 할 때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그림을 가지고 나왔는데, 복희씨가 그 그림을 본떠 8괘(卦)를 그렸으며, 낙서 역시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거북이 그림을 가지고 나와 우 임금이 그것으로 홍범(洪範)을 지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별을 가리킨 것이다.
♣ 하남[河南]하남 정씨(河南程氏)로, 송 나라 때의 유학자인 정자(程子)를 가리킨다.
♣ 하남백숙[河南伯叔]하남은 중국 낙양(洛陽)의 별칭. 하남의 형제는 그 곳에서 이학(理學)을 천명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 하남시[河南詩]하남(河南)은 호가 명도(明道)인 정호(程顥).”부귀하여도 음하지 않고 빈천하여도 즐기니, 남아가 이 경지에 이르면 바야흐로 호웅일세.[富貴不淫貧賤樂男兒到此方豪雄]"라는 시를 말한다. 《二程全書 卷三十八 秋日偶成》
♣ 하내[河內]한나라 구순(寇恂)이라는 사람이 하내(河內)태수로 정치를 잘하여서 백성들이 임금께 구순이 임기가 끝났으니 한 임기만 더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탄원하였다 한다.
♣ 하내구공[河內寇公]하내 태수로 있던 구순(寇恂)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구순전(寇恂傳)에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3년에 영천(潁川)에 도둑이 크게 일어나자, 하내 태수로 있는 구순을 불러 도둑을 치게 하였더니, 순이 이르러 도둑을 모두 평정하였다. 그 뒤 광무제의 남정(南征)에 종군하여 영천을 지날 때 영천 백성들이 거가(車駕)를 막고 ‘원컨대 폐하께서는 1년간만 더 구공을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한다.
♣ 하내절[河內節]일찍이 하내(河內) 지방에 화재가 나서 천여 가호가 불탔으므로, 경제(景帝)가 급암(汲黯)을 시켜 그 곳을 순시하게 하였는데, 그가 하내에 갔다가 하남(河南) 지역을 둘러본 결과, 그 곳에는 수한(水旱)으로 인해 가난한 백성이 만여 가호나 되었는바, 그 중에 혹은 부자(父子)가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지경이었으므로, 그가 편의에 따라 부절(符節)을 가지고 하남의 창고 곡식을 흩어서 빈민들을 구제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
♣ 하내학[河內學]하내는 중국 황하(黃河) 이북 지방으로 하남성(河南省) 일대를 말하는데, 송 나라 이학(理學)의 태두(泰斗)인 정이(程頤)의 출생지로서 정이를 가리킨다. 곧 정이의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임.
♣ 하담[荷潭]충청북도 충주(忠州) 가차산면(加次山面)에 있는 지명이다.
♣ 하담이립[荷擔而立]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짐으로써 백성들이 모두 가재도구 등을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서 피난길을 떠나게 됨을 이른 말이다.
♣ 하당경북두[何當傾北斗]실권 없는 관직 생활은 아무 쓸모 없다는 뜻.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북에는 국자 모양의 북두성이 있지만 국이나 술을 뜰 수는 없네.” 하여, 관직에 있는 것이 허울일 뿐 별로 쓰임새가 없음을 비유하였음.
♣ 하당지질[下堂之疾]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당을 내려가다가 발을 다쳤다[下堂而傷其足]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禮記 祭義》
♣ 하대[夏臺]하대는 하(夏) 나라의 감옥 이름인데, 하 나라 걸왕(桀王)이 탕(湯) 임금을 이 감옥에 가두었었다. 《史記 夏紀》
♣ 하대[河垈]황하와 태산 사이의 지역, 즉 산동(山東)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중국의 대명사로 쓰였다.
♣ 하대관룡방[夏臺關龍逄]하대는 하(夏) 나라의 감옥 이름. 관룡방은 하 나라의 현신(賢臣)이었는데, 하왕(夏王) 걸(桀)의 무도함을 간하다가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하였다.
♣ 하대명년[何待明年]기다리기가 매우 지루함.
♣ 하덕지쇠[何德之衰]“초(楚)의 접여(接輿)가 노래하면서 공자 앞을 지나며 말하되, 봉이여, 봉이여, 왜 덕이 쇠한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하였다. 논어(論語)
♣ 하도[河圖]중국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용마(龍馬)가 도(圖)를 등에 지고 하(河)에서 나온 것을 보고 그 무늬를 법받아 팔괘(八卦)를 그었다 함.
♣ 하도낙서[河圖洛書]주역(周易) 계사(繫辭)에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라 하였음.
♣ 하돈[河豚]하돈(河豚)은 복어(鰒魚)의 이칭(異稱)이다.
♣ 하돈안본[河豚贋本]죽파시화(竹坡詩話)에 “미원장(米元章)이 다른 사람의 서화를 잘 바꾸는데 양차옹(楊次翁)이 국을 마련하여 밥을 대접하며 ‘오늘은 그대를 위해서 하돈 생선을 준비하였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다른 생선이었다. 원장은 의심하여 먹지 아니하니 차옹은 웃으며 ‘공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안본이다.’했다.” 하였음.
♣ 하동[河東]유씨(柳氏)를 두고 쓰는 별칭임.
♣ 하동부[河東賦]문장의 이름.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어서 임금에게 올린 것이다.
♣ 하득무송편시백[賀得茂松偏是柏]훌륭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친구가 많다는 뜻이다.
♣ 하락[河洛]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가리킨다.
♣ 하량[河梁]하량은 하수를 건너지른 다리인데, 한(漢)의 이릉(李陵)이 소무(蘇武)와 작별하면서 하량별(河梁別)이란 시를 썼었다. 《漢書 李陵傳》
♣ 하량곡[河梁曲]송별(送別)의 노래를 뜻함. 하량은 강의 다리를 이르는데, 한 소제(漢昭帝)가 즉위하여 흉노(匈奴)와 화친을 함으로써, 흉노에 사신갔다 19년 동안이나 억류되었던 소무(蘇武)가 한 나라로 돌아올 적에 이릉(李陵)이 소무를 송별하는 시에서 “서로 손 잡고 하량에 오르노니 나그네는 저문 날에 어디로 갈꼬[携手上何梁 游子暮何之]” 한 데서 온 말이다.
♣ 하로[賀老]이태백(李太白)을 적선(謫仙)이라고 일컬었던 당(唐) 나라의 하지장(賀知章)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비서감(祕書監)으로 있다가 그의 고향인 회계산 경호(鏡湖)의 도사(道士)로 나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현종(玄宗)이 경호(鏡湖) 1곡(曲)을 하사하였으므로, 경호를 하감호(賀監湖) 혹은 감호(鑑湖)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 시의 감호당이라는 당호(堂號)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로 이태백의 시에 “강동을 향해서 가고 싶다만, 정작 누구와 술잔을 들꼬. 회계산에 이미 하로도 없지 않나, 술 실은 배 노 저어 돌아올밖에.[欲向江東去 定將誰擧杯 稽山無賀老 却棹酒船回]”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22 重憶》 소동파의 시에 “경호에 하감 같은 사람이 없어, 혜산의 길목에서 통곡하노라.[鏡湖無賀監 慟哭嵆山道]”라는 구절이 보인다. 《蘇東坡詩集 卷15 哭 景純》
♣ 하로동선[夏爐冬扇]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 쓸모 없는 재능을 말한다.
♣ 하로아오어[賀老雅吳語]하로(賀老)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을 이른다. 그는 현종(玄宗) 때에 벼슬이 비서감(祕書監),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이르러 그만두고 도사(道士)가 되기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오어(吳語)는 남방(南方)의 방언을 가리키는데, 두보(杜甫)의 견흥시(遣興詩)에 “하공은 본디 오어를 잘하여, 관직에 있어도 항상 맑고 미치광이 같았네[賀公雅吳語 在位常淸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七》
♣ 하루[何陋]공자가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자, 어떤이가 말하기를 “고루해서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군자가 사는데 무엇이 고루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 하류신난처[下流信難處]논어(論語) 자장(子張)에 “군자는 하류에 처하는 것을 싫어하나니, 천하의 악이 모두 그곳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다.[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라고 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말이 실려 있다.
♣ 하륜[下淪]낮게 깔리다.
♣ 하리[何李]명(明) 나라 때의 시인인 하경명(何景明)과 이몽양(李夢陽)을 병칭한 말이다.
♣ 하리가[下里歌]장사를 치를 때 무덤 앞에서 부르는 노래란 뜻으로, 만가(挽歌)를 가리킨다.
♣ 하리백설[下里白雪]하리곡과 백설곡은 전국시대 초 나라의 곡명으로, 하리곡은 수준이 매우 낮고 백설곡은 매우 높다 하여 흔히 시 품격의 높낮이에 대한 대칭으로 쓰인다.
♣ 하막학부시[何莫學夫詩]공자가 제자들에게 왜 시경(詩經)을 배우지 않느냐고 질책하면서, 시는 일으킬 수 있으며 살필 수 있으며 무리를 지을 수 있으며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하였다. 《論語 陽貨》
♣ 하만자[何滿子]사곡(詞曲) 이름. 하만(何滿)은 사람 이름인데, 그가 형장(刑場)에 나아갔을 때 자신의 속죄(贖罪)를 위하여 이 사곡을 비로소 만들었다고 함. 백거이(白居易)의 하만자(何滿子)
♣ 하목[霞鶩]하목은 낙하고목(落霞孤鶩)의 준말. 낙하는 지는 놀을 말하고 고목은 외로운 따오기. 당(唐) 나라의 문장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빛일세[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한 말이 있는데, 이 구(句)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오늘날까지 일컬어진다.
♣ 하목융상[河目隆顙]공자의 얼굴을 묘사하여, 가어(家語)에 “하목융상(河目隆顙)”이라 했는데, 주에, “하목(河目)은 반듯한 눈”이라 했다.
♣ 하목해구[河目海口]공자의 얼굴이 하목(河目)이요 해구(海口)라 한다.
♣ 하미미종[河糜微尰]미종(微尰)은 각각 각기병(脚氣病)과 수종(水腫) 다리를 가리킨다. 하미(河麋)는 습한 저지대에 사는 사람으로 보통 참소하는 인간을 지칭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교언(巧言)에 “도대체 저 사람 누구인고, 습지에 사는 사람일세. 힘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난리 일으키는 덴 선수로세. 각기병에 수종 다리, 어떻게 용기를 발휘하리[彼何人斯 居河之麋 無拳無勇 職爲亂階 旣微且尰 爾勇伊何]”라고 하였다.
♣ 하방[下方]상방(上方)은 주지승의 거처를, 하방은 일반 승려의 거처를 말한다.
♣ 하방회[賀方回]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방회인 하주(賀鑄)를 이름
♣ 하백[河伯]물을 맡은 신의 이름. 빙이(氷夷)혹은 풍이(馮夷)라고도 한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신이 되었다고 하고, 또는 그가 약을 먹고 물을 만나 신선이 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풍류를 알고 흰 얼굴에 큰 키를 지닌 미남으로 하반신을 물고기의 형태라 한다.
♣ 하백과량애[河伯誇兩涯]하백은 황하 귀신의 이름이고, 양애(兩涯)는 양쪽의 물가가 있는 강물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첫머리에 “가을 홍수가 밀어닥쳐 온갖 냇물이 황하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거대한 탁류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양쪽의 물가에 있는 소와 말을 분별할 수가 없게 되자,[兩涘渚崖之間 不辯牛馬] 이를 보고 하백이 혼자 기뻐하여 으스대면서 천하의 아름다움은 모두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 하백망양[河伯望洋]하백은 황하의 수신(水神)인데, 그가 끝없이 광대한 바다를 바라보고는 멍하니 탄식을 했다는 데서, 즉 위대한 인품이나 높은 학문 앞에서 자신의 범용(凡庸)하고 천단(淺短)함을 느끼어 한탄함을 비유한 말이다. 《莊子 秋水》
♣ 하변영필[河邊靈匹]신령한 배필이란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을 말한다. 음력 7월 칠석(七夕)에는 은하수 동쪽에 있는 견우성과 서쪽에 있는 직녀성이 오작교(烏鵲橋)에서 서로 만난다고 한다.
♣ 하보릉파말[河步凌波襪]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 문선(文選)에 “물결을 타는 가벼운 걸음에, 비단 버선에선 먼지 같은 물방울 튄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 하복[夏馥]동한(東漢) 진류(陳留) 사람으로 자는 자치(子治)이다. 영제(靈帝)때 국정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했던 이유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들의 미움을 사 범방(范滂) 장검(張儉)과 함께 사류 집단의 괴수로 지목을 받았다. 나중에 영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임려(林慮) 산중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숨기고 대장간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後漢書 卷六十七 夏馥傳》
♣ 하부자[賀夫子]명(明) 나라 사람인 하흠(賀欽)을 가리킨다.
♣ 하분[河汾]황하(黃河)와 분수(汾水) 사이의 지역을 이른 말인데, 한(漢) 나라의 대유(大儒)인 양웅(揚雄)과 수(隋) 나라의 대유인 왕통(王通)이 모두 여기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 하분일초정[河汾一草亭]호화와 사치를 극하다가 끝내 나라를 망친 수 양제(隋煬帝)로서는,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황하(黃河)와 분수(汾水) 사이로 돌아와서 초당을 짓고 100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친 왕통(王通)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96 王績傳 註》
♣ 하비[下邳]하비는 지명(地名).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하비의 다리 위에 나갔더니, 한 노인(老人)이 량의 옆으로 다가와서 다리 밑으로 신을 떨어뜨려 놓고 량더러 주워 오라고 하자, 량은 공손히 주워다 신겨 주었다. 그 후 노인은 마침내 책 한권을 량에게 주어, 그는 그 책을 읽고 뒷날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공신이 되어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史記 留侯世家》
♣ 하사[河沙]항하(恒河), 즉 인도 갠지스 강의 모래알. 헤일 수 없이 많다는 뜻으로 씀.
♣ 하사표[賀赦表]왕명으로 죄수를 놓아줄 때 하례를 올리는 글.
♣ 하삭[河朔]하북(河北). 황하(黃河)이북 지방.
♣ 하삭면[河朔面]하삭(河朔)은 옛날 황하(黃河) 이북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북방을 뜻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君爲江南英 面作河朔偉”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28, 諸公餞子敦 軾以病不能往 復次前韻》
♣ 하삭백[河朔百]후한 때 유송(劉松)이 하삭에서 피서(避暑)하면서 주야로 술을 마셨던 고사가 있다.
♣ 하삭원음[河朔袁飮]여름철에 함께 피서를 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던 추억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유송(劉松)과 원소(袁紹)의 자제가 황하(黃河) 북쪽 지방[河朔]에서 만나 삼복 더위를 피하려고 밤낮으로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보냈던 고사가 있다. 《初學記 卷3 註》
♣ 하삭음[河朔飮]무더운 여름철에 피서(避暑)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술자리를 말한다. 하삭은 하북(河北) 지방을 가리키는데, 후한(後漢) 말에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하북(河北)의 군(軍)을 진무하면서 원소(袁紹)의 자제들과 날마다 연음(宴飮)을 하고, 특히 삼복(三伏) 때에는 주야로 통음(痛飮)을 하여 일시적인 더위를 피했던 데서 온 말이다. 《初學記 歲時部上 夏避暑飮》
♣ 하삭주[河朔酒]하삭은 곧 하북(河北)인데, 후한(後漢) 때 유송(劉松)이 그곳에서 원소(袁紹)의 자제들과 함께 삼복(三伏) 때마다 주야로 술을 많이 마시어 일시적인 피서(避暑)를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하삭피서[河朔避暑]하삭은 황하(黃河) 이북의 땅인 하북(河北)을 말한다. 후한(後漢) 말엽에 유송(劉松)이 하삭에 있으면서 삼복(三伏) 무렵이면 항상 원소(袁紹)의 자제(子弟)와 함께 연일 주야로 술을 마시면서 피서했다 한다.
♣ 하산[夏山]하산은 성희안의 본관인 창녕(昌寧)의 옛이름이다.
♣ 하삼[荷衫]연잎으로 지은 옷으로, 고결한 선비의 조촐한 행색을 말한다.
♣ 하삽유령[荷鍤劉伶]진(晉) 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주덕송(酒德頌)’을 지은 유령이 늘 술병을 들고 나가면서 삽을 메고 따라오게 하다가[使人荷鍤而隨之] 자기가 죽으면 그 자리에 파묻도록 한 고사가 있다. 《蒙求 中 劉伶解酲》
♣ 하상[下殤]죽었을 때의 나이가 19세에서 16세까지를 장상(長殤), 15세에서 12세까지를 중상(中殤), 11세에서 8세까지를 하상(下殤)이라고 하는데, 8세 미만에 대해서는 모두 입어 주는 상복이 없다. 《儀禮 喪服》
♣ 하상곡[河上曲]같은 처지의 사람을 애처로워하는 뜻이 담긴 옛날 노래 이름이다. 춘추 시대 오(吳) 나라 대부 피리(被離)가 자서(子胥)에게 “무얼 보고서 희(喜)를 신임하느냐.”고 묻자, 자서가 “나의 원수는 희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상가(河上歌)를 듣지 못했는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이요 동우상구(同憂相救)의 뜻이 담겨 있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吳越春秋 闔閭內傳》
♣ 하상공[河上公]하상공은 한 문제(漢文帝) 때 하빈(河濱)에 은거했던 선인(仙人)을 말한다.
♣ 하상기맹롱[遐想起盲聾]하상은 세속을 초월하는 원대한 생각을 말한 것으로, 즉 원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세상 일을 전혀 간섭하지 않음을 뜻한다.
♣ 하서[河西]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호이다.
♣ 하서과복[河鼠過腹]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초료(鷦鷯)는 깊은 숲에 깃들어도 나뭇가지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두더쥐는 하수에서 물을 마셔도 제 배 차면 그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경주(慶州)에 있는 진보(鎭堡)의 하나.
♣ 하석[霞石]박정(朴炡)의 호이다.
♣ 하석상대[下石上臺]아랫돌을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굄. 즉 임시 변통으로 이리 저리 둘러맞춤을 말한다.
♣ 하선동력[夏扇冬曆]여름의 부채와 겨울의 새해 책력. 곧 선사하는 물건이 철에 맞음을 이름
♣ 하선호지[河先惡池]큰 일을 하려면 적은 일부터 먼저 한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진(晉) 나라 사람은 하(河)에 제사하려면 먼저 호지(惡池)에 제사한다.[晉人有事於河 必先有事於惡池]" 하였다.
♣ 하성[夏城]하성은 창녕(昌寧)의 고호이다.
♣ 하손[何遜]하손은 남조(南朝) 양(梁) 나라 섬인(剡人)인데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벼슬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을 지냈다. 문장이 유효작(劉孝綽)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여 세상이 하유(何劉)라 불렀음. 하수부집(何水部集)이 있음. 《梁書 卷六百九十三》
♣ 하손동각시[何遜東閣詩]남조(南朝) 양(梁)의 시인. 그의 설중매화(雪中梅花)를 읊은, 동각(東閣)시가 유명하다.
♣ 하수[下壽]60세를 말한다.
♣ 하수[蝦鬚]주렴의 이명(異名)이다.
♣ 하수[夏首]하수의 어구. 장강과 갈라진 곳
♣ 하수부[何水部]양(梁) 나라 때의 문장가 하손(何遜)이 상서 수부랑(尙書水部郞)을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 하수조[何水曹]두보의 시에서는 양(梁) 나라의 뛰어난 시인으로 수부 원외랑(水府員外郞)을 지낸 하손(何遜)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하삼성(何三省)을 가리킨다.
♣ 하수황서어랍경[夏授黃書圄臘更]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하후승(夏侯勝)과 함께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곡히 요청한 결과 그로부터 상서(尙書)를 배워 뒤에 현달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5 夏侯勝傳 卷89 循吏列傳 黃霸傳》
♣ 하승[下乘]열등마(劣等馬)와 같은 말.
♣ 하시[夏時]하시는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은 하(夏) 나라의 역(曆)을 말한다.
♣ 하시소천하[下視小天下]공자(孔子)는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 《孟子 盡心上》
♣ 하심[何沈]심약(沈約)과 하손(何遜)은 남북조 시대 남조의 시인인데, 심약은 박학하여 사성보(四聲譜)를 지었으며 하손의 시는 사조(謝脁)에 비교되었다.
♣ 하심주[荷心酒]정공각(鄭公慤)이 연잎[蓮葉]에다 술을 담아 두고 잠(簪)으로 찔러서 줄기와 통하게 하여 그 술을 마시니 맑고 서늘하였다.
♣ 하악[河嶽]황하(黃河)와 오악(五嶽).
♣ 하안[何晏]삼국(三國) 때의 위(魏) 나라 사람. 미남인 데다가 늘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다녀, 한때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 흔히 하랑(何郞)이라 부른다. 《三國志 卷九》
♣ 하안거[夏安居]여름 장마 때 중들이 선방(禪房)에 들어앉아 수도하는 기간을 말한다.
♣ 하액[霞液]이슬을 말한다. 오균(吳筠)의 유선시(游仙詩)에 “이슬은 아침에 먹을 수 있고 홍지(虹芝)는 저녁에 먹을 만하다.” 하였다.
♣ 하약[賀若]거문고 곡조에 하약(賀若)이 가장 담고(淡古)하다 하였음. 소식의 시에 “琴裏若能知賀若 詩中定合愛陶潛"이라 하였음.
♣ 하약필[賀若弼]수(隋) 나라 대장 하약필(賀若弼)이 진(陳) 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일이 있었다.
♣ 하양[河陽]일찍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을 지냈던 진(晉) 나라의 문장가 반악(潘岳)을 가리킨다. 그가 현령으로 부임한 뒤에 그 고을에 온통 도리화(桃李花)를 심어 놓고 즐겼다는 ‘하양일현화(河陽一縣花)’의 고사가 전한다. 《白氏六帖 縣令》
♣ 하양[河陽]하양은 중국 황하(黃河)의 북쪽 기슭으로,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서쪽에 있던 고을 이름이다.
♣ 하양만도리[河陽滿桃李]하양은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서쪽에 있는 고을. 진(晉)의 반악(潘岳)은 일찍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곳곳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었으므로 뒤에 전하여 미담(美談)이 되었다.
♣ 하양부[河陽賦]진(晉) 나라의 반악(潘岳)처럼 멋들어진 솜씨를 발휘하여 지은 시라는 말이다. 반악이 일찍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을 지냈으므로, 하양을 그의 별칭으로 쓰게 되었다.
♣ 하양수[河陽樹]하양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동쪽에 있는 지명인데, 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이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하여서 온 고을 안에 복사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어 온 고을이 꽃 천지가 되었다.
♣ 하양일현홍[河陽一縣紅]백낙천의 백씨육첩(白氏六帖) 권20에 “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하양(河陽)의 수령으로 나가서, 온 경내에 복사꽃과 오얏꽃을 두루 심자,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하양 일현화(河陽一縣花)’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 하양일현화[河陽一縣花]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이 되었을 때 하양현 안에 도리(桃李)를 많이 심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하양은 온 고을이 꽃이다.” 하였다.
♣ 하연[賀燕]경사 있는 집에 제비가 날아드는 것을 치하하는 손님에 비한다.
♣ 하염각소양락추[下鹽却笑羊酪麤]육기(陸機)가 왕무자(王武子)에게 가니 무자가 마침 양락(羊酪) 수곡(數斛)을 앞에 놓고 있다가 육기에게 묻기를, “강동(江東)에는 무슨 식물이 이것과 적대(敵對)할 만한가.” 하니, 육기가 답하기를, “순채국[蓴羹]인데 다만 소금콩[鹽豉]을 넣지 않소.” 하였다.
♣ 하엽배[荷葉杯]하엽배란 곧 연잎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줄기를 통해서 술을 빨아 마시는 것을 말한다.
♣ 하예경사[何預卿事]당신의 일과 무슨 상관인가? ‘預’는 ‘與’와 통하며 ‘관여하다’, ‘상관하다’의 뜻.
♣ 하오[夏五]궐문(闕文)을 뜻하는 말로, 춘추(春秋)의 환공(桓公) 14년 조(條)에 ‘하오월(夏五月)’을 ‘하오’로만 기재하여 ‘월(月)’ 자를 빠뜨린 데서 온 말이다.
♣ 하옥[夏屋]문간의 행랑인데 넓으면서 낮은 집
♣ 하옥[瑕玉]티가 있는 구슬. 흠이 없으면 완전한 것인데, 아깝게도 흠이 있어 결점이 된다는 뜻. 옥에 티.
♣ 하원[河源]하원은 황하(黃河)의 근원을 말한다.
♣ 하위[河渭]黃河와 渭水를 가리킨다.
♣ 하유[下帷]서한(西漢)의 학자 동중서(董仲舒)가 강송(講誦)할 때 장막을 내리곤 하였으므로[下帷], 사람들이 그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 董仲舒》
♣ 하유[瑕瑜]옥의 티와 광택. 전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
♣ 하유동생[下帷董生]동생(董生)은 동중서(董仲舒)이다. 동중서가 장막을 내리고 외인과 떨어져 글만 읽었으므로 동중서를 하유노인(下帷老人)이라고도 한다. 환혼기(還魂記) 숙원(肅苑)에 “하유노인이 동산도 구경하지 못했다.[下帷老子不窺園]" 하였다.
♣ 하유불잠출[下帷不蹔出]방에 발을 치고 깊이 들어앉아 독서(讀書)에만 전념함을 말함. 《漢書 董仲舒傳》
♣ 하유선생어육경[下帷先生飫六經]서한(西漢)의 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장막을 드리운 채 강론을 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도 그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가 있었으며, 독서에 심취한 나머지 3년 동안 집의 뜨락을 내다보지도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儒林列傳 董仲舒傳》
♣ 하육[夏育]주(周)나라 때 위(衛)의 용사(勇士).
♣ 하육[何肉]하육은 하씨(何氏)의 고기. 남제(南齊) 때 불교(佛敎)를 매우 신봉(信奉)하였던 하윤(何胤)이 육식(肉食)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 하음[何陰]양(梁) 나라 때 시(詩)를 잘 하기로 명성이 높았던 하손(何遜)과 음갱(陰鏗)을 병칭한 말이다.
♣ 하의[荷衣]연(蓮)잎으로 엮어 만든 은사(隱士)의 옷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에, “연잎을 재단하여 옷을 만듦이여, 연꽃으로는 치마를 짓도다.[製芰荷而爲衣兮 集芙蓉而爲裳]" 하였다.
♣ 하의[荷衣]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신선이나 도사, 은자가 입는 옷을 가리킨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소사명(少司命)의 “연잎 옷에 혜초의 띠를 띠고 금방 왔다가 훌쩍 떠나네[荷衣兮帶 儵而來兮忽而逝].”에서 나온 것으로 역시 은사의 생활을 말한 것이다.
♣ 하의치[荷衣緇]하의는 연잎으로 지은 은자(隱者)의 옷을 뜻한 것으로, 전하여 풍진(風塵) 속에 분주하다가 세속의 더럽힘을 받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 하이[蝦夷]고대 일본 북단에 거주하던 미개 종족. 지금 일본의 북해도(北海道)를 이름.
♣ 하이가위[何以假爲]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거짓 직함을 띠고 갈 경우, 자신이 먼저 바르지 않기 때문에 바른 말을 할 수 없어서, 거짓 직함을 띠고는 갈 수 없다는 뜻이다.
♣ 하일진현[夏日晉賢]춘추 때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조순(趙盾)이 위엄 있기로 유명했다. 진 나라의 가계(賈季)가 조최(趙衰)를 겨울날의 해로, 조순을 여름날의 해로 비유했으니 겨울 해는 사랑스럽고 여름 해는 두려울 만하기 때문이다.
♣ 하자성혜[下自成蹊]사람들이 자연히 사모하여 찾아옴. 사마천(司馬遷)이 한(漢) 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인품을 극찬하면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스스로 말하지는 못해도, 사람들이 좋아하여 찾아오기 때문에 그 나무 밑에는 절로 길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평한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史記 李將軍列傳》
♣ 하잔여기산[霞殘餘綺散]사조(謝眺)의 시에, “여하산성기(餘霞散成綺)”라는 귀절이 있다.
♣ 하장[霞漿]하장은 신선이 먹는다는 선약(仙藥)이다.
♣ 하장군[賀將軍]명 나라의 총병관(摠兵官) 하세현(賀世賢)으로, 심양이 함락되면서 전사하였다. 《明史 卷271》
♣ 하절[下節]채찍을 당기다.
♣ 하정주황[夏鼎周璜]하우씨(夏禹氏)의 구정(九鼎)과 주 나라의 패옥처럼 시문이나 품격이 지금 세상과 달리 고풍(古風)스럽다는 말이다.
♣ 하조대[河趙臺]하씨(河氏) 집안의 총각과 조씨(趙氏) 집안의 처녀 사이의 사랑에 얽힌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고려 말엽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숨어 살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등의 설이 있다.
♣ 하주[荷裯]연꽃으로 만든 홑옷.
♣ 하주[賀鑄]하주는 성격이 강직하고 당세의 일을 논하기 좋아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가 아무리 당세의 권귀(權貴)일지라도 조금도 가차없이 마구 폄론(貶論)하였다 한다. 《宋史 卷四百四十三》
♣ 하중묵[何仲黙]하중묵은 명대(明代)의 시인(詩人) 하경명(何景明)을 가리키는데 중묵은 그의 자이다.
♣ 하증[何曾]진 무제(晉武帝) 떄 정치가. 자는 영효(穎孝).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음. 하증은 본디 의식(衣食)의 사치를 극도로 하여 하루에 1만 전 상당의 성찬을 먹고 지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젓가락을 댈 데가 없다.”고 말했다 한다. 《晉書 卷三十三》
♣ 하지장[賀知章]당(唐)나라 때의 산음(山陰)사람. 자는 계진(季眞)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 잘 쓰고 술도 좋아했다. 중년에 벼슬길에 올라 태자빈객(太子賓客)ㆍ비서감(祕書監)등을 제수받았으나 늘그막에 그를 다 버리고 자호를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고 하고서 전리(田里)로 돌아와 자기 집을 천추관(千秋觀)으로 꾸미고, 또 방생지(放生池)를 만들기 위해 호수를 구하다가 천자의 명으로 경호(鏡湖)의 섬계(剡溪)한 굽이를 하사받기도 하였음. 《唐書 列傳 隱逸》
♣ 하진[下陳]궁녀들을 말한다.
♣ 하징구곡[河澄九曲]황하수(黃河水)는 백 리(里)에 작은 구비, 천 리에 큰 구비, 이렇게 구곡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황하수가 천 년만에 한 번씩 맑으면 성인(聖人)이 날 큰 상서(祥瑞)라 한다.
♣ 하채[下蔡]하채는 고을 이름. 안휘성(安徽省) 봉대현(鳳臺縣)에 있다. 호색(好色)하기로 이름난 등도자(登徒子)가 부인을 하채에 두고 미색에 도취되어 헤어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호색하는 사람을 하채에 미혹한다고 한다. 《文選 卷十九 登徒子好色賦》
♣ 하천[下泉]하천은 시(詩) 조풍(曹風)의 편(篇) 이름. 진후(晉侯)가 조(曹)에 들어와 그 임금을 잡아가매, 조의 신하들이 주실(周室)에 왕이 있어 패자(霸者)를 제어하지 못함을 슬퍼한 시편이다. 그 첫 구는 다음과 같다. “冽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
♣ 하청[河淸]성인이 태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황하의 물은 본디 탁하여서 맑을 때가 없으나, 1천 년마다 한 차례씩 맑아지는데, 이는 성인이 태어날 조짐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천하의 태평을 말할 때는 흔히 “해안하청(海晏河淸)"을 대명사로 써 왔음.
♣ 하충[夏蟲]견문이 좁아서 사리에 어두움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여름 벌레는 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하충남견[夏蟲南犬]식견이나 지혜가 모자란 것을 비유하는 말. 하충(夏蟲)은 여름 벌레란 뜻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여름 벌레와는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이는 계절에 구애받기 때문이다.[夏蟲 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하였고, 남월(南越) 지방의 개는 눈[雪]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이 오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 한다.
♣ 하침[下枕]취침(就枕)과 같음.
♣ 하침대무[河沈大巫]전국(戰國) 시대 위(魏)의 서문표(西門豹)가 업현(鄴縣)의 영(令)으로 있을 때, 그 지방 습관으로 하백(河伯 수신(水神))을 위하여 부녀(婦女)에게 장가들게 한다 칭하고 부녀를 물에 빠뜨리는 일이 있으므로, 서문표가 그 폐단을 고치려고 무당을 강물에 빠뜨렸던 고사이다. 《史記 滑稽傳 褚先生續》
♣ 하탁[荷橐]띠에 차는 붓주머니. 하포(荷包)와 같은 것으로 조그마한 주머니를 말한다. 통속편(通俗編)에 구양수(歐陽脩)의 글에 ‘자하가 주머니에 드리워졌다[紫荷垂橐]’는 말을 인용하여 “아마 후세의 하포와 같은 것인가보다.” 하였다.
♣ 하탐적수강[下探赤水强]장자(莊子) 천지(天地)에 “황제(黃帝)가 적수에 노닐다가 구슬을 잃어버리고 지(知)를 시켜 찾게 하였는데 찾지 못했다.” 하였음.
♣ 하탑[下榻]한(漢)나라 진번(陳蕃)이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에, 서치(徐穉)가 오면 탑(榻)을 내려서 앉게 하고, 그가 가고 나면 다시 그 탑을 달아두며 서치가 또 오기를 기다렸다.
♣ 하탑빈붕지[下榻賓朋至]빈객(賓客)을 맞아 머물게 한 데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다른 빈객은 잘 접견하지 않았는데, 유독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한 탑(榻)을 내려 깔아주고 그가 돌아가면 다시 그 탑을 매달았으므로 이른 말이다. 《後漢書 徐穉傳》
♣ 하택거[下澤車]하택거는 마원(馬援)이 향리(鄕里)로 돌아온 후에 항상 타고 다니던 수레로서, 전간(田間)의 진펄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가벼운 수레이다.
♣ 하택지거관단마[下澤之車款段馬]고향 시골의 편안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고생스럽게 남방을 정벌하면서 “하택거(下澤車)에 조랑말을 매어 타고서 향리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말을 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馬援傳》
♣ 하토사방[下土四方]천하를 말한다.
♣ 하통[荷筩]연잎의 한가운데 오목한 곳에 술을 담아 마시면서 이를 술통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 하퇴[夏頧]하 나라 때의 모자 이름이다.
♣ 하패[霞佩]신선(神仙)이 차는 옥을 말하는데, 전하여 패옥을 고상하게 이르는 말이다.
♣ 하평[河平]한 성제(漢成帝)의 연호.
♣ 하포[夏浦]하구. 지금의 한구
♣ 하표[霞標]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붉은 노을을 가리킨다. 《文選 卷6》
♣ 하풍죽로[荷風竹露]하풍 죽로(荷風竹露)는 연꽃 바람과 대나무의 이슬을 말하니, 당 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시구(詩句)를 말한다. 그의 하일남정회신대(夏日南亭懷辛大) 시에 “연꽃에서 바람 부니 향기 그윽하고, 대잎에서 이슬 떨어지니 소리 맑아라.[荷風送香氣 竹露滴淸響]" 하였다.
♣ 하피[霞帔]도사(道士)의 옷, 또는 부인(婦人)의 예복(禮服)을 말한다.
♣ 하필성장[下筆成章]붓을 내리면 문장을 이룸. 아주 뛰어난 문장가
♣ 하필약유신[下筆若有神]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나니 붓을 들어 글을 짓는 것이 신들린 듯하더라”하여, 자신의 공부를 술회하였음.
♣ 하하[下下]맨아래, 하지하(下之下)
♣ 하하[呀呀]입을 벌리는 모양, 맹수가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는 모양, 웃음소리
♣ 하학상달[下學上達]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공부보다도 실천을 통한 수양이 참다운 배움이고 모두가 생활을 통한 향상을 배움이라는 뜻의 고사성어.
♣ 하해지택[河海之澤]강이나 바다처럼 넓고 큰 혜택.
♣ 하혜관비[下惠官卑]유하혜는 노(魯) 나라 현인인데, 맹자(孟子)가 그를 작은 벼슬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 하황[河隍]하황은 하황(河湟)으로, 휘종이 잡혀갔던 오국성(五國城)을 가리킨다.
♣ 하황[蝦荒]하황해란(蝦荒蟹亂)의 준말로, 오(吳) 지방 풍속에 전하는 말인데, 즉 새우나 게는 마치 갑옷을 입고 창을 비껴든 것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것들이 많이 나타나면 이를 병란(兵亂)의 조짐으로 여긴 데서 온 말이다.
♣ 하회고택[河回故宅]하회 마을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에 있는 마을로, 풍산유씨(豐山柳氏)의 세거지(世居地)인데 선조 때의 명상 유성룡(柳成龍)이 거처했던 옥연정사(玉淵精舍)ㆍ원지정사(遠志精舍)등 다수의 고택이 있다.
♣ 하후기의[夏侯妓衣]발(簾)의 다른 말.
♣ 하후씨이송[夏后氏以松]논어(論語) 팔일(八佾)에 “하후씨는 소나무를, 은 나라는 잣나무를, 주 나라는 밤나무를 심어서 사(社)의 신주(神主)로 삼았다.[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하였다. 여기서의 신주는 상고시대에 사[士地]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신주의 표지(標識)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 하후탄주[夏后呑珠]하(夏) 나라의 왕 우(禹)의 어머니가 꿈에 구슬을 삼키고 우를 배었다 한다.
♣ 하휴[何休]후한(後漢)의 학자. 자는 소공(邵公). 그는 육경(六經)에 정통했으며 특히 공양춘추(公羊春秋)를 좋아했음. 저서에는 공양해고(公羊解詁)ㆍ공양묵수(公羊墨守) 등이 있음.
♣ 하휴간[夏畦艱]태평 시대 사람처럼 초연하게 숨어살며 세상에 아첨하지 않음을 말함. 격양가(擊壤歌)에 “밭을 갈아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니 임금의 힘이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였고,맹자(孟子) 滕文公下에 “어깨를 움츠리며 아첨하는 웃음은 여름 이랑에 일하는 것보다 힘들다.” 하였음.
♣ 하흠[賀欽]하흠은 명(明) 나라 때의 사람으로, 자가 요공(堯恭)이며, 요동 광녕(廣寧) 사람이다. 일찍이 진백사(陳白沙)가 강론하는 것을 듣고는 그날 즉시 벼슬자리를 내던지고 가서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을 배웠다. 그 뒤에 의무려산으로 들어가서 이학(理學)에 전념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키니, 사람들이 의려 선생(醫閭先生)이라고 칭하였다.
♣ 학가[鶴駕]왕세자(王世子)를 말한다.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구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를 인해서 후대에는 태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하게 되었다.
♣ 학강구[鶴降緱]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晉)이 왕을 간하다가 쫓겨났는데, 그는 젓대를 잘 불었고, 도사(道士) 부구생(浮丘生)과 숭고산(嵩高山)에서 30년을 같이 있었다. 그 후에 환량(桓良)이란 사람을 보고 “그대가 내 집에 가서, 7월 7일에 구씨산(緱氏山) 위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그날 집안 식구가 그곳에 이르니, 진이 백학(白鶴)을 타고 나타났다 한다. 《逸周書 太子晉解》
♣ 학개[鶴蓋]학개는 수레 뚜껑이 학 날개와 같다는 뜻이다. 유정(劉楨)의 노도부(魯都賦)에 “수레 뚜껑은 학과 같고 말은 뛰어노는 물고기 같다.” 하였다.
♣ 학경[鶴經]은자(隱者)들이 즐겨 읽는 상학경(相鶴經)의 준말이다.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유제이힐임정(留題李頡林亭)’이라는 시에 “거문고도 없이 학경을 베고, 온종일 숲 정자에 누워 있노라.[無琴枕鶴經 盡日臥林亭]”라는 구절이 있다.
♣ 학경불가단[鶴脛不可斷]사물에는 각각 적절한 면이 있으므로 함부로 손익(損益)해서는 안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학곡[鶴谷]홍서봉(洪瑞鳳)의 호이다.
♣ 학관수류성[鶴觀水流聲]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관기(觀棋) 시 서문에 “나는 본디 바둑을 둘 줄 모르는데, 일찍이 여산(廬山)의 백학관에서 혼자 노닐적에 고송(古松) 밑의 흐르는 물에서 바둑 두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十一》
♣ 학교[鶴翹]소나무의 일종. 한악(韓偓)의 시에, “학교송을 등나무가 휘휘 감아 죽이누나.[野藤纏殺鶴翹松]”하였음.
♣ 학구소붕[鷽鳩笑鵬]작은 비둘기가 큰 붕새를 보고 웃는다. 되지 못한 소인이 위인의 업적과 행위를 비웃는다는 뜻.
♣ 학기[學記]예기(禮記)의 편명.
♣ 학두서[鶴頭書]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학서(鶴書)가 언덕 위로 달려온다.” 한 주에 “한(漢) 나라 때 선비를 초빙하는 편지를 마치 학의 머리처럼 쓰는 전자체(篆字體)를 이용한 까닭에 그 편지 명칭을 학두서(鶴頭書)라 했다.” 하였다.
♣ 학려구고[鶴唳九皐]시경(詩經) 소아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울면 소리가 들판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野]" 한 데서 온 말이다. 구고는 수택(水澤)의 깊은 곳을 말한다.
♣ 학려진병산[鶴唳秦兵散]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진(晋)을 치다가 패하여 군사들이 달아날 때 바람 소리와 학(鶴)의 울음을 듣고도 진(晋)의 군사가 추격하는 줄 알고 놀래었다.
♣ 학려화정[鶴唳華亭]오(吳) 나라 명사(名士) 육기(陸機)가 진(晋)나라에 와서 벼슬하다가 화(禍)를 당하여 잡혀 죽으면서 탄식하기를, “화정(華亭)의 학(鶴) 우는 소리를 언제나 다시 들으랴.” 하였는데, 그것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중원(中原)에 와서 벼슬한 것을 후회한 것이다.
♣ 학령[鶴翎]국화의 일종.
♣ 학린[涸鱗]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있는 물고기로, 몹시 위급한 지경에 처한 것을 뜻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내가 어제 오는데 중도에서 부르는 자가 있어서 돌아보니 수레 가운데에 붕어가 있어 말하되, ‘말되[斗升]의 물로 나를 좀 살려 주시겠소.’하였다. 내가 대답하되, ‘그러게. 내가 이제 남으로 오월(吳越)의 왕을 찾아가 달래어 서강(西江)의 물을 끓어다가 자네를 살려주리.’하였다. 붕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를 차라리 마른 고기 가게에서나 찾게 될 것이오.’ 하였다.”라 하였다.
♣ 학림[鶴林]학림은 청 나라 예도손(倪稻孫)
♣ 학무[鶴舞]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악사(樂師)인 사광(師曠)이 거문고를 연주하자 검은 학이 목을 길게 빼면서 울고 깃을 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韓非子十過》
♣ 학발쌍친[鶴髮雙親]학의 털과 같이 머리가 하얗게 센 부모님. 부모님이 나이가 많이 들어 늙어 가고 있음을 뜻함.
♣ 학봉[鶴峯]안동(安東)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학가산(鶴駕山)을 가리킨다.
♣ 학부[涸鮒]동해의 물고기가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에 있으면서, 한 말이나 한 되 정도의 물만 부어 주면 살아나겠다고 애원한 학철부어(涸轍鮒魚)의 고사가 있다. 《莊子 外物》
♣ 학부[學蔀]정학(正學)을 덮어 가린다는 뜻으로, 이단시되는 불교(佛敎)와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가리키는데, 명(明) 나라 때 진건(陳建)이 찬한 학부통변(學蔀通辯)의 명칭에서 온 말이다.
♣ 학사[壑蛇]소동파(蘇東坡)의 제야시(除夜詩)에 있는 구절인데, 구렁에 들어가는 뱀은 꼬리를 당겨도 나오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학사[學士]학사는 당 나라 때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거쳐 국자 사업(國子司業)을 지낸 소원명(蘇源明)을 가리킨다.
♣ 학사연[學士宴]학사(學士; 고려시대 과거의 시관)가 과거 합격자 발표가 끝난 뒤 문생(門生)들과 함께 부모와 자기의 좌주(座主)를 찾아보고 여는 잔치를 말한다.
♣ 학사제염[學舍虀鹽]제염(虀鹽)은 나물과 소금으로, 소식(素食)을 하는 청빈한 태학(太學)의 관직을 말한다.
♣ 학상선[鶴上仙]선인들이 대개 학을 타고 노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 학상요천[鶴上遼天]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정령위(丁令威)는 요동 사람인데 영허산(靈虛山)에서 도(道)를 배우고 학으로 변신하여 요동으로 돌아와서 공중에 배회하며 ‘새여 새여 정령위는 집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 돌아왔네. 성곽은 그대론데 사람은 아니로다.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고 무덤만 쌓여 있나.’라고 했다.” 하였음.
♣ 학서[鶴書]임금이 은사(隱士)를 부르는 조서(詔書)를 학서(鶴書)라 하는데, 고대의 예서(隸書) 자체(字體)에 학두서(鶴頭書)라는 자체가 있는데, 임금이 은사를 부르는 데는 학두서(鶴頭書)를 쓴다.
♣ 학서[鶴書]조정에서 보내는 사면장을 말하는데, 죄수를 사면할 때의 행사에 썼던 때문에 온 말. 송사(宋史) 예지(禮志)에 “누(樓)에 납시어 사면하고 비단실로 목학(木鶴)을 묶어 놓고 줄을 누 아래로 늘여 놓으면 선인(仙人)이 목학을 타고 제서(制書)를 받들고 내려간다.” 하였다.
♣ 학성[鶴城]울산(蔚山)의 옛 이름.
♣ 학성[鶴城]학성은 안변(安邊)의 고호(古號)이다.
♣ 학수경[鶴殊脛]장자(莊子) 변무(騈拇) 편에, 오리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각기 그 본성이라 하였다.
♣ 학수고대[鶴首苦待]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애타게 기다림.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애태우며 기다림.
♣ 학습수비[學習數飛]배워 얻은 것을 수시로 익히기를 어린 새가 날기를 익히듯 한다 는 것임. 논어(論語) 學而 “배워 얻은 것을 수시로 익히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닌가.” 했는데, 그 주에 “익힘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워서 마지않는 것이 새가 자주 낢과 같다.” 하였다.
♣ 학야[鶴野]옛날 요동(遼東) 사람인 정령위(丁令威)가 선술(仙術)을 배워서 뒤에 학(鶴)이 되어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울었으므로 요동을 ‘학 벌판[鶴野]’이라 한다.
♣ 학야[鶴野]학야는 만주 벌판을 가리키는 말로, 최보(崔溥)의 표해록(漂海錄)에 “광녕(廣寧)의 동쪽, 해주위(海州衛)의 서쪽, 요동(遼東)의 북쪽에 길게 뻗어 들어간 큰 들판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학야(鶴野)라고 하는 곳이다.”라는 말이 있다.
♣ 학어[鶴馭]태자의 수레로, 흔히 태자의 별칭으로 쓰인다.
♣ 학어승구[鶴馭昇緱]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 왕자 교(王子喬)가 선인(仙人)이 되어 구산(緱山)에서 백학(白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仙傳 卷上 王子喬》
♣ 학여불급[學如不及]배움은 언제나 모자라다고 생각하라. 학문은 쉬지 않고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으니, 따라잡기 위해서는 늘 시간을 아껴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뜻.
♣ 학여전[鶴與錢]옛날에 네 사람이 모여서 각기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돈 만 관(萬貫)을 가지기가 소원이다.” 하였으며, 한 사람은, “나는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가 소원이다.” 하고 또 한 사람은, “양주자사(楊州刺史)가 되기가 소원이다.” 하니, 한 사람은, “나는 돈 만 관을 허리에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로 가겠다.” 하였다.
♣ 학역구[學易瞿]당 현종(唐玄宗) 때 태사감(太史監)을 지냈던 천축(天竺) 사람인 구담 실달(瞿曇悉達)을 말함.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대당개원점경(大唐開元占經) 110 권을 저술하였다.
♣ 학원유약[鶴猿有約]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속에 은거해 살 생각을 하였다는 뜻이다.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자신과 함께 북산(北山)에 은거하던 주옹(周顒)이 벼슬길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향초로 엮은 장막은 텅 비어 학은 밤마다 원망의 울음 울고, 산인(山人)이 떠나고 없어 원숭이는 놀라서 우는구나.”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에 갇힌 듯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학이지지[學而知之]배워서 앎.
♣ 학익진[鶴翼陣]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펴듯이 좌우로 길게 포위하는 진법(陣法)이다.
♣ 학일구[貉一丘]한(漢) 나라 양휘(楊揮)의 말에, “예와 이제가 한 언덕의 담비와 같다.” 하였으니, 동류(同類)란 말이다.
♣ 학자여우모성자여린각[學者如牛毛成者如麟角]배우는 사람은 소의 털과 같이 많고, 이룬 사람은 기린의 뿔과 같이 드물다.
♣ 학자탁련[鶴觜拆蓮]옛날 희극(戲劇) ‘학연화대(鶴蓮花臺)’에서 두 동녀(童女)가 연꽃 봉오리 속에 들어앉아 있다가 사람이 분장한 학이 나아가 주둥이로 쪼으면 동녀들이 깡충 뛰어나와 춤을 춘다. 《樂學軌範》
♣ 학장부단[鶴長鳧短]장자(莊子) 병무(騈拇)에 “오리 다리가 비록 짧아도 이어주면 걱정을 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어도 잘라주면 슬퍼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천성은 길어도 자를 것이 아니요 짧아도 이을 것이 아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학장주[壑藏舟]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바뀌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어 두고 어살을 연못 속에 감추어 두면 든든하게 감추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밤중에 힘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을 것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학저[鶴邸]학저는 황태자 궁전을 학궁(鶴宮)이라고 한 데서 세자궁을 비유한 말이다.
♣ 학적천[鶴吊阡]진(晉) 나라 때 도간(陶侃)이 모상(母喪)을 당했을 적에 두 사람이 와서 조문을 하고는 두 마리의 학(鶴)으로 변화하여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陶侃傳》
♣ 학전주[鶴錢州]옛날 사람들이 모여 각기 소원을 말하는데, 혹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혹은 돈을 흠뻑 가지고 싶다 하고 혹은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고 싶다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하되, “나는 허리에 10만 관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올라가고 싶네.” 하였다.
♣ 학정[鶴頂]산다(山茶)의 일종. 산다의 일종으로 학정홍(鶴頂紅)이 있는데, 그 잎이 목서(木犀)의 잎과 같아 질이 단단하고 능각(稜角)이 있으며 차잎과 비슷하여 음료(飮料)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차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함. 《群芳譜》
♣ 학제[學製]스스로 지방관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겸사의 말이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31년에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사람을 시켜 옷 짓는 일을 배우는 데에 쓰게 하지 않을 것이다. 큰 고을은 몸이 의지하는 곳인데, 서투른 사람에게 다스리도록 한다면 오히려 좋은 비단을 사람보다 더 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학주[壑舟]사람이 사는 것은 영원한 것 같지만 생사 변화하는 조화(造化)의 힘은 피하지 못한다는 것임.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늪속에 숨겨 놓고는 이제 완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밤중에 힘센 이가 등에 지고 달아날 수가 있는데, 우매한 자들은 이런 사실조차 알지를 못한다.[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 학주[鶴柱]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 앉아 시를 읊은 고사를 말한 것임.
♣ 학주불자고[壑舟不自固]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큰 구렁에 배를 숨기고, 못에다 산을 숨겨 둔다면 견고하다고 할 만하나, 한밤중에 힘이 센 자가 이것을 등에 지고 달아나 버리면 어두운 자는 알지 못한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아무리 견고하다는 것도 끝내 장담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학주이[壑舟移]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어 두고 어살을 연못 속에 감추어 두면 든든하게 감추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밤중에 힘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을 것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학참군[郝參軍]진(晉) 나라 때 환온(桓溫)의 남만 참군(南蠻參軍)을 지낸 학륭(郝隆)을 가리킨다. 7월 칠석(七夕)에는 옷가지를 햇볕에 말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학륭은 대낮에 누워서 자신의 뱃속에 들어 있는 책들을 햇볕에 쪼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 학창[鶴氅]학창은 새털로 만든 갖옷에 대한 미칭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기선(企羨)에 “맹창(孟昶)이 영달하기 이전에 그의 집이 경구(京口)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보니 왕공(王恭)이 학창의를 입고 높은 수레에 탔는데 때마침 눈발이 약간 뿌리고 있었다. 맹창은 울타리 사이로 그 광경을 엿보고 감탄하기를 ‘이는 참으로 신선 속의 인간이다.[此眞神仙中人也]’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 학창의[鶴氅衣]신선들이 입는 새의 깃털로 만든 옷으로, 도포(道袍)를 뜻한다. 진서(晉書) 왕공전(王恭傳)에 “왕공이 언젠가 학창의를 입고 눈밭을 거닐었는데 맹창(孟昶)이 이를 엿보고는 ‘참으로 신선 세계 속의 사람이다.[此眞神仙中人也]’고 찬탄했다.” 하였다.
♣ 학철[涸轍]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괸 물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이른 말로 매우 곤궁한 처지를 말한다. 《莊子 外物》
♣ 학철고어[涸轍枯魚]곤경에 처해 원조를 급히 청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수레 바퀴로 패인 야트막한 웅덩이[涸轍]의 물고기가 원조를 청하다 못해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라고 한탄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莊子 外物》
♣ 학철부어[涸轍鮒魚]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곤궁한 처지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장자가 감하후(監河侯)를 찾아가 곡식을 빌려 하자, 그는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빌려주려 하였다. 장자는 성을 내면서 ‘나는 오다가 길에서 부르는 이가 있기에 돌아보니, 수레바퀴 속의 고인 물[涸轍]에 있는 붕어였습니다. 나는「붕어야! 왜 나를 부르는가?」하고 물었더니, 붕어는「나는 동해(東海)의 파신(波臣)인데, 그대는 나에게 한 말 [斗]의 물을 주어 살게 할 수 없겠는가?」하였습니다. 나는「좋다! 나는 오월(吳越)의 왕을 찾아가는 길이니,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 주마.」하자, 붕어는 성을 내면서「나는 내가 늘 있던 물이 아니면 싫소. 나는 한 말의 물만 있으면 충분한데 그대는 이렇게 말하니, 차라리 나를 마른 생선 가게에서 찾는 것이 나을거요.」했습니다.’ 하고는 받지 않았다.” 하였다.
♣ 학철어[涸轍魚]장자(莊子) 외물(外物) 편에 나오는 말로, 수렛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처럼 곤경에 처하여 애타게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을 비유함.
♣ 학포번[學圃樊]번지(樊遲)는 공자의 제자로 일찍이 공자에게 벼를 심는 방법과 채전[圃]을 가꾸는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論語 子路》
♣ 학포소인수[學圃小人須]수(須)는 공자(孔子)의 제자 번지(樊遲)의 이름.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번지가 농사를 배우려 하자, 공자가 소인이로구나 번수여, 예(禮)와 의(義)와 신(信)을 좋아하면 사방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을 텐데 왜 농사를 짓고 싶어하느냐.” 하였다.
♣ 학하소지여[學何所至與]배움이 어느 곳에 이르렀는가?
♣ 학학[嗀嗀]구역질하는 모양, 토하는 소리
♣ 학학[嗃嗃]엄하고 매우 심한 모양
♣ 학해[學海]학해는 학문의 바다로, 학문의 길이 바다처럼 가없음을 말한다.
♣ 학화웅담[學和熊膽]당(唐) 나라 때 유중영(柳仲郢)이 어려서 공부할 적에 그의 모친 한씨(韓氏)가 일찍이 약(藥)에다 웅담을 섞어 조제하여 중영에게 먹여서 건강을 돌봐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柳仲郢傳》
♣ 한가[漢歌]한가(漢歌)는 오랑캐를 쫓았으니 한(漢) 나라 노래 부르는 소리만이 있다는 것이다.
♣ 한가용비사수활[漢家龍飛泗水闊]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상정장(上亭長)으로 몸을 일으켰다.
♣ 한각반렴산[閑却半簾山]문을 닫고 산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 한간[韓幹]한간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이름난 화가(畫家)로서 특히 인물(人物)과 안마(鞍馬)의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패(曹霸)를 사사(師事)하였으나 뒤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독보적 존재가 되었으며, 옥화총(玉花驄)ㆍ조야백(照夜白) 등의 말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尙友錄》
♣ 한간마도[韓幹馬圖]한간은 당 나라 남전(藍田) 사람인데 당서(唐書) 명화기(名畫記)에는 대량(大梁) 사람으로 되어 있다. 현종(玄宗)이 큰 말을 좋아하여 어구(御廏)에는 사십만 필이나 되었는데 그 중 준마(駿馬)를 한간이 모두 그렸는데 고금의 독보가 되었음. 소식의 한간마십사필시(韓幹馬十四匹詩)가 있음.
♣ 한강백[韓康伯]진(晉)의 한백(韓伯). 강백(康伯)은 그의 자임.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추운 겨울에 자기 어머니가 저고리를 만들어주면서 빨리 다림질을 하라고 하고, 계속하여 바지를 만들려고 하자, 강백은 자기 어머니에게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 어머니가 까닭을 물으니 강백이 대답하기를, “이 다리미 속에 불이 있으니까 다리미자루까지 따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위에다 따뜻한 저고리를 입었으니 그 따뜻함이 점차 아래까지 내려올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그 어머니는 강백을 특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晉書 韓伯傳》
♣ 한강투석[漢江投石]한강에 돌 던지기. 지나치게 미미(微微)하여 전혀 효과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
♣ 한개광명원[漢改廣明園]한 선제(漢宣帝)가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무덤을 개장(改葬)한 것을 말한다. 무덤의 이름은 원래 도원(悼園)인데 광명(廣明)의 성곽 북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광명원이라고 가칭한 것이다. 《漢書 卷63》
♣ 한거부[閒居賦]벼슬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냄. 옛 사람들이 허다히 세상에 숨어 한가롭게 살기를 좋아하는 뜻에서 한거부(閒居賦)를 쓴 이들이 많았다.
♣ 한거부[閑居賦]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이 지은 문장의 이름으로, 이것은 대개 세상 일을 다 잊어버리고 한정하게 지내는 뜻을 서술하고 있다.
♣ 한걸[寒乞]한걸은 의복이 남루한 걸인을 뜻하는 말이다.
♣ 한경기[韓景琦]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치규(稚圭), 호는 향설당(香雪堂) 또는 동고(東皐). 본관은 청주.
♣ 한계승추[韓洎繩樞]승추는 기둥에 노끈으로 지도리를 매단 문으로 가난한 집을 가리킨다. 송(宋) 나라의 한계는 그의 형 한부(韓溥)와 함께 문장을 잘하여 명망이 있었는데, 한계는 늘 형을 경시하여 “우리 형님의 글은 승추와 같아서 겨우 비바람만을 막을 뿐이고, 나의 글은 아름다운 오봉루(五鳳樓)를 꾸밀 수 있다.” 하니, 한부는 촉(蜀)에서 생산되는 좋은 종이를 주면서 시를 지어 말하기를 “형은 이 종이를 얻었으나 전혀 쓸데가 없기에 너의 오봉루 꾸미는 것이나 도우려 한다.[老兄得此全無用 助汝添修五鳳樓]" 하였다. 《宋史新編》
♣ 한고[漢皐]산의 이름이다. 주(周)의 정교보(鄭交甫)가 남으로 초(楚)에 가는 길에 한고대(漢皐臺) 아래를 지나다가 두 여자를 만나 두 구슬을 찬 것을 보고 그 구슬을 청하여 얻었다. 《韓詩外傳》
♣ 한고[漢錮]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 한고선자패경요[漢皐仙子佩瓊瑤]“정교보(鄭交甫)가 남으로 놀새 저 한고대(漢皐臺) 밑에 올라 두 여자를 만나니 옥을 차고 있었다. 교보가 눈짓하여 정을 돋우니, 두 여자가 찬 것을 풀어 주었다.” 《漢詩外傳》 한고(漢皐)는 산 이름. 호북성(胡北省) 서북.
♣ 한고연패[漢皐捐佩]주(周)의 정교보(鄭交甫)가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을 만나, 그들에게 “그대의 패물(佩物)을 갖고 싶다.” 하자, 두 여인이 정교보에게 패물을 주므로, 교보는 그 패물을 받아 품속에 간직하고서 10여 보(步)쯤 가다 보니 패물이 없어졌고, 두 여인도 없어졌다는 고사이다.
♣ 한곡편양휘[寒谷徧陽暉]당(唐) 나라 재상 송경(宋璟)이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밟고 가는 곳마다 따스한 봄볕이 묻어나온다[有脚陽春]고 일컬어졌던 고사가 전한다. 《開元天寶遺事 卷下》 또 전국 시대 추연(鄒衍)이 연(燕) 나라의 한곡(寒谷)에 가서 율관(律管)을 취주(吹奏)하자 기후가 따뜻해져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論衡 寒溫篇》
♣ 한공애태전[韓公愛太顚]한공(韓公)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이르는데,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있을 적에 태전(太顚)이라는 중이 썩 위인이 훌륭하므로 그를 불러서 같이 노닐고 또 서로 왕래도 하였으며, 그 후 조주(潮州)를 떠날 적에는 그에게 의복(衣服)을 남겨주고 작별을 하기까지 하여, 어떤 사람들에게 한유가 불씨(佛氏)를 숭봉(崇奉)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내용은 한유가 상서(尙書)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 한공연압구[韓公宴狎鷗]한공은 조선 세조 때의 상신 한명회(韓明澮)를 이르는데, 한명회가 일찍이 압구정(狎鷗亭)을 짓고 거기서 노닐었으므로, 갈매기와 친하기만 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 한공오궁[韓公五窮]한공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키고, 오궁(五窮)은 한유가 지은 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지궁(智窮)ㆍ학궁(學窮)ㆍ문궁(文窮)ㆍ명궁(命窮)ㆍ교궁(交窮)을 말한다.
♣ 한공월[韓公鉞]수(隋) 나라 한금호(韓擒虎)가 대장이 되어 진(陳) 나라를 쳐서 멸하였는데, 도끼[銊]는 임금이 출정(出征)하는 대장에게 내려주는 것이다.
♣ 한공탄순양[韓公呑荀楊]한공은 당나라 헌종(憲宗) 때의 한유(韓愈)인데, 유학문장(儒學文章)으로서 맹자(孟子)의 후계라 자칭하고 순자(荀子)와 양웅(楊雄)을 정상(精詳)하지 못하다고 비평하였다.
♣ 한관[漢關]중국의 변새(邊塞), 즉 변방을 뜻한다.
♣ 한관위의[漢官威儀]한(漢) 나라 조정 관원들의 복식(服飾)과 전례(典禮), 제도(制度)로, 번성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제1권 광무제기 상(光武帝紀上)에, “사례(司隷)와 요속(僚屬)들이 보고는 모두들 기쁨을 금치 못하였으며, 늙은 아전들은 혹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에 다시금 한관의 위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하였다.
♣ 한관의[漢官儀]전한(前漢)이 망한 지 10여 년만에 한(漢) 나라를 광복(光復)하려는 군사가 일어났는데, 유수가 관들을 설치하여 삼보(三輔)로 지나가니 늙은 백성들이, “오늘날에 야 한관(漢官)의 의기를 볼 줄을 몰랐다.”고 기뻐하였다.
♣ 한굉[韓翃]당 나라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군평(君平)이다. 대력(大歷) 십재자(十才子)의 한 사람이다.
♣ 한교악지위린[韓蛟鱷之爲隣]당 나라 때 한유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어 가 있을 적에 악어가 백성들을 침범하여 해를 끼치자, 제악어문(祭鰐魚文)을 지어 악어를 물리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한구[韓歐]당송팔가(唐宋八家)의 일원인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
♣ 한구[寒具]방한용(防寒用)의 의복.
♣ 한구[韓駒]송(宋) 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자창(子蒼). 소철(蘇轍)에게서 수업하였고, 벼슬은 저작랑(著作郞)을 거쳐 강주지사(江州知事)에 이르렀음. 저서에는 능양집(陵陽集)이 있음.
♣ 한구이보가봉류[韓仇已報可封留]장량(張良)은 본시 한(韓)의 세족(世族)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진(秦)에 대항하여 일어났다가 한 고조(漢高祖)를 만나 진을 멸하고 나중에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 한궁비[漢宮妃]한(漢) 나라 때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을 말한다.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이라는 이백(李白)의 시로 더욱 유명하다. 《李太白詩集 卷3 王昭君》
♣ 한기[韓琦]송조(宋朝)의 명신.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음. 《宋史 卷三百十二》
♣ 한난염량[寒暖炎凉]차가움과 따뜻함, 더움과 서늘함 곧, 흐르는 세월
♣ 한남재자[漢南才子]조식(曹植)을 말하는데 그가 업하(鄴下)에 있었다.
♣ 한녀금전규효경[漢女金鈿窺曉鏡]한녀는 한수(漢水)의 여신. 아름다운 여자가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한다는 뜻.
♣ 한다폭소[寒多曝少]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천하에 손쉽게 생장하는 식물이 있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게 하고 열흘 동안 춥게 한다면[一日暴之 十日寒之], 제대로 생장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 한단[邯鄲]한단은 전국(戰國) 시대 조(趙) 나라의 서울. 전하여 조 나라를 가리킨 말이다.
♣ 한단가청구[邯鄲駕靑軥]한단은 당(唐)의 이필(李泌)이 지은 황량몽(黃梁夢)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노생(盧生)을 가리킨다. 한단의 나그네였던 노생은 허술한 단갈(短褐)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도자(道者)인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은 주머니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것을 베고 자면 자네는 마음대로 부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노생은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꿈속에 온갖 부귀공명을 누렸다. 깨어나 보니, 자신이 자기 전에 주인이 누른 기장[黃梁]으로 떡을 찌고 있었는데 아직 다 익지 못하였다. 노생은 하도 허무해서 이상스레 여기자 여옹은 “세상일이 모두 이 꿈과 같다.” 했다. 여기에 한단이 나오므로 한단몽(邯鄲夢)이라고도 하며 침중기(枕中記)라고도 한다.
♣ 한단갱[邯鄲坑]전국 때 조(趙)의 도읍. 진(秦)의 장수 백기(白起)가 기병(騎兵)으로 조군(趙軍)을 대파하고 조의 장수 조괄(趙括)을 쏘아 죽이고 조의 항복한 군졸 45만을 장평(長平)에서 무찔러 죽였다.
♣ 한단금수사[邯鄲錦繡詞]삼국 시절 위(魏)의 한단 순(邯鄲淳)을 말한 것으로 그가 창아(蒼雅) 충전(蟲篆) 등을 잘 썼다고 함. 《三國志》
♣ 한단몽[邯鄲夢]황량몽(黃粱夢)과 같다.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의 비유이다. 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여사(旅舍)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궁곤한 신세를 한탄하자, 여옹은 주머니 속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 베개를 베면 영달(榮達)할 수 있다.” 하였다. 이때에 그 주인은 황량(黃粱)을 찌기 시작하였는데, 노생은 이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꿈속에 미인(美人)인 최씨(崔氏) 여자에게 장가들어 훌륭한 자녀를 많이 낳았고 노생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름과 동시에 아들 5형제가 다 벼슬하고 손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으며, 나이는 80세가 넘어서 죽었는데, 그 꿈을 깨고 나니 황량이 아직 익지 않았더라는 고사이다. 《枕中記》
♣ 한단보[邯鄲步]한단학보(邯鄲學步)의 준말. 연(燕) 나라의 소년 수릉(壽陵)이 조(趙) 나라 서울 한단 사람의 한가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린 고사.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름.
♣ 한단불여수릉[邯鄲不如壽陵]남을 흉내내느니보다는 자기 고유의 것이 더 낫다는 말. 연(燕) 나라 수릉(壽陵)의 어린애가 조(趙)의 수도인 한단(邯鄲)에 와서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결국은 자기 나라 걸음마저 잊어버리고 기어서 돌아갔다는 것임. 《莊子 秋水》
♣ 한단자[邯鄲子]한단은 전국 시대조(趙) 나라의 서울이었으므로, 전하여 한단자는 조씨(趙氏)를 가리키는 말이다.
♣ 한단주[邯鄲酒]뜻밖의 사태가 전개되면서 엉뚱하게 피해를 보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에 바친 조(趙) 나라의 술은 진했고 노(魯) 나라의 술은 묽었는데, 앙심을 품은 초 나라의 관리가 이를 뒤바꿔서 바치자, 초왕(楚王)이 화를 내면서 조 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공격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莊子 胠篋》
♣ 한단지몽[邯鄲之夢]한단에서 여옹이 낮잠을 자면서 꾼 꿈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부귀란 덧없다’는 뜻.
♣ 한단지보[邯鄲之步]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자기의 본분을 잊고 공연히 남의 흉내를 내다보면 두 가지 다 제대로 할 수 없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한단학보(邯鄲學步)
♣ 한단청구하필치[邯鄲靑駒何必恥]청구(靑駒)는 한단몽에서 나오는 노생의 말[馬] 이름인데, 여기서는 곧 노생을 지칭한다. 아무리 푸른 사기 베개를 베고 노생의 한단몽처럼 허무한 꿈을 꾼다 한들 무어 그리 부끄럽겠느냐는 뜻이다.
♣ 한단침[邯鄲枕]인생의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모두 꿈결처럼 헛되고 덧없는 것을 말한다. 이필(李泌)의 침중기(枕中記)에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19년에,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노생(盧生)이란 한 곤궁한 소년이 신세타령하는 것을 보고, 자기 베개를 빌려 주면서 ‘이 베개를 베고 자면 그대가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노생이 그 베개를 베고 잤는데 과연, 꿈속에 청하(淸河)에 사는 최씨(崔氏)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또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부귀영화를 일평생 누리고 살다가 꿈을 깨어 본즉, 아까 여관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채 익지 않았다. 이에 여옹이 웃으면서 ‘인간 세상의 일도 이 꿈과 마찬가지이다.’ 했다.” 하였다.
♣ 한단행[邯鄲行]장자(莊子) 추수(秋水)에 “子獨不聞夫壽陵餘子之學行於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라 하였음. 이는 남의 것을 본뜨려고 하다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함.
♣ 한당인[漢黨人]한(漢) 나라의 당인이란 곧 후한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에 걸쳐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두무(竇武) 등 우국지사들이 환관(宦官)의 발호를 미워하여 태학생(太學生)들을 거느리고 함께 그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그들로부터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으로 몰리어, 당시 뜻을 같이했던 1백여 인의 선비들과 함께 피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後漢書 黨錮傳》
♣ 한대[漢臺]공신으로 책록(冊錄)되었음을 뜻한다. 한대(漢臺)는 바로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공신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신 28인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았던 운대(雲臺)를 가리킨다.
♣ 한대서경[漢代西京]한 나라가 장안(長安)에 도읍했었는데, 동한(東漢) 때에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장안을 서경이라 했다.
♣ 한도성어사[漢道盛於斯]두보의 시에서 한 나라는 문장이 심후해서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 유향(劉向), 왕포(王褒) 등 훌륭한 문장가가 많이 있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杜詩澤風堂批解 偶題 註》
♣ 한랑설리파[韓郞雪裏葩]한유(韓愈)의 질손(姪孫)인 한상(韓湘)은 자신이 준순주(逡巡酒)를 빚어 잠깐 사이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한유가 “네가 조화를 빼앗아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하자, 한상은 흙을 쌓아 놓은 다음 동이로 덮어놓았다가 잠시 후 동이를 치우니 푸른 모란 두 떨기가 피어 있었는데 그 잎에 작은 금자(金字)로 “구름은 진령(秦嶺)에 비껴 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藍關)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라 적혀 있었다. 그 뒤 한유가 좌천되어 조주(潮州)로 가다가 남관에 이르러 눈을 만나고서 그 뜻을 깨달았다 하는데, 이때 한유가 멀리서 찾아온 한상에게 준 시 좌천지남관시질손상(左遷至藍關示姪孫湘)에 역시 “구름은 진령에 비껴 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라 읊은 다음 “네가 멀리서 온 것은 뜻한 바 있어서임을 아노니, 장강(瘴江) 가에서 나의 유골을 거두어 주게.” 하였다. 《太平廣記》
♣ 한로[韓盧]전국 시대 한국(韓國)에서 생산된 준견(俊犬)의 이름.
♣ 한로입지완로적[漢老入地完老謫]한로(漢老)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말하고 완로(完老)는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을 말한다. 이덕형은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양근(楊根)에 내려가 그해에 죽었으며, 이원익은 광해군 7년(1615)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
♣ 한록사[韓錄事]고려 때의 명사(名士) 한유한(韓惟漢)을 말함. 그는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하면서 조행(操行)이 고상하고 조촐하여 세상일을 간섭하지 않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한유한이 처음 서울에 살았으나, 최충헌(崔忠獻)의 정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장차 난(亂)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는데, 뒤에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 한롱적[韓隴笛]농적은 농서 지방의 젓대 소리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화최사인영월시(和崔舍人詠月詩)에 “고을의 누대 어느 곳을 바라볼까 농서의 젓대 소리 이때에 듣네[郡樓何處望 隴笛此時聽]" 하였다.
♣ 한륙견척[韓陸見斥]당 헌종(唐憲宗) 때 한유(韓愈)가 황보박(皇甫鎛)의 배척을 받아 중용(重用)되지 못한 일과 당 덕종(唐德宗) 때 육지(陸贄)가 노기(盧杞) 등의 배척을 받은 일을 말한다. 《당서(唐書) 卷一百五十七, 卷一百七十六》
♣ 한름진진속[漢廩陳陳粟]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 “太倉之粟 陳陳相因 充溢露積於外 至腐敗不可食”이라고 하였다.
♣ 한림[翰林]한림원(翰林院)의 학사. 문한(文翰)을 맡은 관원. 고려 후기와 조선에서는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ㆍ봉교(奉敎) 이하의 관원을 한림이라 통칭하였다. 한(翰)은 새의 깃, 곧 붓을 뜻하고, 임(林)은 무리로 많이 모인 것을 뜻한다.
♣ 한림[翰林]하지장(賀知章)의 추천을 받고 당 현종(唐玄宗)을 알현한 뒤 바로 한림으로 임명되어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이태백(李太白)을 가리킨다.
♣ 한림취부황학루[翰林醉賦黃鶴樓]당(唐)나라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일찍이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으므로 한림이라 칭함. 그는 “나는 또 그대를 위해 황학루를 쳐부수겠다[我且爲君搥碎黃鶴樓].” 하였다.
♣ 한마공[汗馬功]말이 땀을 흘리게 한 공로, 즉 전공(戰功)을 말한다.
♣ 한만[汗漫]한만(汗漫)은 광대무변한 세계를 말한다. 장자(莊子)에, “한만과 더불어서 천지 밖을 기약한다.” 하였다.
♣ 한만유[汗漫遊]속세를 초월한 신선의 유람을 말한다. 옛날 노오(盧敖)가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이인(異人)인 약사(若士)를 만나 함께 벗으로 노닐자고 청하자, 약사가 이에 응답하기를 “당신은 중주(中州)의 사람이다. …… 나는 구해(九垓) 밖에서 한만(汗漫)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하고는 곧바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구해(九垓)는 구천(九天)을 말한다. 《淮南子 道應訓》
♣ 한매[寒梅]추운 날씨에 꽃이 피는 매화 나무를 말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조물이 뭇 고목들 소생시키려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찬 매화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누나.[化工未議蘇群槁 先向寒梅一傾倒]”라는 표현이 보인다. 《蘇東坡詩集 卷22 再和潛師》
♣ 한매롱두신[寒梅隴頭信]친지(親知), 특히 모친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강남(江南)의 매화 한 가지를 장안(長安)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면서 “매화 가지 꺾다가 역마 탄 사신 만나, 농두의 벗 생각하고 부쳐 보내노라.[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라는 시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한맹[寒盟]애공(哀公)이 오 나라 측과 회동하였는데, 오 나라에서 전에 했던 맹약을 다시 굳힐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애공은 자공(子貢)을 시켜 말하기를, “맹약은 신의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지킬 것을 정하고, 옥과 폐백으로써 상대국을 받들며, 말로 약속을 맺고, 신에게 밝히어 그 약속 지키기를 맹세하는 것이다. 일단 맹약을 맺으면 그것을 고칠 수는 없다. 또 고쳐 맹약 맺을 것 같으면 날마다 맹약 맺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지금 그 쪽에서 전의 맹약을 굳게 해야 한다고 하나, 전에 맺은 맹약을 다시 굳힐 수가 있다면 그 맹약을 식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若可尋也 亦可寒也]”하였다. 이후로 맹약을 파기하거나 잊는 것을 ‘한맹’이라 일컫게 되었다. 《春秋左氏傳 哀公 12年》
♣ 한맹운[韓孟雲]고려 후기의 문신(文臣) 한수(韓脩). 맹운(孟雲)은 그의 자(字). 문과(文科)를 거쳐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를 역임하고 뒤에 청성군(淸城君)에 피봉되었다. 문장과 서법(書法)에 능하였다.
♣ 한면[漢沔]한수(漢水)와 그 상류인 면수(沔水). 형주(荊州)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
♣ 한무가사[漢武歌詞]한 무제(漢武帝)의 가사.
♣ 한문[寒門]북극의 산. 북문.
♣ 한문공[韓文公]당(唐) 나라 중기의 유학자이며 문장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이름은 유(愈), 자는 퇴지(退之).
♣ 한문석로대[漢文惜露臺]노대는 임금이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한 문제가 일찍이 이 노대를 지으려고 기술자를 불러 견적을 빼본 결과 백금(百金)이 들게 되므로, 문제가 이르기를 “백금은 중산층 십호(十戶)의 재산에 해당되니, 어찌 이 대를 만들겠는가.” 하고, 그만두었다. 《史記 文帝紀》
♣ 한문절공[韓文節公]한 문절공은 시호가 문절이고 호가 복재(復齋)인 고려 때의 명신 한종유(韓宗愈)를 말한다.
♣ 한반장[漢盤掌]한무제(漢武帝)는 한 나라 제5대 황제이며 승로반(承露盤)은 신선이 되기 위하여 이슬을 받아먹는 그릇. 무제는 신선을 좋아하여 구리로 승로반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20길이나 되고 크기가 열 아름이었다. 이 위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슬을 받고는 옥가루를 섞어 마시어 신선되기를 바랐다. 《漢書 卷六 孝武帝紀 三輔故事》
♣ 한발[旱魃]가뭄의 재앙을 일으킨다는 신화 속의 여신.
♣ 한발[捍撥]한발은 금은(金銀)이나 상아(象牙)로 장식한 비파(琵琶)를 타는 채를 말한다.
♣ 한부[恨賦]한부는 양(梁) 나라 때의 문인 강엄(江淹)이 지은 부인데, 고인(古人)들이 비색한 시운을 만나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탄식하여 지은 글로서, 매우 애절하기로 유명하다.
♣ 한비세난[韓非說難]세난은 30권으로 된 한비자(韓非子) 중의 한 편명으로 임금에게 유세하기 어려운 점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 진왕(秦王)이 한비자의 글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한(韓) 나라를 공격하면서까지 그를 보려고 하자, 한 나라가 그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와 순자(荀子) 밑에서 동문수학한 이사(李斯)의 모함에 걸려 하옥되었고 끝내는 이사가 보낸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史記 卷六十三》
♣ 한비장군[漢飛將軍]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 이광(李廣)을 말한다. 그가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부임하자, 흉노(匈奴)가 “한비 장군이 왔다.”고 하면서 모두 피하고 몇 년 동안이나 침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 李廣傳》
♣ 한빙지옥[寒氷地獄]불가에서 말하는 팔한지옥(八寒地獄). 곧 찬 얼음으로 고통을 받는 큰 지옥을 말한다.
♣ 한빙처[韓凭妻]송(宋) 강왕(康王)이 한빙의 아내 하씨의 미색을 탐내어 마침내 한빙을 붙잡아다가 벌로 고역(苦役)을 시키고는, 하씨는 자신이 차지했다. 하씨는 남몰래 사람을 시켜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시구(詩句)로 사랑을 위해 죽고자 하는 결심을 암시했다. 한빙은 편지를 본 후 오래지 않아 자살하였고, 하씨 역시 소식을 들은 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녀는 죽기 전 유언을 남겨 한빙과 같은 무덤에 장사지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송 강왕은 이것을 알게 된 후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고의로 그들을 양편으로 나누어 장사지내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 사람의 무덤에서는 하룻밤 사이 상사(相思)의 나무 두 그루가 자라나서 “뿌리는 아래에서 서로 얽히고, 가지는 위에서 엇갈렸고”, 원앙 한 쌍이 그 나무 위에 서식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떠나지 않고 목놓아 슬프게 울어대는데, 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이 원앙 한 쌍이 다름 아닌 한빙 부부의 혼령이라고들 했다.
♣ 한사[寒士]한사는 가난한 선비라는 뜻이다.
♣ 한사료치척격최[漢使聊馳尺檄催]한 무제가 선우대(單于臺)에 오른 뒤 18만 대군을 거느리고 위엄을 떨치면서 선우에게 사신을 보내 고하기를 “남월왕의 머리는 이미 북궐에 걸어 놓았다. 선우 그대가 싸울 능력이 있으면 천자인 내가 직접 변경에서 기다릴 것이요, 싸우지 못하겠거든 속히 와서 신하로 복종하라.[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矣 單于能戰 天子自將待邊 不能 亟來臣服]”하였다. 《漢書 卷6》
♣ 한사마[韓司馬]북제(北齊)의 한궤(韓軌)를 말한다. 대사마(大司馬)로서 유유(蠕蠕)를 정벌(征伐)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北齊書 卷十五 韓軌傳》
♣ 한사마[韓司馬]한퇴지는 당 나라 한유(韓愈). 배도(裴度)가 회서(淮西)를 칠 때에 한퇴지(韓退之)가 행군사마(行軍司馬)의 직책으로 종군(從軍)하였다.
♣ 한사사[漢使槎]한 무제(漢武帝) 때의 장건(張騫)이 대완(大宛)ㆍ강거(康居)ㆍ월지(月支)ㆍ대하(大夏) 등 멀리 서북방의 외국에 사신으로 나갈 때 뗏목을 타고 하수(河水)를 따라 올라갔다 한다.
♣ 한사승사[漢使乘槎]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褰)이 사신 길에 뗏목을 타고 다녔다는 고사가 있다.
♣ 한사진동[漢士秦童]한 나라 방사(方士)는 한 무제(漢武帝) 때에 신선을 찾던 방사이고, 진(秦) 나라 동자(童子)는 진 시황(秦始皇) 때에 서불(徐巿)를 따라 삼신산(三神山)으로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갔던 동남 동녀(童男童女)를 말한다.
♣ 한산[寒山]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한산사(寒山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가 유명하다.
♣ 한산백[韓山伯]목은(牧隱) 이색(李穡)을 가리킨다.
♣ 한산자[寒山子]당(唐) 나라 때 천태산(天台山)에 있던 고승(高僧).
♣ 한산팔경[韓山八景]한산의 여러 가지 경치.
♣ 한산편석[韓山片石]뛰어난 문사(文士)가 떠나게 됨을 비유한 말. 한산은 곧 한릉산(韓陵山)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유신(庾信)이 남조(南朝)로부터 맨 처음 북방(北方)에 갔을 적에 당시 북방의 문사인 온자승(溫子昇)이 한릉산사비(韓陵山寺碑)를 지었으므로, 유신이 이 글을 읽고 베끼었는데, 남방의 문사가 유신에게 묻기를, “북방의 문사들이 어떠하던가?" 하니, 유신이 대답하기를, “오직 한릉산에 한 조각 돌이 있어 함께 말을 할 만하더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朝野僉載 卷六》
♣ 한상[韓湘]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 한퇴지(韓退之)의 조카.
♣ 한상[韓湘]한상은 당(唐) 한유(韓愈)의 종손(從孫)으로서 도술(道術)에 심취하여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옴. 속선전(續仙傳)에 “한상이 도술을 좋아하며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언젠가 흙을 모으고 화분을 뒤짚자 바로 꽃이 피면서 꽃잎 위에 ‘구름은 진 나라 고개를 가로질러 가는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남관에 눈보라치니 말이 가려 하지 않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이라는 시구가 나타나게 하였다. 한유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에 조주(潮州)로 좌천되어 가면서 중도에 눈보라를 만났는데, 이때 한상이 눈을 무릅쓰고 찾아 왔기에 그곳의 지명을 물어보니 바로 남관이었다.” 하였음.
♣ 한생탈득동귀지[韓生奪得東歸志]항우(項羽)가 함양(咸陽)을 불태우고 동으로 돌아가려 하니 한생(韓生)이 “관중(關中)은 사방이 막힌 지역으로 토지가 비옥하여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 하였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다. 《史記 卷七 項羽本紀》
♣ 한선[寒蟬]울지 못하는 매미로, 벙어리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일을 만나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한선자[韓宣子]한 선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대부 한기(韓起)를 말함. 선(宣)은 그의 시호. 각궁(角弓)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주(周) 나라 임금이 친족(親族)을 멀리하고 소인들을 가까이 하므로, 친족들이 임금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이다. 한 선자가 일찍이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 대부 계 무자(季武子)와 연향(宴享)하는 자리에서 서로 수호(修好)를 잘하자는 뜻에서 시경(詩經) 각궁(角弓)의 “내 형제 내 겨레만은 서로 멀리하지 마시오.[兄弟婚姻 無胥遠矣]"라는 구절을 읊었던 고사이다. 《左傳 昭公 二年》
♣ 한섬노토[寒蟾露兎]예(羿)의 처(妻)인 항아(姮娥)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나 두꺼비가 되었다는 전설과 옥토끼가 달 속에서 약초를 찧느라 절구질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天文志上ㆍ楚辭 天問 注》
♣ 한소이두[韓蘇李杜]한유(韓愈)ㆍ소식(蘇軾)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를 말한다. 한유는 당 헌종(唐憲宗) 때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쫓겨났으며, 소식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 항주 통판(杭州通判)으로 쫓겨나고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하옥되는가 하면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방으로 좌천되었으며, 이백은 영왕 린(永王璘)의 막좌(幕佐)로 있다가 도망친 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평정되자 사죄(死罪)에 걸려들었으나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야랑(夜郞)에 유배되었으며, 두보는 당 현종(唐玄宗) 때 사건에 연루되어 화주(華州)로 쫓겨났다가 검남(劍南)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 한속[寒粟]한기(寒氣)와 같은 뜻이다.
♣ 한수[寒羞]한수는 성찬(盛饌)을 먹은 다음 먹는 과일 따위를 말하는데, 시원한 음식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 한수[韓壽]한수는 진(晉) 나라 도양(堵陽) 사람으로 상당한 미모(美貌)를 갖추었고 사공(司公) 가충(賈充)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자 가충의 딸이 한수를 좋아하여, 가충이 천자(天子)에게 하사(下賜)받은, 서역(西域)에서 보내온 기향(奇香)을 훔쳐다 한수에게 주었는데, 이 기향이 한번 묻으면 그 향기가 한 달이 지속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四十 賈充傳》
♣ 한수[漢水]한양
♣ 한수명향[韓壽名香]한수(韓壽)는 진(晉) 나라 도장(道場) 사람으로 미모가 있었는데, 사공(司空) 가충(賈充)의 아전이 되었다. 충의 딸 오(午)가 수를 보고 좋아하여 저녁에 수를 불러 들여 기향(奇香)을 주었다. 이 향은 서월(西越)에서 조공한 것으로 사람이 한 번 품으면 한 달이 지나도 향기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황제가 충에게만 준 것을 그 딸이 훔쳐서 수에게 주었다. 충이 이 일을 알고 수를 사위로 삼았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四十》
♣ 한습[寒拾]당(唐) 나라 고승(高僧)인 한산(寒山)ㆍ습득(拾得)이다.
♣ 한승상[漢丞相]조조(曹操)를 말한 것.
♣ 한식[寒食]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 이 날은 불을 금하고 찬 밥을 먹는다. 민간에서는 조상의 묘에 성묘를 한다.
♣ 한식상묘[寒食上墓]한식날의 성묘.
♣ 한신[韓信]한신은 한(漢)의 명장으로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다음 그 공로로 초왕(楚王)에 봉해졌으나 뒤에 회음후(淮陰侯)로 강봉되었다. 국사는 온 나라가 추앙하는 선비란 뜻인데, 소하(蕭何)는 일찍이 한신을 칭찬하여 둘도 없는 국사라 하였다. 《史記 淮陰侯傳》
♣ 한신내배수[韓信乃背水]배수진은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다. 한 나라 때 한신이 조군(趙軍)과 싸울 적에 군사 1만 명으로 배수진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까닭을 한신에게 묻자, 한신은, “병법에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다음에야 살 길이 생기고, 망할 곳에 놓아둔 다음에야 살아날 길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史記 卷九十二 淮陰侯列傳》
♣ 한신도앵[韓信渡甖]한 고조(漢高祖) 때, 위왕(魏王)이 배반하자 한신이 위 나라를 치기 위해 임진(臨晉)을 건널 적에 목앵부(木罌艀)에다 군사들을 태워 인솔하고 건너가서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위 나라를 평정했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二 淮 陰侯列傳》
♣ 한실의관[漢室衣冠]왕망(王莽)이 한 나라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 나라 말에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이 낙양(洛陽)에 장차 도읍을 정하려 하면서 유수(劉秀)를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임명하여 미리 그곳에 가서 궁부(宮府)를 정돈하도록 하였다. 유수는 자기가 거느린 관속들에게 옛 한 나라의 의관을 입히는 등 과거의 제도를 복구하였는데 그것을 본 늙은 관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한 나라 관원의 풍모를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였다. 《後漢書 卷一 上 光武帝紀》
♣ 한아[寒鴉]반포(反哺)의 의리를 아는 까마귀로, 어미를 사모하는 효자를 비유한 말이다.
♣ 한안[汗顔]부끄럽거나 두려운 일을 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는 자.
♣ 한안국[韓安國]한(漢)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중대부(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이, 무슨 일로 죄를 받게 되었을 때 몽현(蒙縣)의 일개 옥리(獄吏)인 전갑(田甲)이 안국에게 욕을 하였다. 이때 안국은 그에게 말하기를, “죽은 재라고 해서 다시 불붙지 말라는 법이 있다더냐?" 하자 옥리가 대답하기를, “불이 붙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리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안국은 다시 양(梁)의 내사(內史)가 되자 당시 옥리였던 전갑은 그를 찾아가 육단사죄(肉袒謝罪)를 하였다. 《史記 卷一百八》
♣ 한양도[漢兩都]전한(前漢)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니 서도(西都)요, 후한(後漢)은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니 동도(東都)이다.
♣ 한양역력앵무주[漢陽歷歷鸚鵡洲]당나라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에, “청천역력한양수, 방초처처앵무주(晴川歷歷漢陽水芳草萋萋鸚鵡洲)”라는 글귀가 있다.
♣ 한언환[韓嫣丸]금으로 만든 탄환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인 한언이 무제로부터 여러 차례 하사품을 받아 몹시 부유하였다. 항상 금으로 탄환을 만들어 새를 잡으러 다녔는데 새를 잡으러 갈 적마다 탄환을 10여 개씩 잃어버렸으므로 장안의 아이들이 그 탄환을 줍기 위해 한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4》
♣ 한여[翰如]이시우(李是釪)의 자.
♣ 한영[閒詠]한가롭게 읊조림.
♣ 한예용라[漢隷龍拏]한예는 한 나라 때에 성행했던 예서체(隷書體)를 말하고, 용이 끈다는 것은 곧 자획(字劃)의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 한옥[寒玉]한옥은 대나무를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 한옹[韓翁]한옹은 송(宋) 나라 때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진 부필(富弼)을 말한다.
♣ 한와[漢瓦]한와는 한 나라 시대 궁전(宮殿)에 사용했던 기왓장에 새긴 문자(文字)를 가리킨 말이다.
♣ 한와당[漢瓦當]’瓦當’의 ‘當’은 ‘鏜’인데 토기(土器)의 와(鍋)임. 한(漢) 나라 시대의 것을 말함.
♣ 한우[寒竽]한우는 오래도록 불지 않고 버려 둔 피리를 이르는데, 소식(蘇軾)의 화자유시(和子由詩)에 “나는 이제 학문을 폐한 게 한우와 같아서 오래도록 불지 않아 막히어 소리가 안 나려 하네[我今廢學如寒竽 久不吹之澁欲無]”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
♣ 한우충동[汗牛充棟]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 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한원[翰院]한림원(翰林院)과 예문관(禮文館)의 겸칭. 한원(翰苑).
♣ 한원[翰苑]한림원(翰林院)의 약칭으로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임.
♣ 한원[漢源]한원은 은하수의 근원이다. 중국의 전설에 은하수는 바다와 서로 통해 있다고 전하는데,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해마다 8월이 되면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한번은 뗏목을 타고 은하에 당도하여 견우와 직녀를 보았다 한다. 흔히 하늘에 오르는 것에 비유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로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나가면서 한수의 근원을 찾아보라는 무제의 명에 따라 뗏목을 타고 근원을 찾아가 견우와 직녀를 보고 돌아왔다는 말이 있다. 《博物志 卷三》
♣ 한원지[韓元之]원지는 한인급(韓仁及)의 자(字)이다.
♣ 한월[漢月]중국의 중원(中原) 사람이 변방 외국에 나가 고국을 그릴 때 쓰는 말로 고국의 달이란 뜻이다.
♣ 한월사편[韓鉞謝篇]한월과 사편(謝篇)은 한신(韓信)의 도끼와 사영운(謝靈運)의 시편을 말하는데, 옛날 장군들은 도끼를 잡고 출정(出征)하였다.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장으로 항우(項羽)를 이기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사영운은 진(晉)의 문장가로 시문이 뛰어났으므로 곧 문무 겸전(文武兼全)하여 문반(文班)인 서반(西班)과 무반(武班)인 동반(東班)의 직책을 겸직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 한위공[韓魏公]한 위공(韓魏公)은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현상(賢相) 한기(韓琦). 자는 치규(稚圭).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음. 한기가 일찍이 정자를 짓고 압구정이라 이름했었다.
♣ 한유[漢劉]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왕망(王莽)의 찬탈(簒奪)로 망한 한(漢)을 그가 중흥시켰다.
♣ 한유[韓柳]한유는 문장가인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키는데 일대 문호(文豪)로 유명했다.
♣ 한유[韓愈]당(唐) 나라의 유학가(儒學家)이며 문장가.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창하였으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벼슬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일찍이 사설(師說)을 지어 사도(師道)를 말하였다.
♣ 한유송원화[韓愈頌元和]원화는 당(唐)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반적(叛賊)들을 토평(討平)하여 나라를 중흥시키자, 한유(韓愈)가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를 지었다.
♣ 한음[漢陰]송(宋) 나라 강하(江夏) 사람인 두감(杜淦)의 호임. 자칭 한음노인(漢陰老人)이라고 칭하고 사수(泗水) 부근에 은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15년 만에 부자가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수모를 견디고 벼슬하는 자들은 대부분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은 수모를 견디고 나는 노력을 한다.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그에 비하면 내가 낫지 않은가.” 하였다.
♣ 한음[漢陰]한수의 남쪽
♣ 한음기심[漢陰機心]한음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자공(子貢)이 기심(機心)에 대해 비웃음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자공이 남쪽으로 초(楚) 나라를 유람하고 진(晉) 나라로 돌아오다가 한음(漢陰)에서 어떤 노인이 마침 밭을 관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땅굴을 파고 우물로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들고 나와서 물을 주고 있었는데, 끙끙거리면서 힘을 무척 많이 들였는데도 효과는 적었다. …… 밭을 관리하던 노인이 성난 듯 얼굴빛을 바꾸고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우리 선생에게 들은 바로는,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쓰는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機心]이 있게 되고, 기심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순백(純白)함이 갖추어지지 않게 되고, 순백함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하게 된다.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한 사람에게는 도가 깃들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알지 못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자공이 부끄러워서 몸을 구부린 채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 한음무기심[漢陰無機心]한음은 중국의 지명. 이 땅에 살던 한 노인이, 온 세상 사람들의 간사한 지혜와 교묘한 기계가 날마다 그 본심과 순박한 풍기를 해친다 하며, 기계(機械)를 만들어 쓰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일부러 단지로 우물물을 퍼서 채소에 주었다. 기심(機心)은 간교한 마음. 《莊子 天地》
♣ 한음병[漢陰甁]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한음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물동이를 안고 우물로 들어가 물을 퍼 가지고 나와서 채소밭에 물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한의[漢儀]신국(新國)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빼앗았다가, 뒤에 광복(光復)하려는 군사들이 일어나 유수(劉秀)가 보낸 관리들이 한관(漢官)의 의식(儀式)을 다시 회복하니, 백성들이 감탄하여, “오늘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줄을 몰랐다.” 하였다.
♣ 한의[寒衣]추울 때 입는 옷.
♣ 한이부[韓吏部]한 이부는 곧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를 이른다. 그의 석고가에, “對此涕淚雙滂沱”라 하였음.
♣ 한일참광정[寒日慘光晶]이백(李白)의 시에 “길게 호읍(號泣)하며 엄친과 이별하노라니, 일월도 참담하여 빛을 잃은 듯.[長號別嚴親 日月慘光晶]”이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1 古風》
♣ 한자[韓子]전국 시대 한비자(韓非子). 또는 그가 지은 책 한비자(韓非子)를 말하기도 함.
♣ 한자개진간힐자[韓子豈眞奸黠者]한유(韓愈)의 “관직도 없는 우리 동야, 너무도 쇠한 백발의 몸. 조금 교활한 나 한자, 장송에 붙은 덩굴인양 스스로 부끄러워.[東野不得官 白首誇龍鍾 韓子稍姦黠 自慙靑蒿倚長松]”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韓昌藜集 卷5 醉留東野》
♣ 한자애련[韓子愛聯]한자는 당 나라의 한유(韓愈)이며, 그가 석정연구시(石鼎聯句詩)를 짓고 서문(序文)을 붙인 것을 말한다. 《韓昌黎集 補遺》
♣ 한자파리완[韓子玻瓈盌]한유(韓愈)의 시에 “두세 명 도사가 그 사이에 자리잡고, 파리 옥배(玉盃)에 영액을 자꾸 따라 마시누나.[二三道士席其間 靈液屢進玻瓈盌]”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4 遊靑龍寺 贈崔大補闕》
♣ 한적[漢賊]중국과 중국을 거역하는 역적을 묶은 말로,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漢賊不兩立]”는 대목에서 나온다.
♣ 한전[漢傳]한전은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을 가리킨다.
♣ 한전영잠련[漢殿領箴連]한나라 시대에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이라는 찬송하는 송을 왕포(王褒)라는 사람이 지은 일이 있다.
♣ 한절[漢節]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갈 때 가지고 갔던 절월(節鉞)을 말한다. 소무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은 채 온갖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소제(昭帝) 때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한절[漢節]한(漢) 나라의 천자가 준 부절(符節)로, 사신을 가리킨다. 한 나라 때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굽히지 않은 채 19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왔는데, 이로 인해 사신이 가지고 가는 부절을 한절이라고 하게 되었다.
♣ 한절치월[漢節馳越]남월(南越)의 왕 조타(趙佗)가 한 나라 문제(文帝) 때 스스로 왕이 되어 무제(武帝)라고 칭하였는데, 문제가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어 타이르자 드디어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신(臣)이라 칭하였다. 《史記 卷97 酈生陸賈列傳》
♣ 한정부[閒情賦]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있었음을 뜻함. 한정부는 진(晉)의 은사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글임.
♣ 한정영동상[漢廷迎董相]한정은 한(漢) 나라 조정을 말하고, 동상(董相)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한 나라 무제가 즉위하여서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는데, 동중서는 현량(賢良)으로 뽑혔다.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요지로 대책을 올리면서 육예(六藝)의 과(科)와 공자(孔子)의 학술을 배우지 않은 자는 등용하지 말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동중서를 강도상으로 삼았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 한제[漢帝]서한(西漢) 12제(帝) 212년과 동한(東漢) 12제 196년, 도합 24제 408년. 역조(歷朝) 중 국조(國祚)가 가장 길었다.
♣ 한제음풍[漢帝吟風]한 무제(漢武帝)가 분수(汾水)에 배를 띄우고 흔연히 중류(中流)에서 ‘추풍사(秋風辭)’를 지어서 늙음을 탄식하였다.
♣ 한제폐북관[漢帝閉北關]한제는 한 나라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간 뒤에 무제가 흉노와의 관계를 단절한 일을 말한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한제횡분악[漢帝橫汾樂]한 나라 무제(武帝)가 늘그막에 산서성(山西省)의 분(汾)하수에서 뱃놀이하면서 추풍가(秋風歌)를 지어서 노래하였다.
♣ 한주가곤이[漢主嫁昆夷]여기서 말한 곤이(昆夷)는 흉노(匈奴) 묵특(冒頓)을 가리키는데 한(漢) 나라가 흉노에게 자주 침공을 당하자 유경(劉敬)이 적장공주(適長公主)를 그들에게 시집보내어 화친을 하자고 제의한 것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九 劉敬叔孫通列傳》
♣ 한주상림[漢主上林]한(漢) 나라의 어원(御苑)인데, 그 속에 동물원도 있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천자(天子)의 사냥하는 광경의 성대한 것을 말하였다.
♣ 한죽[汗竹]한죽(汗竹)은 사책(史冊)을 가리킨다.
♣ 한중[漢中]섬서성(陝西省)의 서남쪽을 흐르는 한강(漢江; 양자강의 큰 지류) 북안의 험한 땅으로서 진(秦)나라를 멸한 유방이 항우로부터 분봉(分封)받아 한왕(漢王)을 일컫던 곳.
♣ 한중[韓衆]제인(齊人)으로 단약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함.
♣ 한중[漢中]한중은 익주(益州)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 한중진미[閒中眞味]한가한 가운데 깃드는 참다운 맛.
♣ 한진[韓鎭]한진은 한(韓) 나라 진산(鎭山)으로 양산(梁山)을 말함. 주 선왕(周宣王) 때 제후인 한후(韓侯)가 재능이 출중하여 아래에서 주위의 소수 부족을 단결시키고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였다고 함. 시경(詩經) 大雅 韓奕에 “하늘 높이 솟은 양산에 하우(夏禹)께서 다스렸는데 한후가 밝은 덕 지녀 천자는 글에게 사명을 내렸네.[奕奕梁山 維禹甸之 有倬其道 韓侯受命]" 하였음. 혁(奕)과 혁(赫)자는 상통함.
♣ 한척삼[漢尺三]우리나라의 법령을 말한다. 한 나라 때 석 자 되는 죽간(竹簡)에 법령을 기록하였다.
♣ 한청[汗靑]사책(史策)을 가리킨다. 옛날 종이가 없어 대쪽에 글을 쓸 때, 먼저 대를 불에 지져 대의 기름과 파란 빛을 빼어 글씨도 쓰기 좋고 또 오래가도록 하였다. 이것을 죽간(竹簡) 또는 한청이라 하였는데 후세에는 사책의 별명으로 통용되었다.
♣ 한칠국[漢七國]한 경제(漢景帝) 때에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곱 나라. 즉 오(吳)ㆍ초(楚)ㆍ조(趙)ㆍ교서(膠西)ㆍ교동(膠東)ㆍ치천(菑川)ㆍ제남(濟南).
♣ 한침진경[漢寢震驚]후한서(後漢書) 권7 효환제기(孝桓帝紀)에 “6월 을묘일에 헌릉(憲陵)의 침옥(寢屋)에 천둥이 쳤다.”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이때 양 태후(梁太后)가 섭정하고 있었는데 그 오빠 양기(梁冀)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면서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억울하게 죽이자 천하가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하였다.
♣ 한팽[韓彭]한(漢) 나라 고조(高祖) 때의 장수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가리킨다.
♣ 한팽견지소유집[韓彭見躓蕭猶縶]한 고조(漢高祖)는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공신(功臣)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반역죄로 몰아서 죽이고 승상(丞相) 소하(蕭何)도 조그만 혐의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 한팽역자취[韓彭亦自取]한신(韓信)과 팽월(彭越).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여 장량(張良)ㆍ소하(蕭何)와 함께 삼걸(三傑)로 칭해졌는데, 뒤에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여후의 속임수에 떨어져 목이 잘렸다. 《史記 卷93》 팽월은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 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한신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효수(梟首)되었다. 《史記 卷90》
♣ 한팽저해[韓彭菹醢]한신(韓信)과 팽월(彭越), 두 사람이 다 한 고조(漢高祖) 부하의 명장(名將)으로 수훈(殊勳)을 세웠으나 그 뒤에 의심을 사 잡혀 죽었다.
♣ 한평동살안[閒評僮殺雁]장자(莊子)가 어느 집에를 갔었는데, 그 집 동자가 “기러기가 한 마리는 잘 울고 한 마리는 울 줄을 모르니 죽입시다.” 하니, 그 집 주인이 “울 줄 모르는 놈을 죽여라.” 하였다. 장자의 제자는 장자에게 “주인의 집 기러기는 재능이 없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데, 선생님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장자는 “나는 재주와 재주 없는 그 중간을 택하겠다.” 하였다.
♣ 한풍[寒風]한풍은 말을 잘 알아본다는 상고 때 전설상의 인물이다.
♣ 한풍루[寒風樓]무주(茂朱)객사(客舍) 앞에 있던 누다.
♣ 한풍자[寒風子]옛날 말 관상을 잘 보는 사람. 《呂覽 觀表》
♣ 한한[汗汗]물의 광대한 모양
♣ 한한[暵暵]햇빛이 물건을 말리는 모양, 더운 모양
♣ 한항금속[寒缸金粟]등잔의 기름이 다 떨어져서 심지 끝이 타들어 가며 맺히는 불똥을 말한다. 한항은 기름이 없는 등잔으로, 한등(寒燈)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등잔 기름이 다하면서 불꽃도 짤막, 새벽 물시계 소리 역시 길게 드문드문.[焰短寒缸盡 聲長曉漏遲]”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5 不睡》
♣ 한해[瀚海]몽고의 고원(高原) 동북쪽에 있는 북해(北海)를 뜻하기도 하고 사막의 별칭이기도 하다.
♣ 한해[瀚海]북쪽에 있다고 하는 큰 바다를 말한다. 이설(異說)이 분분한데, 지금의 호륜호(呼倫湖)를 지칭하는 것인 듯하다.
♣ 한해[翰海]한해는 몽고의 항원산(杭爰山)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 한해소조[韓海蘇潮]퇴지(退之) 바다 동파(東坡) 조수. 이기경(李耆卿)의 문장정의(文章精義)에 이르기를 “韓如海 柳如泉 歐如瀾 蘇如潮"라 하였음.
♣ 한헌제[漢獻帝]헌제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로 조조에게 계속 핍박을 당하다가 그 아들 조비(曺丕)에게 제위(帝位)를 넘겨주고 말았다. 《後漢書 卷九》
♣ 한혈기[汗血驥]천리마의 별칭.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장군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정복하고 한혈마를 얻어 왔다.” 하였다.
♣ 한혈마[汗血馬]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는 대원(大宛)의 준마(駿馬)이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이사 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대원왕(大宛王)의 머리를 베고 한혈마를 잡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 한형주[韓荊州]한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 한조종(韓朝宗)을 말한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번 한 형주를 알기 원한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古文眞寶 後集與韓荊州書》
♣ 한화야초[閑花野草]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절로 자라는 야생 화초를 말한다.
♣ 한화유가이[漢貨猶可餌]명(明) 나라의 심유경(沈惟敬) 등이 기미책(羈縻策)을 써서 왜적과 화의(和議)를 맺은 뒤 그들의 군사를 본국으로 철수시킨 것을 말한다.
♣ 한화일종명[寒花一種名]한화(寒花)는 추운 계절에 피는 꽃으로, 보통 국화를 가리킨다. 야국(野菊)도 국화 종류의 하나라는 말이다.
♣ 한황[漢皇]중국 황제의 범칭(汎稱)으로, 중국에서 중세에는 한나라가 대표적인 왕조(王朝)이다.
♣ 한후[豻侯]들개 가죽으로 장식한 과녁.
♣ 할[喝]할은 큰 소리로 고함치는 것을 말하는데, 선종(禪宗)에서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쓰는 일종의 선기(禪機)이다.
♣ 할계[割雞]할계는 우도할계(牛刀割雞)의 준말로, 큰 재능이 아주 작은 데에 쓰임을 비유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재(武城宰)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사를 펴자, 공자가 그 곳을 지나다가 자유에게 장난삼아 이르기를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雞焉用牛刀]”하는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지방의 수령을 한다는 뜻이다.
♣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다. 작은 일 처리에 큰 인물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비유.
♣ 할계우도[割鷄牛刀]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그 곳에 가서 현가(絃歌)의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닭 잡는 데에 어찌 소잡는 칼을 쓰리오[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陽貨》
♣ 할관[鶡冠]할관은 할새의 깃으로 꾸민 관을 이르는데, 옛날에 특히 은사(隱士)가 이 관을 썼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할관체[鶡冠體]주(周) 나라 때 초(楚)의 은사(隱士)인 할관자(鶡冠子)가 3권 19편으로 나누어 저술하였다는 할관자(鶡冠子)의 판본의 서체(書體)를 말한다.
♣ 할마[瞎馬]할마는 애꾸눈의 말을 이르는데, 맹인(盲人)이 애꾸눈의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못 가에 간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대단히 위험함을 비유한 말이다. 《世說新語 排調》
♣ 할목무전[割目無全]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솜씨 좋은 백정이 자신의 기예를 소개하면서 “처음에 소를 잡을 때에는 보이는 것이 온통 온전한 소뿐이더니, 삼 년쯤 지난 뒤에는 소의 각 부위(部位)만이 눈에 들어올 뿐 온전한 소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를 않았다.[未嘗見全牛也]”고 말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 할생[割牲]할생은 희생을 잡아 요리하는 것을 이른다.
♣ 함계설향[含雞舌香]상서랑(尙書郞)이 되는 것을 비유한 말. 계설향은 향명(香名)인데, 한(漢) 나라 때에 상서랑들이 계설향을 입에 머금고 임금 앞에 엎드려 일을 아뢴 데서 온 말이다
♣ 함곡관[函谷關]전국 시대(戰國時代) 진(秦) 나라가 설치한 진(秦)에서 산동 육국(山東六國)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으로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영보현(靈寶縣) 서남쪽에 있는데, 효함(崤函)이라고도 한다.
♣ 함곡서자기[函谷西紫氣]주대(周代)에 함곡관의 영(令) 윤희(尹喜)가 누(樓)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다가,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 壽星)의 자기(紫氣)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앞으로 성인이 이곳을 경과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노자(老子)를 만나서 도덕경(道德經)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關令二外傳》
♣ 함공[緘供]함답공사(緘答供辭). 함서(緘書)로 답하여 공술(供述)한 사연. 관원의 가벼운 비위에 대하여 사헌부(司憲府)가 함서로 추문(推問)하는 것을 함문(緘問)이라 하고, 함문당한 자가 함서로 답하는 것을 함답이라 하며, 함답에 진술한 내용을 함공이라 한다.
♣ 함관[函關]함곡관을 말하는데, 산동(山東)에서 진(秦)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이다.
♣ 함관자기[函關紫氣]노자(老子)가 서쪽으로 함곡관을 나갈 적에, 앞서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천문(天文)을 관측한 결과, 붉은 서기(瑞氣)가 관문 위로 떠 있음을 보고 노자가 그곳을 통과할 것을 미리 알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 六十三》
♣ 함관증해백마계[函關曾解白馬繫]진(秦) 나라 왕 자영(子嬰)을 말함. 유방(劉邦)이 패공(沛公) 시절에 다른 어느 제후들보다 먼저 진 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패상(覇上)에 이르자 진왕 자영이 흰 말 흰 수레를 타고 항복해왔는데, 이때 패공은 제장들 권유를 뿌리치고 자영의 결박을 풀어 주었음. 《史記 高祖本紀》
♣ 함구묘중인[緘口廟中人]주(周) 나라 후직(后稷)의 사당 앞에 금인(金人)이 있는데 그 입을 세 번 봉하고 등에다 “옛날에 말을 조심한 사람이다.”고 명(銘)을 한 고사에서 인용된 말이다. 《孔子家語 觀周 第十一》
♣ 함구무언[緘口無言]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이 없음
♣ 함궐[銜橛]말이 성을 내어 재갈이 벗겨지고 굴대가 부러져 수레가 전복되는 변고를 말한다.
♣ 함궐변[銜橛變]말이 달리다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재갈[銜橛]의 변이라 한다.
♣ 함금[緘金]공자(孔子)가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니 금인(金人)이 있는데 그 입을 세 겹으로 봉했으며, 등 뒤에는 “옛날에 말을 조심하던 사람이다.”라고 새겨 있었다고 한다.
♣ 함노안[銜蘆雁]사람이 쳐 놓은 그물망이나 주살을 피하기 위하여 기러기가 본능적으로 입에다 갈대를 물고 다닌다는 고사가 있다. 《淮南子 修務訓》
♣ 함도천묘[含桃薦廟]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의하면, 중하(仲夏)의 달에는 앵도(櫻桃)를 사당에 천신(薦新)한다고 한다.
♣ 함도하시지[銜圖何時至]인군(仁君)의 출현을 고대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봉황은 원래 태평성대에나 나타나는 상서로운 새인데, 옛날 황제(皇帝)가 낙수(雒水) 위에서 노닐 때 봉황이 도서를 입에 물고 내려오자 황제가 절을 하고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春秋合誠圖》
♣ 함랑[咸郞]함씨(咸氏) 낭자(郞子).
♣ 함련[頷聯]율시(律詩)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를 말함.
♣ 함로[銜蘆]입에 긴 갈대를 문 기러기를 말한다. 기러기는 그물이나 주살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한다고 한다. 시자(尸子) 권하(卷下)에 “기러기는 갈대를 물어 그물을 미리 피하고, 소는 진을 쳐서 호랑이를 물리친다.[雁銜蘆而捍網 牛結陣以却虎]”하였다.
♣ 함로이자방[銜蘆以自防]철저하게 자기 방어를 한다는 뜻으로 유향(劉向) 안부(雁賦)에 “순풍을 타고 날아 기력(氣力)을 돕고, 갈대를 물고 주살을 피한다.” 하였으며, 문선(文選) 좌사(左思) 촉도부(蜀都賦)의 주(註)에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서 주살을 방어하여 자신의 날개를 상하지 않게 한다.” 하였다.
♣ 함망[銜芒]음력 8월 중에 게의 뱃속에 벼의 까끄라기와 같은 것이 생기는데, 동쪽으로 가서 이를 해신(海神)에게 바친다고 하며, 이를 바치기 이전에는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淵鑑類函 卷444 蟹》
♣ 함망해[銜芒蟹]음력 8월 중에 게의 뱃속에 벼의 까끄라기와 같은 것이 생기는데, 동쪽으로 가서 이를 해신(海神)에게 바친다고 하며, 이를 바치기 이전에는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淵鑑類函 卷444 蟹》
♣ 함매[銜枚]급하게 행군(行軍)하여 남의 나라를 습격할 때에 소리나지 않게 말[馬]과 군사에게 입에 재갈을 물린다.
♣ 함매씨[銜枚氏]함매씨는 주(周) 나라 때 떠드는 것을 금지시키는 일을 관장했던 관직명이다. 《周禮 秋官》
♣ 함방원[含芳院]연산군이 의성위(宜城尉)의 집을 치우고 계평악(繼平樂)을 거처케 한 뒤 붙인 이름이다.
♣ 함벽[銜璧]항복하는 예로서,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여 손을 뒤로 결박하였으므로, 부득이 상대에게 바칠 예물인 옥벽을 입에 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僖公 六年》
♣ 함부림[咸傅霖]여말 선초의 문신.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定平). 고려 말에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이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들었으며, 이후에 또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高麗史》
♣ 함분축원[含憤蓄怨]분한 마음(분노)을 품고 원한(원망)을 쌓음.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가짐
♣ 함사사영[含沙射影]모래를 머금어 그림자를 쏘다란 말로 암암리에 사람을 해친다는 뜻.
♣ 함삭[銜索]아가미에 새끼줄이 꿰어진 생선꾸러미란 뜻으로, 몸이 구속되어 있어 부모를 효도로써 봉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 함삼[函三]함삼은 태극(太極)의 원기(元氣)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아 천(天)ㆍ지(地)ㆍ인(人)이 하나로 혼합되어 있는 혼돈(混沌) 상태를 말한다. 《漢書 律曆志 注》
♣ 함상서[咸尙書]함상서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 함유일(咸有一)을 가리킨다.
♣ 함서[緘書]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악부 상(樂府上)에 “손이 먼 곳에서 와서 나에게 한 쌍의 잉어를 주길래, 아이를 불러 삶게 했더니 뱃속에 편지 한 폭이 들어 있었네.” 하였다.
♣ 함소[咸韶]요(堯)의 악(樂)인 함지(咸池)와 순(舜)의 악인 소무(韶舞).
♣ 함소리[含消梨]한 무제(漢武帝)의 동산에서 생산되었다는 배의 일종으로, 닷되들이 항아리만큼 커서 땅에 떨어지면 깨지기 때문에 주머니를 밑에 받치고 땄다고 한다. 곧 질좋은 배를 말한다.
♣ 함양[咸陽]진(秦) 나라 서울이었는데 항우(項羽)가 불을 놓아서 모두 태워버렸다.
♣ 함영[含景]초목(草木)의 꽃.
♣ 함영[咸英]황제(黃帝)가 만든 음악인 함지(咸池)와 제곡(帝嚳)이 만든 음악인 오영(五英)을 합칭한 말이다.
♣ 함우주주[銜羽周周]주주(周周)는 새의 이름인데, 이 새는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하수(河水)에서 물을 마시려면 반드시 넘어지므로, 언제나 깃을 입에 물고 물을 마신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함유일[咸有一]함유일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는데, 그는 일찍이 의종(毅宗) 때 내시(內侍)에 들어가 교로도감(橋路都監)을 관장하면서 무당들을 교외로 추방하고, 음사(淫祠)를 불지르는 등 미신 타파에 힘썼다.
♣ 함이[含飴]후한(後漢)의 마 황후(馬皇后)가 만년에 이르기를 “나는 다만 엿 머금고 손자들이나 데리고 놀 뿐, 정사(政事)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엿을 머금는다는 것은 곧 치아가 없기 때문이다. 《後漢書 馬皇后紀》
♣ 함이[含飴]후한(後漢)의 마황후(馬皇后)가, “나는 엿이나 먹으면서 손자나 데리고 놀겠다. 더 이상 정사에는 간여하고 싶지 않다.” 한 데서 나온 말로, 늙은이의 만년의 안락한 생활을 뜻한다. 엿을 머금는다는 것은 곧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 함인시인[函人矢人]함인은 갑옷과 투구를 만드는 사람이고, 시인은 화살을 만드는 사람인데,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시인이 어찌 함인보다 인하지 않으랴마는, 시인은 오직 사람을 상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함인은 오직 사람을 상할까 걱정한다[矢人豈不仁於函人哉 矢人唯恐不傷人 函人唯恐傷人].”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 함장[函丈]스승에 대한 경칭으로 스승이 제자 가르치는 자리를 말한다. 함(函)은 용납한다는 뜻이니 스승과 제자의 앉은자리의 거리가 한 발쯤 된다는 말이다.
♣ 함장[含章]주역(周易) 곤괘(坤卦)에 함장(含章)이란 말이 있는데, 아름다움[章]을 포함[含]한다는 뜻이다.
♣ 함장석[函丈席]지팡이를 용납하는 자리로, 후에 스승을 함장이라 일컬었으니 강석(講席)이라는 뜻과 같다.
♣ 함장전[含章殿]궁궐(宮闕)의 내전(內殿)을 말한다. 송 무제(宋武帝)의 딸 수양공주(壽陽公主)가 함장전 처마밑에 누워있는데 매화(梅花)가 공주의 이마 위에 떨어져 오출화(五出花)를 이루었다 한다.
♣ 함제[含睇]정을 품고 곁눈질하다.
♣ 함지[咸池]도당씨의 악가로서, 그 뜻은 대체로 요(堯) 임금의 덕이 지극히 커서 온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음을 칭송한 것이다
♣ 함지[咸池]전설 속에 나오는 해가 지는 곳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함지(咸池)에서 목욕한다.” 하였다.
♣ 함지[咸池]황제(黃帝)의 악(樂) 이름임. 주례(周禮)에, “함지(咸池)의 춤으로써 지신(地神)을 제사한다.” 하였음.
♣ 함지곡[咸池曲]요(堯) 임금의 악곡 이름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상대방의 시가를 높여 이른 말이다.
♣ 함지구소[咸池九韶]각각 중국 요(堯)와 순(舜)의 음악을 가리킨다.
♣ 함지욕일[咸池浴日]함지는 동방에 있다는 큰 못의 이름임. 회남자(淮南子) 천문(天文)의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함지에서 목욕한다.”에서 나온 것이다.
♣ 함지출완유[咸池出阮隃]함지(咸池)는 황제(黃帝)의 풍악 이름인데, 황제가 영륜(伶倫)을 시켜 음률을 만들라고 하자 영륜이 대하(大夏)의 서쪽에서 완유산(阮隃山)북쪽으로 가 해계(嶰溪)골짝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십이율(十二律)을 만들었다고 함. 《呂氏春秋 古樂》
♣ 함척[含慼]슬픔을 머금다.
♣ 함체[陷滯]뜻을 펴지 못하고 소침하다.
♣ 함충[銜蟲]벌레를 물다.
♣ 함통[咸通]당나라 의종(懿宗)의 연호.
♣ 함포[含哺]함포고복(含哺鼓腹)의 준말로, 배불리 먹고 즐겁게 노는 것을 말한다.
♣ 함포고복[含哺鼓腹]실컷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림. 백성이 배불리 먹고 즐겁게 지내는 평화로운 모습
♣ 함함[嗛嗛]원한을 품은 채 참고 견디는 모양
♣ 함함[顑頷]굶주려 얼굴이 누렇게 뜬 모양.
♣ 함함[含含]보리가 잘된 모양
♣ 함함[檻檻]수레 굴러가는 소리
♣ 함함[唅唅]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양
♣ 함향[含香]대언(代言)의 아칭(雅稱).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뜻한다. 옛날 상서랑(尙書郞)이 일을 아뢰거나 답변을 할 때 입 냄새를 없애려고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머금은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通典 職官 4》
♣ 함향기초[含香起草]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 좌우에서 시봉했다는 말이다. 옛날 임금에게 가까이 가서 아뢸 때는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물었다고 한다. 《通典 職官 4》
♣ 함향봉군[含香奉君]옛날에 상서랑(尙書郞)이 임금에게 주대(奏對)할 때에 구취(口臭)를 없애기 위하여 계설향(雞舌香)을 입에 머금었던 데서 온 말이다.
♣ 함향분궐하[函香分闕下]옛날 관찰사로 나가는 자에게 향 봉지를 나누어주었다.
♣ 함화록[㗸花鹿]양귀비가 꿈에 꽃을 문 사슴이 되어서 들에가 있었다고 한다.
♣ 함휼[銜恤]부모가 안 계시어 늘 마음속으로 근심 걱정하는 것. 시경(詩經) 소아(小雅) 요아(蓼莪)에 “나가면 근심 머금고 들어오면 의지할 곳 없다.[出則銜恤 入則靡至]"라 하였음.
♣ 함흥차사[咸興差使]함흥으로 보낸 사신(使臣). 심부름을 가서 아주 소식(消息)이 없거나 돌아오지 않음을 비유.
♣ 합[闔]오왕(吳王) 합려. 춘추시대의 오왕의 이름. 월왕 구천과 싸우다가 다쳐 죽음.
♣ 합고[合考]시관(試官)들이 모여 앉아, 뽑아 올린 시권(試卷)을 다시 고교(考較)하여 분류 해서 입격(入格)과 낙제를 결정하는 일.
♣ 합관요[篕寬饒]합관요는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인데 성격은 강직하였으나 인색하고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다가 남의 원망을 얻어 옥리(獄吏)에게 잡혀가서 죽었다. 그가 일찍이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에게 “나에게 술을 많이 권하지 마오. 나는 술에 미쳤으니 그대는 경계하라.” 했다. 《漢書 卷七十七》
♣ 합구초[合口椒]사헌부의 감찰(監察)을 이름. 당(唐) 나라 때에 법관의 직무를 산초(山椒)의 독(毒)이 있는 것에 비유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ㆍ이행사(裏行使)를 합구초(合口椒)라 하고, 감찰을 개구초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인데, 합구초는 가장 독이 많음을 뜻하고, 개구초는 독이 약간 덜함을 뜻한다. 《封氏聞見記 風憲》
♣ 합궁[合宮]문선(文選) 주(注)에 “황제(皇帝)의 명당(明堂)은 풀로 덮어서 이름을 합궁이라 하고 순(舜)의 명당은 풀로 덮어서 이름은 총장(總章)이라 하였다.” 하였음. 두보의 시에 “香飄合殿春風轉"의 구가 보임.
♣ 합근[合巹]바가지를 합한다는 것은 혼례 때에 신랑, 신부가 술잔을 세 번 교환하면서 끝잔은 한 개의 박을 둘로 나눈 잔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근례(巹禮)라고도 한다.
♣ 합덕[合德]한(漢) 나라 미녀(美女)의 이름이다. 조비연(趙飛燕)의 여동생으로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 살결이 매끄럽고 향 냄새가 났다고 한다. 《趙飛燕外傳》
♣ 합문[闔門]창합문, 하늘의 문. 《說文》
♣ 합벽연주차일신[合璧聯珠此一辰]최근 들어 많은 시편들을 서로 주고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 합사[溘死]갑자기 죽다
♣ 합승거[合乘車]벼슬할 만하다는 말. 대학(大學) 전십장(傳十章)에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마승(馬乘)을 기르는 이는 닭과 돼지를 기르지 않는다.’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 주에 “선비로서 처음 대부(大夫)가 된 자이다.” 하였음.
♣ 합영[合穎]옛날에 곡식 두 줄기의 이삭이 합해져서 큰 이삭이 된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
♣ 합옥[蓋屋]지붕을 덮음.
♣ 합잠[盍簪]뜻 맞는 이들이 서로들 달려와 회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예괘(豫卦)에 “朋盍簪"이 있는데, 주석에 “합은 합친다는 뜻이고 잠은 빠르다는 뜻으로 모든 벗이 동시에 빨리 온다는 것이다.” 하였음.
♣ 합종연횡[合縱連橫]세로로 합하고 가로로 연결함.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행해졌던 외교 방식으로 합종책과 연횡책. 합종은 강한 자에 대항하여 약한 자들이 협력하는 것을 가리키고, 연횡은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결탁하는 것을 말함. 합종연횡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최후로 남은 일곱 나라 가운데 진(秦)나라가 가장 강하였고 나머지는 6국은 약했는데, 서쪽의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남북으로 약한 6국[연(燕)⋅조(趙)⋅위(魏)⋅한(韓)⋅초(楚)⋅제(齊)]을 동맹시킨 소진(蘇秦)의 외교 전략을 합종이라 하고, 소진이 피살된 후 장의(張儀)가 이들 6국을 동서로 묶어 진나라를 섬기게 한 외교 전략을 연횡이라 한다.
♣ 합종책[合從策]전국시대,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6국 동맹책.
♣ 합좌[合坐]고려 때 도병마사(都兵馬使 ; 忠烈王 5년 이후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 )에서 문하(門下), 삼사(三司), 밀직(密直) 3부(部)가 모여서 국가의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던 제도.
♣ 합좌소[合坐所]재상(宰相)들이 모여서 정무(政務)를 보는 자리.
♣ 합패여건도[合佩呂虔刀]정승이 되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왕림전(王覽傳)에 “여건에게 패도(佩刀)가 있었는데, 장공(匠工)이 그 칼을 보고서 ‘반드시 삼공(三公)이 된 사람이라야 이런 칼을 찰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여건이 그 칼을 왕상(王祥)에게 주었다. 그후에 왕상이 죽을 무렵에 그 칼을 왕람(王覽)에게 주면서 ‘너의 후손들이 반드시 잘되어 이 칼을 차게 될 것이다.’ 했다.” 하였다.
♣ 합포[合浦]마산(馬山)의 옛 이름.
♣ 합포주[合浦珠]후한(後漢) 때 합포에서 구슬이 생산되었는데, 탐관오리가 많이 수령으로 오면서 잠시 구슬이 나오지 않다가, 맹상(孟嘗)이 태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정사를 행하자, 다시 구슬이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循吏 孟嘗傳》
♣ 합포주환[合浦珠還]피폐해졌던 고을이 수령의 선정으로 인해 원상태로 회복된 것을 뜻함. 합포는 광동(廣東) 해강현(海康縣)에 있던 한대(漢代)의 군(郡) 이름임. 해변에 위치하여 곡식은 생산되지 않고 바다에서 진주를 수확하였는데, 역대의 군수들이 탐욕을 많이 부려 진주를 닥치는 대로 걷어가 진주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가 맹상(孟嘗)이 태수로 부임하여 수탈을 중지시키고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자, 진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後漢書 卷七十六 孟嘗傳》
♣ 합포환주[合浦還珠]후한서(後漢書)에, “맹상이 합포 태수(合浦太守)가 되었는데, 그 고을은 곡물(穀物)이 생산되지 않고 바다에서 주보(珠寶)가 난다. 전자에 수령들이 이 구슬을 탐내어 사람을 시켜 마구 캐들이게 하니, 구슬이 점차 이웃 고을로 옮겨갔는데, 맹상이 도임하여서는 그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 함. 그래서 잃었던 물건이 다시 돌아온 것을 합포환주(合浦還珠)라고 함.
♣ 합합[溘溘]갑자기 들리는 물소리, 추운 모양
♣ 합합[嗑嗑]말이 많은 모양, 웃는 모양, 깔깔 웃는 소리
♣ 합합[呷呷]오리의 우는 소리, 여럿
♣ 합합[哈哈]웃는 소리, 농담, 또는 농담함, 남자
♣ 합환전[合歡殿]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궁전을 말한다.
♣ 항간[行間]항오(行伍)의 사이라는 뜻이니, 즉 군중(軍中)이라는 말.
♣ 항갈[恒碣]항(恒)은 산서성(山西省) 영구현(靈邱縣)의 남쪽에 있는 항산(恒山)을 말하고, 갈(碣)은 직례성(直隷省) 동남쪽에 있는 갈석(碣石)을 말한다.
♣ 항기궁자미[恒飢窮子美]두보(杜甫). 그의 시에, “항상 굶은 어린 자식 안색이 처량하다.” [恒飢稚子色凄凉]한 것이 있다.
♣ 항남[巷南]항남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완적(阮籍)과 그 조카 완함(阮咸)이 살던 가난한 남쪽 동네로, 숙질간의 관계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世說新語 任誕》
♣ 항두득고서[航頭得古書]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 큰 뱃머리[大航頭]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다 한다.
♣ 항룡유회[亢龍有悔]항룡(亢龍)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 그 이상 더 올라갈 수 없어 이젠 내려갈 도리밖에 없다는 의미. 부귀가 극에 달하면 패망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로 쓰인다.
♣ 항맥오의백성가[巷陌烏衣百姓家]세대가 변천되어 천하에 임금이 바뀐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오의(烏衣)는 제비의 별칭으로, 옛날 왕씨(王氏)ㆍ사씨(謝氏) 등 명가(名家)에 깃들였던 제비가 지금은 일반 사람의 집에 옮겨 날아든다는 뜻인데, 유우석(劉禹錫)의 오의항시(烏衣巷詩)에 “옛날 왕사 집 당 앞의 제비가 일반 백성 집에 날아드누나[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한 데서 온 말이다.
♣ 항백[巷伯]늙은 내시(內侍)를 이르는 말인데, 주(周) 나라의 신하 맹자(孟子)가 참소를 입어 내시로 좌천되자 항백이란 시를 노래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낮은 벼슬을 감수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小雅 巷伯》
♣ 항북유[巷北遊]같은 동네에서 함께 살면서 즐겁게 노닐던 때가 그립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핍측행(偪側行)’ 시의 “궁박하기는 어쩜 또 그리도 궁박한고, 나는 골목 남쪽 그대는 골목 북쪽. 유감일세 같은 동네 이웃 살면서, 열흘에 한 번도 얼굴 대하지 못하다니.[偪側何偪側 我居巷南子巷北 可恨鄰里間 十日一不見顔色]”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6》
♣ 항사[項斯]당 나라 사람. 그가 자신이 지은 시권(詩卷)을 가지고 양경지(楊敬之)를 찾아본 뒤부터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경지가 그에게 준 시에 “몇 차례 시를 보니 시마다 좋았지만 그 표격(標格)은 시보다 훨씬 나았어라. 나는 한평생 남의 선(善) 숨길 줄 몰라 만나는 사람마다 항사를 말하곤 하네.” 하였다.
♣ 항사[項斯]항사는 당(唐) 나라 시인인데, 양경지(楊敬之)가 그를 높이 사서 시를 짓기를, “평생에 남의 장점을 감출 줄을 몰라서,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항사 이야기를 한다네.” 하였다. 《南部新書》
♣ 항사[恒沙]항하(恒河)의 모래.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항하(恒河)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의 두 언덕이 다 모래이므로 부처가 그것을 취하여 최다(最多)의 수로 비유하였음. 금강경(金剛經)에 “諸恒河所有沙數 寧不多乎"라 하였음.
♣ 항산[恒産]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 근거인 일정한 생업. 일정한 생활을 할 만한 재산.
♣ 항산사[恒山蛇]항산사는 항산에 있는 솔연(率然)이라는 큰 뱀을 말한다. 항산은 중국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에 있는데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孫子兵法》 구지(九地)에 “상산에 솔연이라는 뱀이 있는데 머리를 때리면 꼬리가 덤벼들고 꼬리를 때리면 머리가 덤벼들며 한 허리를 때리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덤벼든다.” 하였다.
♣ 항산항심[恒産恒心]재산이 있어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항성천[恒星天]항성이 달려 있는 하늘을 이름. 항성이란 곧 위치가 변하지 않는 별을 가리킨 것으로, 태양(太陽)과 이십팔수(二十八宿)가 바로 그것이다.
♣ 항심[恒心]언제나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떳떳한 마음(또는 착한 마음)
♣ 항아[姮娥]항아는 본시 예(羿)의 아내인데 예(羿)가 구해둔 불사약(不死藥)을 훔쳐 먹고 월궁에 도망가서 혼자 살았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을 얻어 왔는데, 이것을 항아(姮娥)가 도둑질해 먹고 신선이 되어 달 속에 들어가 월정(月精)이 되었다.” 하였다.
♣ 항아계수[姮娥桂樹]항아는 달을 가리킨 것으로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으며 흰 토끼가 옥도끼로 약을 찧어 인간에 보낸다는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 항아분월[嫦娥奔月]예가 서왕모에게서 불사약을 부탁해 가져왔는데 예의 아내 항아(姮娥)가 이를 훔쳐먹고 월궁으로 날아가 버렸다. 항아는 약을 먹기 전 미리 유황(有黃)이라는 무당에게 그녀를 대신하여 점을 치게 했다 한다. 유황이 점을 친 후 항아에게 말하길, “점괘 결과가 매우 길하며, 그대는 홀로 서쪽으로 가게 될 터인데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이후로 앞길이 밝으리라.”고 하였다. 항아는 무당의 말을 듣고 망설일 것도 없이 단호하게 불사약을 삼키고 월궁으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허나 그녀가 월궁에 도착하자마자 뜻밖에도 두꺼비로 변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후세에 장기적인 유전 과정 중에서 약을 훔치는 내용은 약화되었고, 두꺼비로 변한 대목은 차츰 사라져서 항아는 결국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신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 항아지고서[姮娥之孤棲]옛날에 후예(后羿)가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두었더니, 그의 아내 항아(姮娥)가 그것을 훔쳐 먹고 월궁으로 도망가서 외롭게 산다는 신화(神話)가 있다.
♣ 항액[亢軛]수레의 가로목을 높이다. 나란히 달리다.
♣ 항왕[降王]항왕은 곧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을 이르는데, 그의 재위시(在位時)에는 특히 군웅(郡雄)이 할거함으로써 국력이 쇠퇴해짐과 동시에 후백제의 침공을 자주 받게 되자, 민심이 이미 기울어진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항복을 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 항왕목중동[項王目重瞳]항왕은 초왕(楚王) 항우(項羽)로 이름은 적(籍). 중동(重瞳)은 한 눈에 두 개의 눈동자가 있는 것으로 훌륭한 사람의 상(相)이라 한다. 사기(史記) 항우기찬(項羽紀贊)에 “옛날 순(舜) 임금이 중동이란 말을 들었는데, 항우도 중동이었다 한다.” 하였다.
♣ 항왕무뢰목중동[項王無賴目重瞳]항우(項羽)의 눈에 동자(瞳子)가 둘씩이라 한다. 항우가 눈에 동자가 둘씩이나 가졌으면서 한신과 같은 훌륭한 장수를 몰라보고 버려서, 자기의 적(敵)인 한왕(漢王)에게 가도록 하였다는 말이다.
♣ 항요[恒曜]항성(恒星)을 말함.
♣ 항장검무[項莊劒舞]홍문(鴻門) 잔치에서 항장이 패공(沛公)을 죽이고자 연석 앞에서 칼춤을 추었다.
♣ 항저외가성[降渚畏歌聲]옛날 요(堯)의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남편인 순(舜) 임금이 창오산(蒼梧山)에서 세상을 떠나자, 찾아 가다가 소상강(瀟湘江)을 못 건너고는 울면서 이 물에 빠져 죽으니, 이가 곧 상군(湘君)이다. 전국 시대 초(楚)의 충신 굴원(屈原)은 임금이 자기 말을 따르지 않자, 자신도 이 물에 빠져 죽으려 하여 초사(楚辭) 구가(九歌)를 지었는데, 이 중 상군(湘君)에 “황제의 딸이 북쪽 물가에 빠지니 아름다운 그 모습 아련히 나를 슬프게 하네.[帝子降于此渚 目眇眇兮愁予]" 한 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묘묘(眇眇)는 아름다움의 형용사이다.
♣ 항적[抗迹]높은 자취.
♣ 항주소일[杭州消日]당 선종(唐宣宗) 때 영호도(令狐綯)가 이원(李遠)을 항주 자사(杭州刺史)로 천거하자, 선종이 이르기를, “이원의 시에 ‘청산의 경치는 천 잔의 술을 싫어하지 않고, 백 일을 오직 한 판의 바둑으로 보내노라.[靑山不厭千杯酒 百日惟消一局棋]’ 하였으니,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결국 영호도의 권유에 의해 그를 항주 자사로 제수하였는데, 과연 이원이 정사는 제쳐 두고 술과 바둑을 일삼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詩紀事 卷五十六》
♣ 항풍항우[恒風恒雨]노상 부는 바람과 노상 내리는 비.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보임.
♣ 항하[恒河]인도 갠지스 강의 음역(音譯)이다.
♣ 항하사[恒河沙]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항하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 항해[沆瀣]깊은 밤중에 내리는 이슬 기운인데, 도가(道家)에서는 이것을 수명(修命)의 약으로 들이마신다. 열선전(列仙傳) 에 “봄철에는 조하(朝霞)를, 여름철에는 항해를 복식(服食)한다.” 하였다.
♣ 항해금경[沆瀣金莖]항해는 한밤중에 생겨나는 감로(甘露)로, 선인들이 마시는 것이며, 금경은 높은 하늘의 이슬을 받는 승로반(承露盤)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건장궁(建章宮)에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銅)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서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漢書 卷25 郊祀志上》
♣ 항해부금경[沆瀣浮金莖]항해는 한밤중에 생겨나는 감로(甘露)로, 선인들이 마시는 것이며, 금경(金莖)은 높은 하늘의 이슬을 받는 승로반(承露盤)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여, 건장궁(建章宮)에다가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서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漢書 卷25上 郊祀志》
♣ 항해정양[沆瀣正陽]항해(沆瀣)를 마시고 정양(正陽)으로 입을 씻는다는 구절이 있다. 천지의 정액(精液)이 새벽에는 항해가 되고, 낮에는 정양(正陽)이 된다는 것이다. 《楚辭》
♣ 항행[抗行]고결한 품행. 고결한 언행.
♣ 해가[薤歌]만가(挽歌). 상여(喪輿)가 나갈 때에 부르는 노래임. 해(薤)는 부추 종류인데 사람의 목숨이 부추 잎에 맺힌 이슬처럼 쉽게 소멸된다는 뜻에서 나온 뜻임.
♣ 해갑당[蟹甲鐺]게딱지솥. 작은 솥을 시속에서는 게딱지(蟹甲)라고 함.
♣ 해개지배량원근[海豈持盃量遠近]즉 큰 것을 볼 줄 모른다는 말이다. 반고(班固) 유통부(幽通賦)에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旣傾蠡而酌海 遂側管而窺天]" 라고 하였다.
♣ 해객사[海客査]해변(海邊)에 8월이 되면 어디선지 떼배가 왔다가 간다 한다.
♣ 해객조[解客嘲]한(漢) 나라 때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초할 적에 어떤 객이 양웅에게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고 태현경(太玄經)만 초하고 있음을 조롱한 데 대하여 양웅이 이를 해명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
♣ 해거도위[海居都尉]해거도위는 정조(正祖)의 딸 숙선옹주(叔善翁主)와 결혼하여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진 홍현주(洪顯周)를 이르는데, 해거는 바로 그의 호임. 홍현주는 홍석주(洪奭周)의 아우로서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 해곡[嶰谷]곤륜산(崑崙山)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옛날에 황제(黃帝)가 영륜(伶倫)을 시켜서 이곳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잘라 황종(黃鍾)의 관(管)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風俗通 聲音序》
♣ 해곡령[嶰谷伶]해곡(嶰谷)의 영윤(伶倫)이라는 말로, 음률(音律)에 능통한 사람, 혹은 문예에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옛날 황제(黃帝)가 영윤에게 성률(聲律)을 제정하도록 명하자, 그가 해계지곡(嶰谿之谷)의 대나무를 가지고 12율려(律呂)를 만들었다고 한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 해공[海空]강희맹(姜希孟)의 증김태수시(贈金太守詩)에 의하면 “처음 두류록을 보고 나서는 유람할 생각이 다시 이어졌는데 다시 해공사를 만나서 들어보니 행할 뜻이 날로 더욱 깊어지누나[初見頭流錄 勝遊思更續 復遇海空師 行意日彌篤]”하였다. 《私淑齋集 卷三》
♣ 해구맹[海鷗盟]전원(田園)으로 돌아가 살리라는 백구(白鷗)의 맹세를 말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갈매기와 몹시 친하게 지냈는데, 갈매기를 잡을 마음을 가지고 바닷가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위에서 날면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마음을 툭 터놓고 상대를 대하거나,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列子 黃帝》
♣ 해국[海國]해국은 조선을 의미하는 말이다.
♣ 해궁[海宮]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용왕(龍王)의 궁전(宮殿)인데, 여기서는 부처님이 돌아간 지 7백 년 후에 남천축(南天竺)에서 태어난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에 들어가서 철탑(鐵塔) 속에 감추어진 화엄경(華嚴經)을 가지고 나왔다는 전설을 말한 것이다.
♣ 해금지천풍[海禽知天風]장자(莊子) 지락(至樂)에 “바다 새가 날아와 노(魯) 나라 도성 교외에 이르자, 임금이 환대를 극진히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참고로 이태백집(李太白集) 권8 증임성노주부잠(贈任城盧主簿潛)에 “海鳥知天風 竄身魯東門”이라는 시구가 나온다.
♣ 해기[駭機]돌연히 촉발한 노기(弩機)라는 뜻으로 갑자기 발생한 화난(禍難)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一 皇甫嵩列傳》
♣ 해기[薤鄿]해점은 해엽점(薤葉簟)의 준말로, 마치 부추 잎을 펴놓은 것처럼 보이는 대자리를 이름. 기주(鄿州)는 예로부터 죽산물(竹産物)의 명소(名所)로 알려졌다.
♣ 해낭[奚囊]해노(奚奴), 즉 어린 종자(從者)가 가지고 다니는 시고(詩稿)를 넣는 주머니를 말한다.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이하소전(李賀小傳)에, “이장길(李長吉)이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제공(諸公)들과 노닐면서 항상 어린 종자를 데리고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어린 종자의 등에다가 오래 묵은 비단 주머니를 지고 따라다니게 하였다. 그리고는 우연히 좋은 시구를 얻으면 즉시 시구를 써서 그 주머니에 넣었다.” 하였다.
♣ 해낭습추경[奚囊拾秋景]행음(行吟)하면서 얻은 시초(詩草)를 주머니에 넣는다는 뜻이다. 당(唐) 나라 때 이하(李賀)가 명승지를 구경하면서 얻은 시를 해노(奚奴)가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넣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二百三李賀傳》
♣ 해노[奚奴]동복(童僕). 해노는 수행하는 어린 종자(從者).
♣ 해노습득[奚奴拾得]당(唐) 나라 때 이하(李賀)가 명승지를 구경하며 지은 시를 해노(奚奴; 종)가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해당부인[海棠夫人]두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모친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보는 모친이 해당부인(海棠夫人)이기 때문에 해당화에 대해서 하나의 시편도 남겨 놓지 않고 있다.
♣ 해당시[海棠詩]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20에 수록되어 있는 ‘나의 우거인 정혜원 동쪽에는 온갖 꽃들이 산에 가득한데, 해당화 한 그루가 서 있건마는 그 고장 사람들은 귀한 줄을 모른다.[寓居定惠院之東 雜花滿山 有海棠一株 土人不知貴也]’라는 시를 말하는데, 동파의 시 중에서도 절창(絶唱)으로 꼽히는 이 시를 줄여 보통 ‘정혜원 해당시(定惠院海棠詩)’라고 부른다. 정혜원은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에 있는 절 이름으로, 동파가 원풍(元豐) 3년(1080)에 유배된 뒤 이곳에 임시로 거처하였는데, 자기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많이 피어 있는 해당화를 보고는, 자기나 해당화나 잘못되어 이곳 황주에 와 있다는 비감을 토로하고 있다.
♣ 해대[海岱]해(海)는 발해(渤海)를 가리키고, 대(岱)는 태산(泰山)으로, 그 사이의 산동 지방을 해대라 칭한다.
♣ 해동[海童]전설 속에 나오는 바다 속에 산다고 하는 신동(神童)의 이름이다.
♣ 해라[海螺]악기(樂器)의 한 가지인데, 큰 조개 껍데기로 만들어 피리처럼 분다고 한다.
♣ 해란[陔蘭]효성이 지극한 남의 아들에 대한 경칭이다. 문선(文選)에 나오는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 가운데 “循彼南陔 言采其蘭”이라는 구절에서 연유한 것이다.
♣ 해랑[奚囊]당나라 시인 이장길(李張吉)은 놀러 나갈 때에 반드시 아이종[小奚]에게 주머니를 들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짓는 대로 그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서, 저녁에 돌아오면 주머니 속에 시가 가득 차 있었다. 당서(唐書) 이하전(李賀傳)에 “하(賀)는 매일 문밖을 나가면서 아이종을 시켜 등에 옛 금낭(錦囊)을 짊어지게 하고 보이는 것에 따라 글귀를 만들어서 그 금낭 속에 넣었다.” 하였다.
♣ 해로[薤露]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만가(挽歌)를 말한다. 고금주(古今注) 중권(中卷)에, “해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소리이다. 전횡(田橫)의 문인(門人)에게서 나왔는데, 전횡이 자살하자 문인들이 슬퍼하여 그를 위해 비가(悲歌)를 지은 것으로, 사람의 목숨이 풀잎의 이슬방울같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하였다.
♣ 해로가[薤露歌]초상 때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로서 후세에는 만장을 말함. 한(漢) 나라 초기 제왕(齊王) 전횡(田橫)이 나라를 잃고 자살하자, 그의 문도(門徒)들이 슬퍼하여 인생은 마치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고 노래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 가사에 “부추 위에 맺힌 이슬 어이 쉽게 마르나. 말라도 내일 아침 다시 젖는데. 인생은 한 번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 하였음. 해로와 호리(蒿里) 2장이 있다. 《古今注 音樂》
♣ 해로동혈[偕老同穴]부부가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한 곳에 묻힘. 곧 생사를 같이하는 부부의 사랑의 맹세를 뜻한다.
♣ 해로사[薤露詞]나물 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 뜻으로 만사(挽詞)를 의미함.
♣ 해로편[薤露篇]만시(挽詩)를 말한다. 옛날 만가(挽歌)에 해로(薤露)와 호리(蒿里)의 2장(章)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搜神記 16》
♣ 해마[害馬]말[馬]의 천성(天性)을 해친다는 뜻으로, 즉 본성(本性)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莊子 徐無鬼》
♣ 해만만[海漫漫]바다가 망망하다는 뜻인데,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신선을 구함을 풍자한 시의 제목. 풍유(諷諭)에 보임.
♣ 해망은조[解網殷祖]탕 임금이 들판에 나가다가, 사냥꾼이 그물을 사방으로 쳐 놓고 “모든 새짐승은 다 내 그물에 걸리라.”고 비는 것을 보았다. 이에 탕 임금은 너무 심하다 여겨서 세 군데를 터 놓고는 “피하기 싫은 새짐승만 이 그물에 걸리라.”고 빌므로 제후(諸侯)들이 듣고 그의 성덕(聖德)을 찬양하였다. 《史記 殷本記》
♣ 해망축[解網祝]탕(湯)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사면(四面)에 그물을 쳐 놓고 “상하 사방에 있는 짐승이 다 내 그물로 들어오라.”고 비는 것을 보고는, 탕 임금이 삼면의 그물을 걷어 버리고 일면만 남겨 두고서 그 사람에게 다시 “왼쪽으로 가려는 놈은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려는 놈은 오른쪽으로 가고 위로 올라가려는 놈은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놈은 내려가라. 나는 나의 명을 범하는 놈만 취하리라.”고 빌도록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殷紀》
♣ 해부[海賦]목현허(木玄虛)의 해부(海賦)가 있다.
♣ 해분[解紛]해분은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 해사[薤詞]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만가(輓歌)를 말한다. 고금주(古今注) 중권(中卷)에, “해로(薤露)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소리이다. 전횡(田橫)이 자살하자 문인들이 슬퍼하여 지은 비가(悲歌)로, 사람의 목숨이 풀잎의 이슬방울같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하였다.
♣ 해사수정격년회[海槎雖定隔年回]바닷가에 해마다 팔월(八月)이면 어디서인지 떼배[槎]가 왔다가 간다 한다.
♣ 해산도솔[海山兜率]어느 사람의 꿈에 바다 속의 산에 갔더니 정결한 집이 하나 있어 낙천원(樂天院)이라는 말을 듣고 백락천이 시를 짓기를, “바다 속의 산은 나의 돌아갈 곳이 아니요, 돌아간다면 응당 도솔천(兜率天)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그것은 백락천이 불교를 독실히 믿으므로 불경에 말한 대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있는 도솔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 해산증대낙천래[海山曾待樂天來]당 나라 때에 어느 사람이 꿈에 바다 가운데 산에 들어갔더니, 신선이 사는 곳에 낙천원(樂天院)이란 집을 비어 두고, “장차 중국의 백락천(白樂天)이 죽어서 이 집에 올 것이다.” 하였다. 백락천이 그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나는 불법을 배우고 신선을 배우지 아니하니 아마도 그대의 이 말은 헛 전할 것일세. 해산이 나의 돌아갈 곳이 아니라 간다면 도솔천으로 갈 것일세.[吾學空門不學仙 悲君此語是虛傳 海山不足吾歸處 歸則應歸兜率天]”하였다.
♣ 해삼고[海三枯]많은 세월이 흐르는 것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의 신선(神仙)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니, 마고가 봉래산(蓬萊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지난번에 봉래산에 가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적보다 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육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神仙傳 麻姑》
♣ 해상도[海上桃]반도(蟠桃)를 말한다. 반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로, 삼천 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창해(滄海) 속에 도삭산(度朔山)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큰 복숭아 나무가 있다.” 하였다.
♣ 해상옹[海上翁]한(漢) 나라 때 흉노(匈奴)에 사신갔다가 흉노에 의해 북해상(北海上)에 억류된 지 19년 만에야 풀려 돌아왔던 충신 소무(蘇武)를 가리킨다.
♣ 해상유의[海上留衣]헤어지면서 정표를 남긴다는 뜻이다. 한유(韓愈)가 조주(潮州)에 있을 적에 중 태전(太顚)과 친하게 지냈는데, 원주(袁州)로 떠나오면서 옷을 벗어 남겨 두어 이별의 정을 표하였다. 《唐宋八家文 卷3 與孟尙書書》
♣ 해서[楷書]이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예서를 더욱 쉽게 규율화시킨 것이다. 해서(楷書)의 ‘楷’자는 ‘본보기’라는 뜻이 있는데, ‘사람들이 본받아서 쓸 만한 표준적인 글자체’라는 의미에서 해서(楷書)라는 명칭이 생긴 것 같다. 이를 정서(正書)라고도 하였다. 한나라 이후 점차 애호되어 6조시대를 거치면서 정착이 되어갔다. 이로써 한자는 점과 획으로 구성된, 완전히 추상적인 자형으로 바뀌었고 회화적인 특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표적인 서체로 장맹룡비와 구성궁체, 안근례비 등을 들 수 있다.
♣ 해성[諧聲]육서(六書)의 하나. 형성(形聲)이라고도 함. 두 글자를 합하여 한 자를 이루어 한쪽은 뜻을, 한쪽은 의미를 나타내는 일. 예를 들면, 강(江)ㆍ하(河)는 다 ‘물수’ 변을 따랐으니, 물은 뜻, 공(工)ㆍ가(可)는 그 음임. 주례(周禮) 주(注)에는 이것을 해성(諧聲)이라 하였음.
♣ 해수[亥首]옛날에 해(亥)의 고자(古字)를 파자(破字)하여 “이(二)의 머리에 육(六)의 몸이다.[二首六身]" 한 설(說)이 있다.
♣ 해수[薤水]후한(後漢)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가 되었을 때,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이 말없이 염교[薤] 한 뿌리와 물[水] 한 잔을 내놓았는데, 이것을 보고는 “염교 뿌리를 뽑듯 위세를 부리는 토호(土豪)를 제거하고, 물처럼 나 자신을 맑게 하라는 뜻이다.” 하고 깨달아 선정을 베풀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龐參列傳》
♣ 해수불파[海水不波]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월상씨(越裳氏; 국명)가 먼 곳에서 와서 흰 꿩을 바치며, “하늘에 모진 바람과 궂은 비가 없고, 바다에 험한 파도가 없은 지가 3년이나 되니 아마도 중국에 성인(聖人)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해수하여신[亥首下如身]해(亥) 자 는 전(篆)으로는 ▣모양으로 썼는데, 옛날 산가(算家)의 기호로 그 글자의 머리를 세로 세운 ‘▣’는 이만(二萬)을 뜻하고, ‘▣’는 육천(六千), ‘▣’는 육백 육십(六百六十)을 뜻하였다. 따라서 해(亥) 자의 머리와 아래 몸통[身]을 다 합치면 2만 6천 6백 6십이 된다.
♣ 해숭도위[海嵩都尉]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한 윤신지(尹新之)의 봉호(封號)이다.
♣ 해시[海市]해시는 바람이 없는 조용한 날에 대기(大氣)의 밀도(密度)와 광선(光線)의 반사(反射)와의 관계로 인하여 멀리 해변(海邊)이나 사막(沙漠)의 상공에 성곽(城郭)이나 누대(樓臺) 등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신기루(蜃氣樓).
♣ 해시지와[亥豕之訛]서적을 베끼거나 책을 간행할 때 비슷한 글자는 잘못 쓰기 쉽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해신독각[獬神獨角]해(獬)라는 짐승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요 상상의 동물인데, 사람의 마음속을 잘 알아본다고 한다. 예전부터 우리 나라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라는 것이 그것이니, 그 궁문으로 드나드는 백관들을 충신인지 간신인지를 알아본다는 의미로 그렇게 궁문 앞에 세운 것이다.
♣ 해심려불측[海深蠡不測]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없듯이, 천박한 식견으로 깊은 경지를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해아삼[孩兒蔘]사람의 형체와 비슷하게 생긴 인삼을 말하는데, 이 삼이 특효가 있다고 한다.
♣ 해악[海嶽]사해(四海)와 오악(五嶽)을 말한다.
♣ 해안[蟹眼]게 눈알로, 물이 막 끓기 시작할 때의 작은 거품을 형용한 것이다.
♣ 해안[海眼]연못의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든 유출구(流出口)를 말한다. 연못을 만들 때 바다나 강으로 물이 빠져나가도록 땅 속으로 구멍을 뚫기 때문에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 해안[海眼]연적(硯滴)의 모양을 이름. 중국 복주(福州)의 설봉(雪峯)에 조수(潮水)에 따라 나오는 샘이 있어, 조수가 오를 때면 물이 졸졸 나오고 조수가 물러가면 그치므로 이를 해안(海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연적의 물방울 나오는 모양을 비유한 것이다.
♣ 해안[海眼]천안(泉眼)으로, 샘물이 빠져 나가는 구멍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샘물이 땅속을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믿었으므로 이렇게 칭하였다.
♣ 해안사[海安寺]개성(開城) 서쪽 24리 봉명산(鳳鳴山)에 있었음. 《輿地勝覽》
♣ 해안어린[蟹眼魚鱗]게의 눈과 고기 비늘은 곧 차를 끓일 때에 물이 부그르르 끓어오르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 해안하청[海晏河淸]천하의 태평을 말함.
♣ 해약[海若]북해 약(北海若)의 준말로, 약(若)은 바다 귀신의 이름이다. 널리 해신(海神)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 해양[海陽]광주(光州)의 고호임.
♣ 해양[海陽]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 해어지화[解語之花]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이르는 말.
♣ 해어화[解語花]말을 이해하는 꽃. 즉, 미인을 일컫는 말. 당(唐)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에게서 유래한 말.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당 명황(唐明皇)이 비자(妃子)와 함께 태액지(太液池)의 천엽연(千葉蓮)을 구경하면서 비자를 가리켜 해어화라 하였다.” 하였다.
♣ 해엽[薤葉]부추잎을 죽 늘어놓은 것처럼 생긴 대자리를 가리킨다.
♣ 해엽점[薤葉簟]해엽점은 마치 부추 잎을 펴놓은 것처럼 보이는 대자리를 이름. 백거이(白居易)의 기이기주시(寄李鄿州詩)에 “낙매화곡의 젓대 소리에 봄은 다 가고 해엽의 자리 썰렁한 데서 가을인 줄 알겠네[笛愁春盡梅花裏 簟冷秋生薤葉中]”하였고, 또 기기주점여원구시(寄鄿州簟與元九詩)에는 “매끄럽기는 부추잎 펴논 것 같고 써늘하기는 와룡의 비늘 같구나[滑如鋪薤葉 冷似臥龍鱗]”하였다. 그런데 기주(鄿州)는 예로부터 죽산물(竹産物)의 명소(名所)로 알려졌다. 《白樂天集 卷十六, 續集 卷十五》
♣ 해오[蟹螯]게의 집게발 속에 든 속살로 진미의 한 가지. 진서(晉書) 필탁전(畢卓傳)에 “바른손에 술잔을, 왼손에 해오를 들고 주지(酒池) 속에 헤엄치면 한평생 만족하다.” 하였다.
♣ 해옥신주[海屋新籌]전설에, 세 사람의 노인이 함께 있는 자리에 어떤 자가 그 나이를 묻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내 나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소년시절에 반고씨(盤古氏)와 지면이 있을 뿐이다.” 하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 그때마다 산가지 한 개씩 놓아두었는데 이제까지 놓아둔 산가지가 이미 열 칸 집에 가득 쌓였다.” 하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먹은 반도복숭아는 그 씨를 곤륜산 밑에 버렸는데 그 높이가 이미 곤륜산과 같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뜻이다. 《東坡志林 卷二 三老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