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해설한 책이 서점에 넘쳐난다. 그런데 제각각의 해석들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다보니 읽어도 제각각 조각들뿐이어서 서로 의미를 소통하지 못한다. 의미가 닿지 않으니 읽어도 늘 제자리다. 우선은 내가 한문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극복이 어렵다. 나이 든 탓에 새롭게 무엇을 외우고 깨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틈틈이 읽어 그 의미들을 스스로 연결해 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책은 판덩의 『나는 불안할 때 논어를 읽는다』라는 책이다. 저자는 학자가 아니므로 우선 해석이 자유분방할 것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스스로 <논어>를 깨우쳐 <판덩독서>를 이끌고 있다는 점이 또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본래 논어는 500장(章) 글이 학이(學而)를 시작으로 요왈(堯曰)까지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논어> 중에서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세 편만을 담아 현대적 감각을 살려 자세히 풀이하고 있어 읽는 부담을 줄여준다.
책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에 저자는 ’논어 한 문장으로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라고 토를 달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 것은 ’읽는다‘는 것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절대로 <논어>는 여느 소설책처럼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의 뜻을 명확히 알고 되풀이 읽으며 내 것으로 체득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얼른 읽고 다른 책을 또 읽으려는 독서에 대한 그릇된 욕심 때문이다.
아마도 공자께서는 이런 나 같은 얼빠진 사람들을 계도하려고 이 문장을 첫 머리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즉, 배우고 제때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이다. 서둘러 읽다보니 배운 것이 없고 그러다보니 즐거움을 알 까닭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집중하는 글자는 학(學)과 습(習)이다. 즉, 배우고 익힌다는 말이다. 이 말을 학교에서는 학습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학습이라는 말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는 학(學)은 있으나 습(習)이 없다.
배우기는 하는데 익히는 과정이 없으니 배움이 숙성이 안 된다. 이유는 한 가지다. 모든 학교년은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습한다. 교과서는 진도라는 이름으로 계획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그러데 그 진도에 별로 여유가 없다. 학(學)에 당연히 따라야할 습(習)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은 개인의 학습 능력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모든 학생이 똑같은 교과서의 똑같은 페이지를 펴고 있다. 앞장을 모르면 뒷장도 모르기 마련이다. 교사의 설명은 일률적이다. 결국 학생들의 학습 부족은 사설 학원에서 채울 수밖에 없다.
교사는 국가로부터 학생 교육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학생이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는 일정 부분 교사의 책임이다. 말하자면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들은 이 부분을 감추기 위해 기초학력평가도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배움이 즐거울 리가 없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 포기 학생이 늘어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학업에 즐거움을 만끽하려면 당연히 학(學)이 아니라 다양한 기회가 부여된 습(習)이 강화되어야 한다.
선진 외국의 학습 방법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더디더라도 교사의 설명보다는 협동하여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 학습 방법이 느려보여도 결국은 오래도록 학습이 가능하게 한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와 같다.
배우고 익힘과 관련해서 <위정(爲政)> 편의 ‘온고이지신’과 관련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전체 문장은 이렇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라는 말이다. 풀이하면,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옛것을 익힌다’는 말이 바로 ‘학이시습지’와 그 의미가 통하는 말일 것이다. 옛것을 익힌다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옛것, 즉 선현의 말씀이나 지혜를 듣고 이를 익힌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옛것을 익히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정작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옛것을 배우고->배운 것을 익히고->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안다 것이 된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앎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런 과정에는 누구다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춘추시대에 글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공자는 누구나 글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이 자신이 가르침을 천천히 이해하고, 익힌 뒤,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를 바랐다. 공자의 이런 교육관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말하자면 교육계의 블루오션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우리에게도 있다. 바로 자랑스러운 세종대왕이다. 그 역시 어리석은 백성이 글을 읽지 못함을 가엽게 여겨 한글을 만드셨다. 공자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공자는 한자를 고수했지만 세종은 그 한자가 서민들에게 너무 어려운 글자라 여긴 것이다.
<위정> 편의 색난(色難)에 대한 이야기도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다. 저자는 그곳에 ’효란 자고로, 웃는 얼굴로 부모를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주석을 달아두었다. 자유가 공자에게 효에 대해서 물었더니 공자가 말하길, “색난이다!”라고 한 마디로 답했다.
‘색난(色難)’은 ‘상냥한 얼굴을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의미다. 사람을 대할 때 환한 얼굴로 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내 표정은 상대방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어린 아이들 바라볼 때와 노인을 바라볼 때는 우리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어린 아이에게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게 된다.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표정은 항상 부드럽고 온화하다. 넘어지면 다칠 새라 걱정하면서도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를 보면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한다.
그러나 노인을 대할 때 상냥한 표정을 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노인을 보면 측은지심이 앞선다. 아무리 잘 보살펴도 노인들은 점점 더 노쇠해지고, 병이 들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공자는 상냥한 표정으로 부모를 대하는 것이 효의 출발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