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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1월10일/주일복음말씀묵상/†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루카20,27-38; 마태22,23-33; 마르12,18-27)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에 대하여 시험받으시다>
이번에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으려 한다.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다의 3대 종파 가운데 하나로서,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였으며, 부활과 천사를 전혀 믿지 않았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의 모순을 제기하고자 모세의 율법 중에서 수혼법(신25,5-6)을 인용하여 질문한다.
루카20,28-33절은 “모세가 우리에게 써 준 글에는‘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와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는다면, 그의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해 후손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고, 둘째도, 셋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으며, 일곱이 모두 그렇게 하였지만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이 모두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의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그분의 부활신앙으로써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또는 그분으로 하여금 모세에 대항하는 표현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29절에 “일곱 형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완전히 꾸며낸 것이다.
이러한 꾸며낸 사건의 배후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죽은 그의 형제의 이름으로 후손을 잇게 하기 위해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히브리 시형제결혼(신명25,5-10) 개념이 나타나 있다.
마태22,29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하느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성경도…알지 못하는”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영적인 지식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또한 “하느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영적인 체험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이것들이 오해를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영적 지식과 영적인 체험을 모두 가져야만 한다.
루카20,34-36절에서 주님은 “이 시대의 아들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저 시대를 얻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으며, 다시 죽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천사들과 같고, 하느님의 아들들, 곧 부활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36절은 34절의 현세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미 죽어서 부활함을 얻게 될 의인들은(35절), 부활한 후에는 결혼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를 분명히 구분하심으로써 사두가이들의 질문을 막아버린다.
주님께서는 오는 시대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을 말씀하신다. 오는 왕국 시대(루카13,28-29; 22,18)와 생명의 부활(요한5,29; 루카14,14; 묵시20,4, 6)은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믿는 이들을 위한 영원한 축복이요 영생 안에서의 누림이다(루카18,29-30; 마태19,28-29).
천사에 대한 지적은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사도23,8). 천사는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혼이나, 생식과 후손을 통한 사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님은 결혼이나 생식과 후손은 이 세대에 속한 것임을 암시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한 사람들이 천사가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분의 요점은 그들이 천사들과 같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선 당시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부활의 삶이 어떠한지”(36-39절; 1코린15,35-44)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제거하신다. 미래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바로 모세 율법의 중심 주절에서 유래한다(37절). 곧 예수님은 탈출3,6절을 인용하여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신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이 족장(아브라함, 아사악, 야곱)들의 하느님(탈출3,6)이라고 말씀하셨던 사건을 예로 드셨다.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이 모세의 가르침에는 부활이 없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모세를 끌어들였다.
탈출3,6절은 “또 이르시니 나는 네 조상의 하느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니라. 모세가 하느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논리는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인데 아브라함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죽은 자의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이 죽었지만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야곱과 이사악도 역시 부활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혼적인 몸은 혼이 그 생명인 타고난 몸이며 혼이 지배하는 몸이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타고난 몸은 혼적이므로 썩을 것으로 욕된 것으로 악한 것으로 심어지므로 장사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할 때는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영적인 몸이 될 것이다. 산혼인 아담은 타고난 사람이고, 생명주시는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분이다. 그리스도의 혼적인 몸은 부활로 영적인 몸이 되었다. 우리의 영은 살아났고 그분과 함께 부활한다. 결국 우리의 혼적인 몸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부활 안에서 영적인 몸이 될 것이다(1코린15,52-57).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
루카20,37-38절은 “그리고 죽은 아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에 관한 부분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는 이들 모두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원문 참조)고 말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또한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시편6,4-5). 따라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이들이 부활의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산 자의 하느님”이라고 부활에 대하여 적극적인 변호하신다.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 불리우므로, 이것은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곧 족장들이 부활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산 자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어느 날 족장들이 부활되리라는 것을 함축(含蓄)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성한 호칭,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부활의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족장들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은 사두가이들에게 비록 그 말씀이 마지막 족장들이 죽은 뒤 수 백 년이 흘렸지만, “하느님은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곧 그 족장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미래에 있을 부활을 위해 그들을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부활을 지적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사람이 죽으면, 사람은 그의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그들의 사상을 반박하신다. 만일 그들의 사상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떨기나무에 관한 부분에서 그분 자신을 “죽은 자의 하느님”으로 소개했어야만 했으며, 그러한 하느님은 결코 모세를 격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리사이들의 의도는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신데 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죽은 자의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시므로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게 될 것이다(로마8,11; 1코린15,50-58).
여기서 루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34-35절)에게 돌아올 몫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분명히 바리사이적인 경향을 가진 몇몇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사두가이들에 반대하여 부활신앙을 옹호하신다(39)는 것을 좋게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적들은 스스로 예수님과 논쟁함으로써 서로 곤란에 빠지고, 그들의 질문은 막히고 말았다(40절, 사도23,6-8).
오늘날 살아계신 주님과 접촉하고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부활의 약속을 주셨으며 그들의 이름과 삶이 그때 이래로 그분의 이름과 언제나 결부되어 있다. 이런 체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에 떨어질 수 없고, 모든 약속의 완전한 최종적인 성취를 함께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성경의 최종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하느님으로부터 아는 사람들의 전권(全權)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부활의 삶은 하느님의 원초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과의 가장 밀접한 교제를 실현시킨다(로마8,11, 29-30).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한 무리를 택하여 자기 이름 안으로 들어와 그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안에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특별한 체험을 주셨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체험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는 것으로서, 그의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하느님께서 이사악에게 주신 체험은 그로 하여금 아들의 누림을 알게 하는 것으로서, 그의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느님이 야곱에게 주신 체험은 성령의 통제로 말미암아 그의 타고난 생명이 처리되고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서 조성되시는 것을 알게 한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고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사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받았을지라도 만일 성령의 통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있게 된다. 이것이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환도뼈의 힘줄이 끊어지고 당신의 타고난 생명이 하느님에 의해 처리를 받을 때 비로소 당신은 겸손한 사람, 두려워하고 떨면서 주님을 좇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날이 될 때, 당신은 방심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우리의 주장을 내세우고 기도하지 않고도 말하고 일을 추진하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쉽게 하느님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서도 확신을 가지는지! 당신의 타고난 생명이 하느님에 의해 만진 바 되고 파쇄되어 자신을 의지하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날, 비로소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 절름발이란 길을 걷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절름발이인 것을 안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에 의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인도되지 못한 사람은 브니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방도가 있고 확신이 있으며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의 통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여기서 브니엘은 “하느님의 낯”이란 뜻이다. 하느님의 낯은 곧 하느님의 빛이다.
옛날의 하느님은 손으로 야곱의 환도뼈를 만졌지만, 지금은 빛으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만지신다! 많은 기회에 당신은 타고난 생명(옛사람)을 수없이 드러내었지만, 정작 당신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얍복 나루에 이르러 당신의 모든 재능을 다 써버리고 타고난 생명의 집중점이 드러날 때, 하느님은 손으로 당신을 만지시고 그것이 당신의 가장 보기 흉하고 가장 악하고 가장 더러운 특징임을 보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눈을 여시고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체험의 관계를 보여주시기를 기도한다. 이 세 가지 체험은 모두 하나의 체험이고 또한 상호 보완적이다. 이 세 가지 중 한두 가지만 가질 때는 굳게 서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체험을 분명히 보아야만 하느님의 길에서 전진할 수 있다.
창세22,5절은 하느님께서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이사악)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한다. 언제든지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내려놓으라고 하실 때 그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이 하느님을 위해 있고 그는 하느님과 조금도 다투지 않았다.
히브11,19절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친 후에 하느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알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히브11,19절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하느님이 창조의 하느님일 뿐 아니라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느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그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리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창세기 15장은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실로 인하여 다시 그를 의롭다고 하셨다. 야고2,21-23절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영적 성숙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