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이른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내용을 교회출석, 의식참여, 기도, 성서, 헌금 등으로 나눠본다면, 이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나 자신은 성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신자는 기도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만큼이나 성서로써 하나님의 뜻을 경청해야 한다고 했다. 교리사가 하르나크는 초대 교회의 신앙 토대와 기독교의 로마 정복도 초대 신자들의 성서에 대한 열성에 의한 것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초대기독교가 이교와 그리스사상, 로마의 권력, 그리고 자체 내의 이단과 대결하면서, 2세기 말부터 성서가 집결되었고, 많은 호교가들과 교부들이 오직 성서 한 권으로 이들과 맞서 싸운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르나크는 이렇게 된 원인이 단적으로 그들 자신이 성서 자체에 의해 회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반대자 케린투스가 성서의 악문(惡文)을 근거로 이것이 우매한 자와 야만인 상대의 문서라고 공격한데 대해, 오리게네스는 성서의 검박한 옷은 작은 자들까지 보살피는 성령의 자비이며, 이 옷 밑에 무수한 보물이 싸여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이를 읽게 하고, 내외의 적으로부터 이를 옹호하는 일은 호교가와 교부들의 중대한 일이 되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혼자 성서를 읽으라고 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부부가 함께 읽기를 권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동 교육도 성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성서의 신자에 대한 관계를 연장의 목수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말하고, 신자는 시편 1편의 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주야로 성서의 생명에서 양분을 섭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생 안디옥에서 성서 강의를 끊지 않았으며, 더러운 유행가는 암송하면서도 시편 한 편 암송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개탄했다. 제롬(히에로니무스)은 부인들에게까지 원전에 의한 성서 암송의 유익을 권했다.
성서에 의한 초대의 청신한 신앙은, 카톨릭 교회의 직업 종교가들에 의해 의식의 참가와 교리의 암송 등으로 전락하여 중세의 암흑을 초래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서가 재발견되어 기독교는 초대신앙으로 돌아가고 성서 또한 민중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과연 종교개혁은 루터가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쇠사슬에 매인 성서를 발견, 이를 탐독한 데서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성서번역자 윌리엄 틴들은 “쟁기를 든 영국의 소년들로 하여금 교황 이상으로 성서에 정통하게 하겠다.”는 야심을 피력했다.
그런데 이 성서 중심의 개혁 신앙은 오늘날 어떤 상태인가? 과연 크리소스토무스의 개탄대로, 매일 신문 이상으로 성서를 열심히 읽는 신자가 없게 된 것 아닌가? 이리하여 그들은 교황 아닌 목사와 신학자에게 이의 해석권을 넘기고 신앙마저 잃어버린 것 아닌가?
<성서연구> 제98호 (1962년 5월)
첫댓글 그렇습니다. 저 역시 교황 아닌 목사와 신학자에게 이의 해석권을 넘기고 신앙마저 잃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