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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주님께 질문을 던지라 [정원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의무감이 아니라 감동으로 살아야 한다
. 애씀과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동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영으로 사는 것이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육으로 봉사하고 애를 쓰면 영이 지치게 된다. 피곤하고 힘들게 된다.
주를 위한다고 힘을 써도 이상하게 무기력해지고 별로 열매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영의 감동을 따라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삶이다.
그것은 단순하고 편안하며 자연스러운 삶이다.
그렇게 영으로 감동을 받고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 수 있는 간단한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주 주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주님의 답변은 우리의 깊은 곳에서 영 안에서 떠오르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걸어가다가 길이 막히거나 급해지면 주를 찾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주님께 묻고 시작하는가?
즉 처음에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먼저 시작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있는가, 주님이 쥐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이 먼저 시작하시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전에 주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떤 설교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첫째 비전을 가져라.
둘째 믿으라.
세째 기도하라.
그분이 믿으라는 것이 주님을 믿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라는 것인지 혼동이 왔다.
게다가 마지막의 순서로 기도를 하라니.. 그러니까 기도는 자기의 비전과 소원을 이루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램프의 거인 이야기를 보자. 램프를 비비면 램프 안에서 뭉개뭉개 구름이 나오고 그 구름이 바뀌어 거인이 된다.
그리고 거인이 말한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주인은 자기의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거인은 그것을 시행한다.
거인은 크고 강하지만 그저 종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램프의 주인이다. 그런데 이 앞의 메시지가 뭔가 좀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거기서 믿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램프를 비비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 든다.
거인 대신에 주님이 나타나시는 것만 다르다.
이것은 분명하고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명령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듣는 자가 우리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이 램프를 비비셔야 한다.
우리가 비비면 안 된다.
우리가 구름이 되든지 안개가 되든지 해서 뭉개 뭉개 나가서 ‘오, 주님..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먼저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듣기 위해서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할 때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된다. “오, 주님.. 제가 오늘 하루 무엇을 하기를 원하세요? 지금 제가 순종하거나 해야할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는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르게 된다.
사람들은 경건을 위하여 영성훈련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오래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시계를 가져다놓고 열심히 노려보면서 기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기도는 혼자서 일방적으로 하게 되면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같이 만나도 혼자서만 이야기를 독점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러한 친구들은 말은 많이 하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적이 없다. 그저 혼자서 나오는 대로 많은 말들을 할 뿐이다. 당연히 당신은 그 친구가 그리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아주 외롭고 힘든 상태에서 그 친구를 만난다면 그날따라 그 친구의 수다가 정말 피곤하며 그것은 당신의 외로움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하는 기도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당신의 궁금증이나 소원에 대해서 주님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면, 그리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 된다.
주님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하는 듣기 싫은 잔소리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신선하게 하고 풍성하게, 생기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자, 그러니 이제 주님께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려보자.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 것인가?
주님의 음성이 귀가 쟁쟁 울릴 정도로 들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어쩌면 조금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주님의 음성과 감동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무릎꿇고 기도를 드렸을 때 처음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일어난 것처럼 마음 속에서 아주 작은 미세한 느낌이 일어나게 된다.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다.
너무나 단순해서 이게 정말 주님의 감동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주님의 감동이나 음성이 아주 어려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주님이 당신과 무슨 퍼즐 게임을 하시겠는가?
음성이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순종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처음에 그렇게 간단한 인상이나 느낌,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어느 여집사님의 간단한 경험을 인용해보자.
이 글은 나의 홈페이지의 회원 코너에 실린 글이다. 나는 우연히 돌아다니다가 이 글을 발견하였다.
이 집사님이 쓴 다른 글도 조금 더 인용해본다.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아주 간단하고 쉽다.
어떤 이들은 도무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아우성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이들은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신다 해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나에게는 주님이 말씀하실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무엇이든지 반복하여 하다보면 요령과 느낌이 생기게 된다. 그 감동과 느낌은 위의 예처럼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갑자기 주님께서 당신에게 지금 당장 보따리를 싸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주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모두가 아브라함이 되면 곤란하다.
믿음의 조상은 한 명쯤 있어야지 너무 많으면 누가 믿음의 자녀, 손자를 하겠는가?
간혹 그런 식으로 흥분해서 보따리를 싸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들은 보따리를 가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그런 감동을 따라 순종하고 움직이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어떤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어떤 것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음식을 덥힌 다음에 따끈따끈할 때 먹는 것은 쉽고 맛이 있다. 하지만 지금 조리한 음식을 일주일 후에 먹는다고 하자. 그것은 맛이 하나도 없다.
감동으로 살지 않고 의무나 틀에 의해서 사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감동을 받은 것을 한 주일 후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 누구의 집에 가고 싶은 감동이 오는데 한 주일 후에 간다.
가는 것이 재미있겠는가?
아무런 감동도 느낌도 없고 의무감에서 가게 되며 영의 교류가 없고 피곤해진다.
어떤 감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섯시에 미리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간다.
그러한 것이 영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감동이 생긴다. 어떤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할 차례인데 이상하게 다른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는 고민한다. 어떡하지? 지금 이게 순서가 아닌데.. 그는 결정한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미리 준비한 것을 하자. 이것은 다음 주에 하지 뭐.. 그는 설교한다.
아무런 힘이 없다.
피곤하고 힘들다.
간신히 설교를 마친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되었다. 앞에서 감동을 받은 메시지를 전한다.
결과는 어떠한가?
전하는 것이 너무 재미가 없고 힘들다.
그것은 저번 주에 해야할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역자들이 프로그램이나 틀에 주의하지 않고 주의 감동에 주의한다면 많은 영혼들에게 충격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어느 주일 오후 예배의 설교를 준비했다.
보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에 걸어가면서 거의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애쓰지 말고 노력하지 말라. 너의 애씀 때문이 아니라 너 자신을 내가 사랑한다..’ 그런 메시지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이런 경험이 많다. 그래서 준비한 설교를 내버려두고 예언의 형태로 그런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온 어느 자매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메시지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눈물로 목욕을 했다.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들은 대체로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다. 감동을 따라 전하는 것은 대부분 영혼들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준다.
나는 메시지를 준비했다가 갑자기 바꾸는 적이 많다.
그 날 갑자기 떠오르는 감동을 전한다. 그리고 나면 성도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다.
“목사님.. 저의 사정을 어떻게 아셨어요?”
“한 주일의 생활을 아예 총정리를 해 주시는 군요..”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메시지는 목회자가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 영계에서 수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메시지가 예배 직전에 떠오르는 것은 어떤 영혼이 문제가 생겨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목회자의 영혼이 감지하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수신하게 되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영감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의 고민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메시지가 갑자기 떠오를 때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고. 또 어떤 영혼이 이러한 문제가 생겼는가 보군..’ 그리고 나중에 보면 그것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은 목회를 내려놓았기에 설교를 하지 않지만 대신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 카페에 글을 쓴다.
그러니 사이버 목회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부분을 강하게 써야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다. 그러면 역시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고. 카페 회원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그러한 예상은 거의 맞다.
글을 올리고 나면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답글들이 주르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동을 따라 살고 감동을 따라 설교하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어느 정도 영이 훈련된 사역자는 성도들이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 쉽다. 그러므로 메시지의 준비나 인도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다. 바람이 흐르듯이 시냇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만 가면 된다.
그러니 사람들을 헌신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위협하고 강요하고 요구하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 무엇을 묻고 그 대답을 기다리는 것 - 그것은 아주 재미있고 쉬운 일이다.
나는 글을 쓰다가 막히게 되면 그 다음을 주님께 묻고 잠이 들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나면 나는 아침에 깨자마자 어떤 답을 느끼게 된다.
꿈속에서 답을 얻기도 한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내 영혼이 깨어서 주님께 응답을 받아오는지 천국에 갔다 오는지 하는 모양이다.
아마 이것을 시도하다보면 이러한 것이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며 무슨 신령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평소에 항상 주님께서 무엇을 내게 요구하시고 원하실 때 그것을 내가 알고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질문을 던져 놓은 상태이다.
그래서 영감을 받는 일이 많이 있다.
몇 년 전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 저녁 몹시 피곤한 상태였는데 지금 당장 어느 집에 가야한다는 감동이 왔다.
나는 그것이 주님이 주신 감동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몹시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나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투정을 해도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가야한다고 계속 압력을 넣으셨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집에 갔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인데 아이가 하나가 있는 집이었다. 나는 내가 그 집에 왜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몰랐다.
그냥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아무 화제나 입에 올리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내적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어떤 자매의 내적 치유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었다. 기도를 하면서 그녀가 어머니의 배속에 있었을 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임신한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 때의 기억으로 돌아가자 이 자매는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하면서 마구 소리치고 울부짖고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물론 자매는 어머니가 임신 3개월이 되었을 때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 자신이 모태에서 3개월이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었다는 것을 그 전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그 치유의 기도를 받고 많이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우연히 하게 되면서 엄마들은 특히 아기를 가졌을 때 조심을 해야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나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이 집의 자매가 임신한 상태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 자매는 당시에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마음이 없었는데 잘못해서 임신이 된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기를 없애자고 하고 아내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가 들어와서 하는 말이 임신했을 때의 엄마의 상태가 중요하며 생각만 해도 아이에게 큰 충격을 주며 혹시라도 아기를 죽이게 되면 평생을 악한 영들에게 시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들은 몹시 놀래고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틀림없다고 하고 결국 아기를 낳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그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기를 통해서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이 경우에 내가 그 감동에 순종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당시 그들은 병원에 가자, 말자 하는 그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감동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뛰어넘는 다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기도 중에 갑자기 가까이에 있는 문구점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생각나고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약간의 안면은 있으나 별 대화는 나눈 적이 없는 분들이다. 문구점에 가보니 평소에 보지 못하던 청년이 있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계시다고 한다. 나는 물어서 그 병원을 찾아갔다. 아주머니는 신앙이 있었고 아저씨는 몇 번 교회에 간 적은 있었지만 잘 몰랐다. 아주머니는 남편이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가 계속 생각이 났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해주었다. 며칠 후에 아저씨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들으니 그 날 이후에 확신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많다. 우리가 주님께 감동을 구하고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신다. 감동을 주며 우리를 이끄신다.
조금 부작용도 있기는 하다.
내 경우에 글을 쓰고 책을 쓰는 것이 사역이니까 전해야 할 메시지를 달라고 항상 주님께 질문을 던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 답들이 너무 많이 오기 때문에 너무 피곤한 것이다.
자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횡단보도를 걸을 때도 수많은 영감과 메시지가 오니까 도무지 이를 견딜 재간이 없다.
이미 영성에 대한 책을 이십 여권 썼는데도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루에 몇 권 분량의 책이 떠오르니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몸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질문을 조금 그만 하고 감동 받는 것을 조금 쉬어야 할 까도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주님으로부터 해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영으로 살고 감동으로 사는 중요한 기초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 감동으로 살게 되고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보면 삶이 아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프로그램을 따라 어떤 틀에 따라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아무 감동이 없어도 의무적으로 시간표와 계획표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은 죽어있는 삶이다.
초대교회에는 놀라운 역동성이 있었다.
교리도 충분치 않고 신학도 충분치 않았지만 그들은 놀라운 풍성함과 열매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영감으로 살고 성령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도 역동적인 삶을 위하여 자연스럽게 열매맺는 삶을 위하여 질문을 주님께 드리고 해답과 감동을 따라 살라.
풍성한 삶을 얻게 될 것이다.
좀 더 많이 쓰여지고 싶은가?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지라. 그리고 기다리라. 드려지고 구하는 만큼 당신은 더 쓰여질 수 있다.
더 영감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이 질문을 주님께 드리고 잠자리에 든다면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잠든 사이에 주님께로 나아가서 그 해답을 찾아 가지고 온다.
당신은 잠이 깨었을 때 그 해답을 느낄 수 있다.
성격이 급해서 그렇게 기다릴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영혼의 움직임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한 가지 더 노파심으로 이야기한다.
절대로 당신에게는 그러한 영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영성이란 누가 따로 전세낸 것이 아니다.
음성을 구하고 듣고 따르는 것은 하나의 삶의 습관이고 패턴일 뿐이지 깊은 영성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영감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은 신앙의 패턴이 영성 중심이 아니라 합리성과 틀 중심인 백인 스타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패턴을 바꾸면 누구나 자유롭게 주님과 교제하며 영감으로 살 수 있게 된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오해가 없도록 말이다.
십 여 년 전에 청년들을 데리고 며칠 간 수련회를 가지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시킨 적이 있었다. 다들 각자가 느낀 주님의 음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했었다. 그러자 어떤 자매가 무지무지하게 거룩한 목소리로 ‘ ~~ 하노라.. ~~ 찌어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그 자매를 진정시켰다.
주님의 음성과 감동을 기다릴 때 당신이 갑자기 선지자나 예언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명령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툭하면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키는데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떠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삭에게는 이 땅을 떠나지 말고 머무르라고 하셨다. 그러니 결혼 생활이 힘들어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본토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는 말씀에 감동을 받고 적용을 하는 것은 웬만하면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그러한 메시지는 정말 특별한 경우이며 일반적인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님은 어떤 말씀을 당신에게 주실까? 남편을 위하여 오늘은 맛있는 반찬을 만들라고 아내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내에게 줄 선물을 지금 사 가지고 가라고 남편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이가 말하는 것을 사랑을 가지고 주의 깊게 들어보라고 부모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감동을 주실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에이.. 겨우 그거야? 나는 굉장히 신령한 계시와 말씀이 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신령한 것이 별것인가? 바로 그게 신령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지 저 멀리 우주에 가서 도를 닦으라고 하셨는가?
그러니 너무 신령한 것을 좋아하지 말고 단순하고 행복하게 감동으로 살라.
주님은 당신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부디 자주 주님께 질문을 던지라. 그리고 듣고 순종하라. 당신의 삶은 풍성해질 것이다.
첫댓글 주님께자주질문하자. 아멘